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 안 간 것은 관례, 총리 참석”…당시 보도는 전혀 달라
  • 영화 '연평해전'의 한 장면. 개봉 보름 남짓 사이에 관람객 300만 명을 넘었다. ⓒ뉴데일리 DB
    ▲ 영화 '연평해전'의 한 장면. 개봉 보름 남짓 사이에 관람객 300만 명을 넘었다. ⓒ뉴데일리 DB


    영화 ‘연평해전’이 관람객 300만 명을 돌파한 가운데 김대중 평화센터가 “영화 '연평해전'은 사실과 다르다. 그리고 제2연평해전 직후 북한 측이 공식 사과를 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김대중 평화센터는 지난 5일 보도자료를 내고, “북한은 (제2연평해전 직후) 남한 통일부 장관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 공개사과했다”면서 “북한이 우리 정부에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중 평화센터는 보도자료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제2연평해전’ 전후 상황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평화센터는 “‘사건’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즉각 NSC를 소집해 ‘강력한 대북 비난 성명’과 ‘확전방지’ 및 냉정한 대응을 지시하고, 이 사건을 다룰 판문점 장성급 회담 소집을 북한에 요구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 다음날 북한은 핫라인을 통해 ‘이 사건은 계획적이거나 고의성을 띈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랫사람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다.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자’는 전통문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평화센터는 또한 “2002년 7월 20일 북한이 남북대화를 제의하자, 김대중 정부는 서해도발 사건의 공개적인 사과,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고, 이에 북한은 7월 25일 전통문을 보내 공개 사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의 '답변'을 '공개사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북한은 "아랫사람들끼리의 우발적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그로부터 1년 전 김정은이 제2연평해전을 일으킨 해군 부대를 찾아 "기필코 복수하라"고 명령한 것이 국내 일간지를 통해 소개된 적도 있어, 김대중 평화센터의 이 같은 주장은 북한 측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한 수준이다.  

  • 김대중 평화센터는 "당시 북한은 '아랫사람끼리의 우발적 충돌'이라며 공개사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정황이 한두 건이 아니다. 사진은 제2연평해전 전후 북한군 징후를 정리한 조선일보 보도. ⓒ조선닷컴 화면캡쳐
    ▲ 김대중 평화센터는 "당시 북한은 '아랫사람끼리의 우발적 충돌'이라며 공개사과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정황이 한두 건이 아니다. 사진은 제2연평해전 전후 북한군 징후를 정리한 조선일보 보도. ⓒ조선닷컴 화면캡쳐


    영화 ‘연평해전’과 과거 언론보도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진, ‘제2연평해전’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 불참에 대해서는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의 전투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영결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당시 총리를 영결식장에 참석하도록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대중 평화센터가 내세운 ‘관례’라는 것은 1976년 1월 해군 당포함이 北괴뢰군의 습격을 받았던 것과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관례'와 '국제사회의 이목'을 인식해 전사자의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해명'은 그 논리가 옹색하기 그지없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08년 4월에야 '서해교전'이 아닌, '제2연평해전'으로 불리게 된 것, 이때부터 추모식을 해군 2함대 사령부가 아닌 국가보훈처가 주관하게 된 것, 참수리 357 고속정을 해군 2함대에 꽁꽁 숨겨두고 일반인의 관람이 어렵도록 만든 것 또한 김대중 평화센터의 '해명' 논리가 궁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김대중 평화센터는 "당시 대통령은 전사자 영결식에 관례에 따라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총리를 보냈다"며 영화 '연평해전'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연합뉴스' 보도는 이랬다. ⓒ제민일보 홈페이지-연합보도 캡쳐
    ▲ 김대중 평화센터는 "당시 대통령은 전사자 영결식에 관례에 따라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총리를 보냈다"며 영화 '연평해전'이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연합뉴스' 보도는 이랬다. ⓒ제민일보 홈페이지-연합보도 캡쳐


    한편 국내 언론 가운데 한겨레 신문은 故김대중 前대통령의 ‘제2연평해전’ 당시 행태를 적극 옹호하고 나서면서 무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한겨레는 영화 ‘연평해전’에서 故김대중 前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이튿날인 6월 30일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는 장면에 대해, 최경환 김대중 평화센터 공보실장을 인용,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라고 주장했다. 

    DJ 정권 시절 청와대 공보기획비서관이었던 최경환 김대중 평화센터 공보실장은 “한일 정상들은 당시 공동 개최한 월드컵 개·폐막식에 교차로 참석하기로 돼 있었던 데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었기에 방일 일정을 취소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북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아군이 전사한 상황에서는 ‘합리화’할 수 있는 명분이 안 된다는 여론이 많다.

    게다가 김대중 평화센터가 '보도자료'를 통해 "대통령 대신 총리를 영결식에 참석토록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2002년 7월 2일 당시 '연합뉴스'는 "이한동 총리, 전사자 영결식 불참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했다. 이는 김대중 평화센터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실제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가족들은 당시 DJ 정권의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이 모두 영결식에 오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당시 언론 보도도 마찬가지다.

    여기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北인민군에게 김정일이 “복수를 하라”고 지시했고, 2001년 4월에는 ‘제2연평해전’을 일으킨 해당 부대를 직접 찾아 ‘복수 준비’를 점검까지 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김대중 평화센터의 주장은 북한 측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김대중 평화센터는 영화 '연평해전'이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보도자료를 내고 故김대중 前대통령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많이 확산된 김대중 대통령 사진 캡쳐
    ▲ 김대중 평화센터는 영화 '연평해전'이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보도자료를 내고 故김대중 前대통령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많이 확산된 김대중 대통령 사진 캡쳐


    한겨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무리한 주장을 펴 눈총을 샀다.

    한겨레는 익명의 ‘군사 전문가’를 인용해 “일부 매체는 김대중 정부가 교전수칙을 통해 선제 사격을 금지했기 때문에 고속정 357정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전문가들은 ‘작전실패’가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한겨레는 盧정권 시절 ‘국방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고 주장하는 김종대 씨를 인용, “(제2연평해전에서) 장병들의 전사는 해군 (지휘부의) 혼란 때문이지 선제 사격을 금지한 교전수칙 때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전하기도 했다.

    이 같은 한겨레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평가가 많다. 

    1997년 유엔사령부를 통해 만들어진 해군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시위기동, 선수차단 기동 및 충돌 등 사격을 제외한 가용수단 사용, 불응시 사격을 포함 모든 조치 허용"으로 돼 있다.

    하지만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한국 해군의 참수리 고속정이 '선수차단 기동 및 충돌'을 통해 북한 해군 경비정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뒤 "선제사격 자제"라는 이상한 지침이 군 지휘부를 통해 하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현장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북한군에게 사격을 가할 수 있음에도 당시 정권에 충성하던 군 지휘부의 명령 때문에 '제2연평해전'에서 참수리 357 고속정은 손발이 묶인 상태로 싸웠다는 것이다.

    이 일로 지금은 고인이 된 정병칠 당시 해군 2함대 사령관은 경질되고 만다.

    이 뿐만이 아니다. 2002년 6월, 북한의 무력도발 징후를 줄기차게 보고했던 대북감청부대 5679부대장 한철용 예비역 소장의 사연은 주목할만 하다.

    2002년 7월 10일, 공관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한철용 소장은 "내일 징계를 받으러 국방장관실로 출두하라"는 메모를 받는다. 한 소장은 이에 바로 국방부 차관보에게 전화를 걸어 "나 징계 못 받는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징계를 받느냐. 내일 자로 전역하겠다"고 밝혔다.

    이튿날 김동신 당시 국방장관이 '서해교전'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지만, 군 내부에서는 한철용 소장을 둘러싸고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2년 10월 4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한철용 소장에게 박세환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제2연평해전과 관련된 질문을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장관이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지휘부에 충성하느니 차라리 전역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때 한철용 소장은 '일일 정보분석보고서(블랙북)'을 들고 나와 국회의원들 앞에서 흔들며, "김동신 국방장관에게 '제2연평해전' 이전부터 북한 해군의 도발 징후가 있었다는 보고를 수차례 했지만 묵살 당했다"면서 "그 뒤에 (군 수뇌부는) 오히려 기무사를 동원해 우리 부대를 표적수사했다"고 폭로를 했었다. 

    하지만 당시 한철용 소장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철용 소장은 국회에서의 일로 1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뒤 전역했다. DJ정권 말기에 일어난 일이다.

    이처럼 '제2연평해전' 당시 '잘못된 지휘'에 대한 책임은 해군 지휘부나 정보부대, 고속정 편대가 아니라 국방부와 합참, 청와대에 있다는 것이 대다수 군사전문가들이 내리는 평가다.

    때문에 김대중 평화센터와 한겨레 등의 주장은 제2연평해전을 직접 겪었던 사람, 그리고 전사자 유가족이 본 사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것이 중론(衆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