• 한국인의 뇌리에 1910년부터 1945년은 두 단어로 압축된다. '일제(日帝) 강점기'와 거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다. 그런데 그 시절 요즘 뺨치는 주식과 선물 투기(先物 投機)가 있었다. 벤처기업가의 흥망(興亡)이 있었고 스캔들이 있었으며 자살 열풍이 있었다.

    뒤늦게 밝혀진 그 시대가 문화의 첨단 코드가 되고 있다. '모던 보이' '경성 스캔들' '라듸오 데이즈' '원스 어폰 어 타임' '기담' '그림자 살인' 같은 영화와 드라마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고(書庫) 귀퉁이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 시대를 현재로 불러낸 사람은 30대 국문학자다.

    '경성(京城)의 재발견'을 통해, 한국인 모두를 타임머신에 태워 70~80년 전 세상을 보여준 전봉관(全峯寬·38)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어린 시절을 부산 보수동에서 보냈다. 적산(敵産)가옥이라 불리는 옛 일본식 집들이 즐비하던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습니다. 제 어린 시절의 영화(榮華)가 막을 내린 거죠. 이사 갈 때마다 마루가 점점 대문 앞으로 당겨졌어요. 제게 '과거'는 아픈 기억과 통합니다. 제가 살아보지 못했던 일제 강점기가 더 살기 힘든 시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해운대고 시절 그는 문학을 좋아했다. 그런데 국어시간은 싫어했다. 문학 작품 해석을 놓고 '정답(正答)'을 강요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는 한용운의 시(詩)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를 왜 사랑하는 연인과 나누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지가 궁금했다.

    서울대 국문과를 거쳐 같은 과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좀더 자유롭고 싶었다. 자기가 연구한 이상(李箱)은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이상을 연구하는 나는 왜 텍스트에 갇혀 상상력과 창의력을 억압받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공부를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그의 앞에 잡지 '별건곤'의 1933년 2월호가 나타났다. '금값이 올라가는 바람에 세상은 바야흐로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가 되어버렸다'는 문장은 그를 바꿨다. 시인보다 더 흥미로운 그 시절 투기꾼에게로 빠져든 것이다.

    그를 화신백화점과 우미관 같은 옛 경성 거리를 재현한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그는 일제 시대 지식인 같은 동그란 금테 안경 모습이었다. 가방도 책 한 권이 겨우 들어갈 올드 스타일이다. "아내가 디자이너인데…, 30년대 분위기가 나도록 신경 써서 코디해 준 거예요."

    ▲ 그 시대는 '암흑기'일 뿐이었을까. 그랬다면 신구(新舊) 문명의 충돌 속에서 숱한 꿈과 희망들이 명멸했고, 황금과 주식 투기를 향한 욕망이 용솟음치던 그 시대 사람들의 열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30년대 경성(京城)'을 재발견해 21세기로 불러낸 국문학자 전봉관이 영화 세트장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옛 거리에 섰다. / 부천=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잡지 '별건곤'에서 그 기사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이 든 겁니까.

    "그 시대가 그런 때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곡괭이를 들고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있던 역동적인 시대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무도 그런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그 분야는 문학의 틀을 벗어나는 것 아닌가요.

    "문학의 틀을 벗어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였지요. 그런 학자가 왜 일제시대의 뒷골목 풍경에 매료된 겁니까.

    "현재를 사는 우리가 황금만능주의를 개탄하잖아요. 이미 80년 전 이 땅에도 그런 세상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건데 그동안 공부했던 게 아깝지 않았나요.

    "천만에요! 어느 학문에서도 1930년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걸 다루지 않고 있었어요. 문학은 물론 역사학에서는 그런 '사소한' 얘기를 좀처럼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그럼 어디서 다루겠어요? 철학에서 하겠습니까?"

    그의 책상 위에 널린 광업사(鑛業史) 책들을 본 동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고 한다. 그들은 '하고많은 주제 중에 하필이면 왜 그런 속된 주제를 연구하느냐'고 물었다. 그 자신도 처음에는 이렇다 할 이유를 대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는 깨달으셨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황금의 유혹'을 버리고 국문학자가 되려고 했을 때 진정으로 알고 싶었던 것은 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황금을 모르고 인간을 논한다?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이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그런 질문이 오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삶에서 황금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제가 국문학자이기 이전에 인문학자라고 생각하니 비로소 자유로워지더군요."

    ―KAIST 교수로 간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자유' 때문은 아닌가요?

    "…솔직히 말해서 국문과가 아니라 '인문학부'에서 가르치는 거잖아요.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자리죠. '바로 내 자리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르치고 보니 이공계에도 의외로 글 잘 쓰고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공대생이 시를 공부하기는 쉬워도 시인이 공학을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합니다."

    ―금광 개발 얘기로 돌아가 보죠. 성공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의 운명은 갈렸습니다. 황금귀(黃金鬼)라 불렸던 한 금광 갑부는 계속 재산을 불려 나갔지만 광복 이후 모두 흩어졌지요. 반면 '제2의 금광왕'은 비영리사업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얼마나 모았는가'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잘 보여주는 예지요."

    21세기의 한국인들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 증식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1930년대의 조선인들은 미두(米豆), 주식, 부동산, 심지어 정어리까지도 돈이 되는 거라면 닥치는 대로 투기의 대상으로 삼았다. 미두는 현물 없이 쌀을 매매하는 것으로 요즘의 선물(先物) 거래다.

    ―당시에 이미 부동산 투기도 있었다는 건가요?

    "1932년 8월에 함북 청진의 4만 주민들이 대규모 궐기 투쟁에 나서 총독부까지 겁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독립운동 아니면 총파업이었을 텐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 1930년대의 금광, 투기, 자살 열풍을 다룬 전봉관 교수의 저서들.

    ―그럼 뭐였나요.

    "만주 지린(吉林)에서 함북 회령(會寧)을 잇는 길회선(吉會線)의 종착지가 청진이 아닌 나진으로 결정되는 바람에 국제항구로서 돈벼락이 쏟아질 운명이 하루아침에 어긋나 버리자 이에 항의한 것이죠."

    ―나진 쪽도 큰일이 났겠군요.

    "땅값이 넉 달 만에 1000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토지 450만평을 미리 사들여 1200만원을 번 사람도 있었어요. 그때 평범한 월급쟁이 한 달치 봉급이 50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토지를 발표 이전 가격으로 수용한다는 방침이 세워지고 중일전쟁 이후엔 축항(築港) 공사마저 흐지부지돼 버려요. 허무한 결말이었죠."

    ―미두나 주식도 대단히 투기성이 강했으리라 보입니다.

    "미두시장은 1인당 하루에 현재가치 1~2억원을 따거나 잃는 일이 흔했어요. 20대 남자 하인이 1년 만에 백만장자가 돼 현재가치 30억원을 들여 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을 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도 2년 만에 파산하고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명동 길거리에선 주식 장세를 놓고 도박을 하는 합백(合百)이란 것도 성행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돈맛'을 본 첫 세대였어요."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돈에는 대단히 초연한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제가 보기에 인간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건 딱 다섯 가집니다."

    ―그게 뭔가요?

    "돈, 사랑, 권력, 명예, 생존입니다. 민족해방이나 조국통일, 세계평화 같은 거대담론들도 한 꺼풀 벗겨 내면 그 속에는 이 오욕(五欲)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사람들이 권력을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지요. 그럼 그게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렇게 한국 투기의 역사를 연구한 분이니 재테크도 남다르겠군요.

    1923년 온양온천에서 평양기생 출신의 강명화가 자살했고 얼마 뒤에는 부잣집 외아들인 남편 장병천이 그 뒤를 따랐다.

    대중은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수많은 소설과 연극, 영화에 열광했다. 단재 신채호가 '자살귀(自殺鬼)가 열녀가 되는 문예가 무슨 예술이냐'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전 교수는 "당시 사람들은 그토록 사랑에 목말랐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자살 비율은 남성보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 같은데요.

    "일반적으로 남성은 이상을 추구하다 자살한 반면 여성은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학대당하다 자살로 몰렸던 것이죠. 그런데 사연 속 남자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어쩌면 그렇게도 익숙하고 낯 뜨거운지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사랑은 함께 해 놓고 여성만 죽는다는 건 억울한 일인데 말이죠."

    ―대표적인 살인 사건으로는 어떤 게 있었습니까?

    "대낮에 몸통 없는 어린아이의 사체가 발견된 '죽첨정 사건'이 있지요. 수사 과정에서 경성의 후미진 곳에 숱하게 많은 사체가 암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안전한 도시'라는 총독부의 선전은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백백교 사건'은 신흥종교집단에 의해 최소 314건의 연쇄살인이 발생해 세상을 경악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모두 다 역사책에서는 한줄 보기 힘든 사건들이군요.

    "강력 사건도 많았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살부(殺父) 사건'이 있는가 하면, 사형수가 재판소 유치장에서 탈출해 8일 동안 탈주극을 벌인 '조선판 프리즌 브레이크 사건'도 있었지요. 지금의 한국은행 격인 조선은행의 평양지점에서 거액의 현금이 감쪽같이 사라져 주가 폭락까지 일으킨 '78만원 대도난사건'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모습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성추행 사건이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겠군요?

    "요즘 대학가에서 종종 일어나곤 하는 '여 제자 성희롱 사건' 역시 우리 시대의 전유물은 아니었지요. 존경받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1934년에 여 제자와 '키스 내기 화투'를 한 뒤 성추행을 했다는 추문에 휩싸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키스 내기 화투'라는 건 이기거나 지거나 키스하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 제자의 남편은 아내가 쓴 수기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화투를 한 후 나를 끌어 키스하고 자기의 침대에 눕히고 나의 가슴도 만지려 하므로 몸을 꼬고 만지지 못하게 하였으나 약한 탓으로 만짐을 당하고 마음과 몸이 약한 탓에 정조를 빼앗기었고….'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이 사건은 꼬리를 문 폭로전으로 이어졌고, 당사자는 결국 교육계에서 퇴출당했다.

    ―오히려 21세기가 덜 충격적인 시대처럼 느껴지는군요.

    "스캔들과 투기, 엽기적(獵奇的) 살인과 연애가 난무했던 그때가 정말 암흑기였을까요? 경성이란 도시는 우리가 처음으로 근대(近代)를 경험하는 커다란 전환기에 펼쳐진 무대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렸고 신문학이 등장했고 '연애' '사랑'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여성이 출현했는가 하면 '원조 된장녀'도 있었죠."

    ―하지만 우리에겐 '그 시대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옛 문명과 새 문명이 충돌했고 숱한 욕망들이 용솟음치며 명멸했던 시대였고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광복 이후 그 기억들 중 많은 부분을 잊어버리는 '집단적 망각'이 일어났던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시대를 일제의 '수탈'과 조선 민중의 '저항'으로만 이뤄졌던 것처럼 보는 시각이 생겨나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반일' 아니면 '친일'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해야 하는 걸까요?"

    ―좀 위험한 시각 같기도 한데요.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뭐였는지 아십니까? '앞으로 어떤 주식이 유망한가?'였어요. 이걸 정치적 맥락으로 해석하면 그저 한심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고 말겠지요. 하지만 그들이 지녔던 다양한 욕망들은 결코 읽어낼 수가 없을 겁니다."

    ―'일제시대'나 '일제 강점기' '왜정(倭政) 시대' 같은 용어를 일부러 피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인가요?

    "물론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치적인 시각이 아니라 문화사적인 시각으로 그 시대를 보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엄혹한 시대에는 개인의 욕망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잖아요? 1980년대 대학가에는 '이 시국에 미팅이 웬 말이냐'는 분위기도 있었죠.

    "한때 가요 '감격시대'에 친일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지요. 일제 치하에 무슨 '환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가 있었겠느냐고요. 하지만 우리가 그 당시를 살고 있다고 가정하면,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도 개인은 희망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후세가 과거를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셈이 되겠군요.

    "1930년대 사람들도 꿈을 노래하고 사랑을 찬미하며 이별에 아파했던 겁니다. 가령 1970년대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구도로만 본다면 그 사이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도 이렇게 부도덕했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오히려 지금보다 윤리적으로 더 자유로웠던 시대라고요. 과거의 봉건적 윤리가 사라졌는데 새로운 윤리는 더더욱 없었던 시대가 아닙니까. 유부남과 처녀가 연애하는 건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최근의 '경성 붐'에 대해 한 일본 언론인이 '일제 통치에 대한 재평가'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어처구니없고 위험한 시각입니다. 그것 역시 정치적인 맥락인데, 당시 모더니즘 문화라는 것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이뤄졌던 것이기 때문이죠. 일제 통치가 없었더라도 그 문화는 존재했을 것입니다."

    전 교수는 '경성' 다음으로 19세기 말 개항기로 시대를 조금 상향 조정했다. 지금까지 연결되는 신문명의 뿌리를 찾다 보니 조선왕조 말기로 올라가게 되더라는 것이다. "역부족이긴 했지만 발버둥이라도 친 대한제국의 개혁이 있었기에 광복 이후 복고(復古)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최근에 대해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1980년대 비권(非圈·비운동권)의 삶에 대해서도 써 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그 자신이 학창시절 '비권'이었다는 것이다. (유석재 조선일보 기자)

    * 본 기사는 뉴데일리와 조선일보와의 기사제휴 협약에 따라 전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