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5회 이승만 포럼/ 6.25와 이승만의 전쟁리더십-3>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 어떻게 볼 것인가?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  Ⅰ. 머리말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시 국가원수의 안위(安危)는 매우 중요하다. 전란 중 국가원수가 적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게 되면, 그 나라의 전쟁수행에는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국가원수의 유고(有故)는 직접적으로 그 나라 전쟁지도부의 와해를 불러옴으로써 전시 국정마비와 혼란을 초래케 하고, 급기야는 전쟁패배로까지 연결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원수는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여 전쟁을 지도해 온 것이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상례(常例)였다.

      하지만 북한의 남침 이후 국가원수인 이승만 대통령이 거주하며 집무했던 경무대(景武臺)에 대한 경비 및 경호는 평시나 다름없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한마디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우리 국력이 그랬고, 우리 국군의 전력이 그랬다고 해도 적의 위협을 고려하면, 지나쳤다는 느낌이 든다. 

      6·25전쟁 당일부터 북한의 전투기가 서울 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龍山驛)을 비롯한 주요시설을 공격한데 이어, 얼마 후에는 중앙청을 비롯하여 경무대까지 공습이 미쳤다. 또한 적 전차의 경무대 포위공격에 대해서도 대비책이 없었다. 더욱이 적의 게릴라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는 남로당 세력의 경무대에 대한 위해(危害)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경무대는 서울에 있으면서도 갖가지 위해세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에도 남침 이후 대통령의 안전을 위한 대피문제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피란할 때까지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6·25와 같은 침략을 받고 수도가 함락 직전에 놓였을 때, 국가의 상징이자 구심점인 대통령에 대한 안전대책은 국가의 중대사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은 헌법기관으로서 국민을 대표하여 국가를 수호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대통령은 전시나 국가위기 시에는 신변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는 곳에서 대통령 직책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6·25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지를 못하고, 안전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6·25전쟁 발발 이후 누가 뭐라고 하던 대한민국의 심장부이자 상징은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였다. 전평시를 막론하고, 국가원수가 기거(起居)하며 집무하는 경무대에 대한 경비는 매우 엄중해야 한다. 대통령의 안위를 고려하면,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경무대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경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때까지 대통령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해야 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는 북한의 불범 기습남침을 받고, 국가위기 시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마침내 그는 북한군의 위협과 서울시내의 불온세력(不穩勢力)으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피란을 가게 됐다. 아울러 육군본부는 북한군 전차가 서울시내로 진입하게 되자, 한강 이남으로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로 한강교 폭파를 단행했다. 북한군 전차의 한강도하를 저지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지도에 대한 비판 또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이 두 가지 문제를 ‘이승만의 무능과 부도덕성’과 연결지어 ‘위해적(危害的) 비난’을 끊임없이 가하고 있다.

      그런 탓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군의 한강교 폭파는 이런 단편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만이 강조된 나머지, 그것이 전쟁사의 흐름에서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학문의 연구대상에서 제외되다시피 했다. 그러다보니 이에 대한 재조명 내지는 재평가를 위한 연구는 학계에서 알게 모르게 금기시(禁忌視)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많은 세월을 지나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양 굳어져 버릴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이승만 대통령의 피란을 임진왜란 시(壬辰倭亂時) 아무런 대책 없이 피란에 바빴던 선조(宣祖)의 몽진(蒙塵)과 최근에는 얼토당토않게 파렴치(破廉恥)한의 대명사로 떠오른 ‘세월호의 선장’에다 빗대는 한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피란문제와 한강교 폭파에 대해,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군의 한강교 폭파에 대한 의미와 평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게 평가해 보고자 한다. 과연 이승만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 피란을 가게 됐고, 그 피란이 담고 있는 의미와 향후 전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피란과정에 숨겨졌던 ‘비화(秘話)’들도 소개하고자 한다. 

      또 한강교 폭파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과연 한강교가 조기 폭파됨으로써 서울시민들이 피란을 못가고, 국군에게 막대한 인명 및 장비피해를 가져왔는지? 여기서 그렇지만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한강교 폭파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이런 문제들이 6·25전쟁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향후 전쟁국면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해 볼 것이다.
      그렇다고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을 마냥 옹호하거나, 군의 한강교 폭파를 미화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다만 전쟁사적 측면에서 계속 논란이 되어 왔던 이 문제를 국내외 자료를 통해 당시 상황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하여, 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새로운 관점에서 6·25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국군의 한강교 폭파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고 이를 재조명내지는 재평가해 봄으로써, 전시 이승만 대통령과 군의 역할을 새롭게 규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 ▲ 서울 미아리를 넘어오는 북한 탱크와 인민군.
    ▲ 서울 미아리를 넘어오는 북한 탱크와 인민군.
    Ⅱ.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북한군의 각종(공중·지상·테러) 위협에서 벗어난 극적인 탈출이었다.

      6·25전쟁 당시 수도(首都) 서울은 당시 남북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38도선으로부터 불과 45km(38도선-동두천-의정부-서울) 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 이 거리는 시속 55km로 달리는 북한군의 소련제 T-34전차가 1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또 30-40km로 달리는 북한군의 작전용 차로도 2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특히 시속 400km가 넘는 북한군 전투기는 몇 분이면 서울에 접근할 수 있었다. 반면 6·25전쟁 때 북한의 수도 역할을 했던 평양은 38도선으로부터 140km나 떨어져 있었다. 그 정도로 서울은 전략적 환경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남침을 당했다. 

      세계 전쟁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수도가 국경선에서 불과 45km 떨어져 있는 경우는 6·25전쟁 때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밖에 없었다. 최소한 수도는 국경선으로부터 수백km 밖에 위치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320km나 떨어져 있었고,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도 자국의 국경으로부터 1,100km나 떨어져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도쿄(東京)는 미국의 B-26전략폭격기 공격기지인 사이판(Saipan)이나 괌(Guam)으로부터 무려 1,600km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도 일본과의 항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자국의 수도를 전선에서 항상 300-400km이상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이는 국가원수가 포함된 전쟁지도부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시 서울은 전략적 위치상 최악의 수도였다.  

      소련과 북한은 남침공격계획을 수립할 때, 수도 서울의 전략적 취약점을 간파했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개시 2일 차에 서울을 점령하고, 38도선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350km를 미군이 개입하기 이전인 1개월 내에 공산화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2001, 135-137쪽; 러시아 국방부, 김종국 역, 『러시아가 본 한국전쟁』, 육군교육사령부, 2002, 31쪽.
     그들은 수도 서울이 38도선으로부터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것에 착안을 하고 그런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소련은 북한에 전차 242대와 전투기를 포함해 각종 항공기 226대를 제공했고, 중국은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한인병사(韓人兵士) 5-6만 명을 북한군에 그대로 편입시켰다. 

      특히 스탈린(Joseph V. Stalin)과 김일성이 남침 모의과정에서 ‘전쟁승리’를 확신했던 것은 남한 내에 있는 20만 명에 달하는 남로당원(南勞黨員)이었다. 북한지도부는 이들 남로당원이 서울에만 6만 명이 있다고 호언했다. 따라서 북한은 그들이 38도선만 침범하면 ‘이들 남로당원이 일제히 봉기’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할 것으로 믿었다.(토르쿠노프 저, 구종서 역, 『김일성-스탈린-모택동 기밀문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에디터, 2003, 114쪽.)

     스탈린은 김일성의 이 말을 믿고 북한의 남침을 승인했다.
      또한 서울 시내에는 경무대(景武臺)와 가까이 위치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몇 개의 형무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수 천 명에 달하는 좌익분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에 7,000여명, 마포형무소에 3,500명, 영등포형무소에 1,300여명의 죄수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강선방어와 초기지연작전』3, 군사편찬연구소, 2006, 26쪽.)
     만약 이들이 탈출하여 인왕산(仁王山)을 넘어 경무대로 들이닥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경무대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잠재적 위해세력’이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실제로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의 철문을 부시고 좌익죄수들을 풀어줬다. (북한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조선전사 25: 현대편 조국해방전사』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125쪽.)
     
      풀려난 죄수들은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해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드럼라이트(Everett F. Drumright) 참사관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6월 28일 서울이 점령되자,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리고, 무장한 죄수들이 보복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은 가택수색을 하면서 정부관리, 경찰관, 기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들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보통 살해당했다.”고 보고했다. (The Charge in Korea(Drumright) to the Secretary of State, FRUS, 1950. Vol.7, Korea, 1976, p.248.)

     이처럼 형무소를 뛰쳐나온들 좌익사범의 죄수들은 우익인사들을 개인적으로 처단하거나, 북한군에게 밀고하여 처형시켰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김태선(金泰善) 서울시경국장이 6월 27일 새벽에 대통령께, “서대문형무소에는 수천 명의 공산당 놈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들은 인왕산을 넘어 제일먼저 여기로 옵니다. 각하께서 일시 피난해서 전쟁을 수행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장관과는 다릅니다. 잘못되면 나라가 망합니다.”라며 대통령의 신변과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피란을 강력히 권유했다.(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1, 1972, 126쪽.)

     이승만 대통령이 이 말을 듣고, 피란을 간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렇듯 북한은 ‘전쟁승리’를 위한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 상태에서 남침을 감행했다. 서울의 북쪽 관문인 개성과 동두천이 전쟁 당일 함락되고, 전쟁 다음날에는 서울에서 불과 18km에 위치한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되고, 적이 창동으로 진출하면서 수도 서울이 적의 야포 사정거리 내에 들어가게 됐다. 특히 북한전투기는 전쟁 당일부터 서울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며, 서울의 주요 시설들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중앙청과 경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합동참모본부,『한국전사』, 합동참모본부 군사연구실, 1984, 787쪽; 공군본부, 『6·25전쟁 항공전사』, 공군본부, 2002, 14-15쪽.)

     그때마다 대통령은 적의 공습을 피해 경무대의 방공호로 피신해야 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적의 공중, 지상, 그리고 서울시내의 남로당 및 불순세력으로부터 언제든지 위해를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전쟁지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의정부의 함락은 대통령의 안전이 더욱 더 위험해 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최소한 의정부가 함락된 6월 26일 오후에 서울을 벗어나 후방의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도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에 각료들과 측근들이 상황의 급박함에 따른 ‘강력한 권유(적 전차 시내출현·서대문형무소의 좌익죄수 탈옥·지속적인 전쟁지도 등)’에 못 이겨 겨우 경무대를 떠났다. 이는 북한군의 각종위협으로부터 극적인 위기 탈출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경무대의 체류 72시간은 바로 대통령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국가의 운명을 건 모험적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은 이 72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구할 구국적(救國的)인 일을 한 숨도 안 자고 처리했다.    
          
  • ▲ 서울 시청 앞을 통과하는 북한군 탱크들.
    ▲ 서울 시청 앞을 통과하는 북한군 탱크들.

2. 남침 이후 대통령의 안전은 ‘방치’되다시피 했다.
           
  세계전사를 보면, 전시 국가원수는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제2차 세계대전 시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처칠(Winston S. Churchill) 영국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일본의 히로히토(裕仁)는 전선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나 방호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안전한 곳에서 전쟁을 지도했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도 6·25전쟁 때 신변이 보장된 안전한 장소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남침 직후, 대한민국 국가원수이자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안전대책은 거의 ‘방치상태’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경무대는 전시임에도 달랑 카빈 소총을 든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수도서울에 대한 군의 방호대책도 거의 무방비였다. 전쟁 당시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제3연대·제8연대·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장갑대대·기병대대·도보대대)가 있었으나, 남침 이후 이들 부대는 모두 위급한 전선지역으로 출동했다. 제3연대는 포천축선으로, 제18연대는 의정부 축선으로, 제8연대는 가평으로 출동했고, 독립기갑연대도 문산 축선과 의정부 축선 그리고 김포축선으로 각각 분산되어 출동했다. 
  따라서 전쟁 이튿날인 6월 26일에는 서울에는 수도를 방어할 전투부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서울시경찰국의 기동경찰대대도 전쟁 당일인 6월 25일 오후에 내촌으로 출동함으로써 서울의 전시치안을 담당할 경찰병력마저도 서울에 남아 있지 않게 됐다. 그야말로 6월 25일 오후부터는 서울을 방어할만한 부대나 병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전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침 이후 전쟁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던 경무대도 전시에 대한 별다른 방호대책을 강구하고 있지 않았다. 경무대는 대통령 내외가 기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었다. 그런데도 경무대의 경비는 평시나 다름없었다. 경무대의 경비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400명으로 이루어진 경무대경찰서가 담당하고 있었고, 대통령의 근접경호는 30명으로 이루어진 경무대경찰서의 경호계(警護係)가 담당하고 있었다. (임석빈, 「역사의 현장: ‘경무대’ 그 후광 속에 얼룩진 권력비화」, 『시사뉴스피플』, 11월호.) 
 
  남침 이후 경무대에 대한 군의 전력보강은 6월 25일 오후부터 6월 26일 오전까지 장갑차 2대가 약 10시간 정도 겨우 지원됐을 뿐이다. 북한군의 남침 이후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참모장은 독립기갑연대와 김점곤(金點坤) 중령에게 지시하여 경무대에 장갑차를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독립기갑연대는 전쟁당일인 6월 25일 오후에 장갑차 2대를 경무대로 보냈고, 김점곤 중령은 장갑차를 경무대 주변에 배치했다. (육군본부,『6·25전쟁 참전자 증언록』Ⅱ, 2004,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488-490쪽; 한남전우회 편,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육군독립기갑연대사』, 도서출판 한컴, 1997, 93쪽.)
 
  그러나 이들 장갑차는 다음날인 6월 26일 오전에 육군본부 지시로, 김포지구가 위험해지자 그곳으로 전환 배치됨으로써 경무대는 다시 무방비상태가 됐다. 이후 전쟁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던 경무대에는 이렇다 할 추가적인 장비나 무기 그리고 병력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은 안전으로부터 ‘철저히 방치된 상태’에서 6월 27일 새벽에야 경무대를 벗어나게 됐다. 이는 북한의 김일성이 평양이 함락되기 3일전인 10월 16일 02:00에 무장경호부대의 호위를 받고 평양에서 도망친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김일성은 그보다 10일 전에 아들 김정일(金正日)을 만주의 장춘(長春)으로 피신시키기까지 했다. (정일권, 『정일권회고록: 전쟁과 휴전』, 동아일보사, 1986, 188-189쪽)

3.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위해 군과 경찰병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 이후 경무대에 대한 경비나 자신의 경호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는 평상시 하던 대로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대통령은 전시 국정을 수행하느라 자신의 안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전시 국정(國政)에만 전념했다. 경무대의 경비가 전시임에도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 채병덕 육군총장이 장갑차 2대를 배치했으나, 전선 상황이 악화되자 김포지구로 전환됐다. (국방부, 『한국전쟁사: 북괴의 남침과 서전기』제1권(개정판), 전사편찬위원회, 1997, 665쪽, 669쪽.)
    
  만약 대통령이 경무대의 경비를 강화하려고 지시하거나, 자신의 신변을 위해 병력을 추가로 증원하라고 지시했을 법도 한데, 대통령은 일체 그런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전쟁 상황을 수습할 대비책 마련에 진력했을 뿐이다. 군 수뇌부도 대통령의 그런 뜻을 알고, 오로지 군사작전에만 매진했다. 대통령은 순수한 군사 작전에 대해서는 철저히 군에 일임하고,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경무대를 떠날 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무장한 군이나 경찰로부터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무대의 비서 및 경호원 몇 명만 대동하고 북한군이 겹겹이 쳐놓은 마수(魔手)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평시에도 주요 행사시 장갑차의 호위를 받았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독립기갑연대의 장갑차가 대통령 및 귀빈의 경호, 행사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들면 1949년 10월 28일 대통령 행사에 장갑차 2대가 출동했고, 그 해 11월 10일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의 경호차 장갑차 3대가 출동했고, 12월 3일에는 한국을 방문한 미 의원을 경호하기 위해 장갑차 2대가 김포공항으로 출동했다. (한남전우회 편, 『번개부대의 6·25혈전기: 육군독립기갑연대사』, 68-69쪽.)
 
 안전이 더욱 절실한 전시에는 그런 경호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전시 이승만(李承晩)만 할 수 있는 담대(膽大)한 행동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공중공습이나 지상화력으로부터 위해(危害)를 입을 수 있는 상황, 적의 전차에 의한 포위망으로부터 포로가 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서울시내 남로당원이나 불순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위한 추가적인 병력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는 위기를 스스로 극복하는 지도자로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전시에 대통령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줬던 국가지도자였다. 
  • ▲ 경복궁 중앙청을 점령한 공산군.
    ▲ 경복궁 중앙청을 점령한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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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북한군의 작전미숙이 이승만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했다.

      북한군은 전쟁개시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함과 동시에 한강교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이를 위해 남침 당시 수도권에 그들 전력의 2/3이상을 투입했다. 여기에 북한군은 1개 밖에 없는 1개 전차여단과 1개 모터싸이클(motorcycle) 연대까지 투입시켰다. 여기서 전차여단은 한강교 점령임무를 추가로 부여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1, 2001, 138쪽)

     또한 지상전(地上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대포만 하더라도, 북한군은 그들의 군단포병과 사단포병을 합쳐 무려 400여문에 달하는 대포를 의정부-포천 축선에 투입해 그들의 보병부대를 화력지원(火力支援)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북한군의 전쟁개시 2일차 서울점령은 전혀 무리한 계획이 아니라, 충분히 달성 가능한 계획이었다. 
      남침 이후, 북한군 주력이 지향된 의정부-포천 축선은 국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그들의 남침계획보다 다소 지연이 됐지만, 그래도 전쟁개시 다음날인 6월 26일 정오경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점령했다. 의정부에서 서울은 지척(咫尺)이었다. 의정부는 서울에서 불과 1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시속 55km로 달리는 북한군 전차로 30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것은 이 보다 이틀이나 늦은 6월 28일 새벽이었다. 계획보다 이틀이나 차질이 생겼다. 그때 북한군이 정상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더라면, 6월 26일 야간에 서울에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전력과 시간적 여유가 그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왜 북한군은 6월 26일 정오경에 의정부를 함락하고도, 그날 저녁에 서울로 들어오지 못했고, 전차는 왜 한강교를 점령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현대전에서 대부대 작전경험이 없는 북한군 수뇌부의 작전 미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북한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중국과 소련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독소전에 참가했던 위관급(尉官級) 장교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소련 군사고문단의 유능한 대령급 고급장교들이 작성해 준 남침계획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스탈린은 남침이후 소련 군사고문단들에게 엄명을 내려 38도선을 절대 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만약 포로가 발생할 경우 소련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의구심을 미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받지 않기 위해서다.  

      그 결과 의정부 함락 후, 서울로 진입할 부대들에 대한 교통통제를 하지 못함으로써 북한군 제4사단과 제3사단 그리고 전차여단 예하의 병력과 차량들이 서울로 향하는 좁은 2차선 도로로 몰리면서 서로 뒤엉키게 됐다.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됐다. 또한 북한군 전차는 서울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한강교를 점령하도록 계획됐으나, 서울 진입과정에서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군 전차들은 중앙청을 비롯한 한국정부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을 점거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하도록 방치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북한군은 남침 직후 국가원수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계획하지 않았다. 남침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찌감치 피란을 갈 것으로 판단해서인지는 몰라도, 북한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시도조차 않았다. 북한군 전차의 성능이라면 충분히 이런 계획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그런 계획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북한군의 또 하나의 작전상의 실수임에 틀림없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하여 평양에 가까이 진격할 무렵인 1950년 10월 16일에 김일성 생포작전을 긴급히 계획하고, 평양탈환 다음날인 10월 20일 평양 북쪽의 숙천-순천지역에 공정작전(空挺作戰)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때는 김일성이 이미 평양을 빠져 나간 뒤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일성 생포작전은 작전국장인 강문봉 장군의 머리에서 나왔다. 정일권 육군총장은 강문봉 장군의 김일성 생포작전을 받아들여 미군과 협의한 뒤 실행에 옮기게 됐다. (정일권, 『정일권회고록: 전쟁과 휴전』, 185-187쪽.)

     비록 김일성 생포에는 실패했지만 우리 군의 지휘관과 참모들은 그 만큼 작전에 유연했고, 융통성이 있었다. 
      하지만 남침 직후 북한은 달랐다. 만약 북한이 남침직후 성능이 우수한 소련제 전차를 앞세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전개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찌되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별다른 경비대책이 없었던 경무대의 상황으로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또한 북한군의 작전상 ‘실수’였다.
     
      또한 북한군 수뇌부는 전차운용에 서툴렀다. 전차 자체의 충격력과 돌파력 그리고 속도감을 살리지 못했다. 보병과 전차의 협동훈련이 잘 되지 않음에 따라 전차를 보병의 보조무기로 밖에 활용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구데리안 장군이나 롬멜 장군처럼 전차군단 및 사단을 지휘하여 적진 깊숙이 돌진하는 작전을 한 번도 구사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이 초기에 급격히 무너진 것도 결국 독일군 전차의 신속한 기동력 때문이었다.  
     
      결국 북한군 수뇌부의 이런 작전미숙과 판단착오로 인해 그들은 최초 계획했던 전쟁개시 2일차의 서울점령보다 이틀이나 늦은 6월 28일에야 서울을 점령하게 됐고, 한강교 점령도 그들의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한 채, 국군으로 하여금 한강교를 폭파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고, 특히 북한군에게 대통령이 적에게 생포되거나 죽을 수도 있는 ‘전시 대통령 유고(有故)’라는 최악의 사태를 모면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전시 대한민국에게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 

  • ▲ 서울 도심을 점령한 북한군이 행진하고 있다.
    ▲ 서울 도심을 점령한 북한군이 행진하고 있다.

  • 5. 대통령과 정부도 전시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는 것이 서울 시민을 버리고 혼자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내용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울은 38도선으로부터 불과 4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북한군은 그것을 노리고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겠다는 계획 하에 전쟁을 일으켰다. 따라서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서울 시민을 피란시킬 상황도 못 됐고,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 있는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은 북한이 계획한 대로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침이후, 북한군은 전쟁 당일부터 김포에서, 개성에서, 동두천에서, 포천에서, 춘천에서 수도 서울을 압박하거나 포위하기 위해 그들 전력의 2/3 이상을 수도권에 집중시켰다. 38도선을 넘는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에  전차 1개 여단 그리고 1개 모터싸이클 연대였다. 이들 전력 가운데 북한군은 무려 5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 1개 모터싸이클 연대를 수도권 공격에 투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 1, 135ᐨ17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전투』2, 군사편찬연구소, 2005, 13쪽.  )
     
      이에 비해 국군은 8개 보병사단에 2개 독립연대였다. 38도선에 4개 보병사단과 1개 연대가 배치됐고, 4개 보병사단이 서울 및 후방에 배치됐다. 더욱이 국군은 전차도 전투기도 그리고 포병화력도 북한군에 비해 절대열세였다. 여기서 혹자는 왜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으로 볼 때, 전력증강은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은 국군을 38도선을 경비할 수 있는 경비대 수준의 방어형 군대로 육성했다. 그러니 공격용 무기인 전차나 전투기는 국군에게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방침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것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수차에 걸차 미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고 전차와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전쟁이 났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의 전쟁대비 운운(云云)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결론이 나지 않을 소모적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에 열세한 국군은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후방에 있는 모든 부대까지 전선으로 동원해야 했다. 병력수송을 위해 열차가 동원됐다. 이 와중에 약 140만 명에 달하는 서울시민에 대한 피란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중공군 개입 후 1·4후퇴 때, 정부는 미군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20여일에 거쳐 서울시민을 피난시킨 적이 있었다. (전상인, 「6·25전쟁의 사회사」, 『한국과 6·25전쟁』, 184, 214쪽; 짐 하우스만·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한국문원, 1995, 236쪽.)

     그때는 전선도 38도선 부근이었고, 시간도 20여일이나 되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최소한 이 정도의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100만명이 넘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남침 직후 2-3일 만에 서울시민을 피란시킨다는 것은 당시 정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한다고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정부의 여력으로는 서울시민을 피란시킬 수송수단도 없었고, 피란민이 이용할 도로는 군사용 도로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여기에 북한군 전투기는 공중공격을 감행했다. 서울은 격전지로 변하고 있었다. 만약 이때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서울시민의 안전을 위해 매달렸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또 대통령과 정부의 그런 노력에 서울시민은 안전하게 피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묻지도 않아도 알 수 있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여기서 정부는 서울시민을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이 아니고, 급박하게 전개되는 전쟁 상황에서 당시 정부의 능력을 고려할 때,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의 동선(動線)은 전평시를 막론하고 극비(極秘) 중의 극비사항에 해당된다. 전시에 국가원수가 위난을 피하기 위해 피란을 간다고 공개적으로 알린 예(例)는 고금을 통틀어서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또 대통령이라고 해서 전시에 모든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이를 가려서 해야 된다. 전평시를 막론하고 국사(國事)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모든 일은 일의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에 따라 처리해야 된다. 특히 전시 국가의 중대사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남침 이후 국가원수 및 통수권자로서의 행보는 이러한 이치에 따라 국정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남침 이후 이승만의 72시간의 행적과 구체적인 국정활동에 대해서는, (남정옥, 「남침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건국이념보급회 주관, 제52회 이승만 포럼(2015,6.18)을 참조할 것.)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체류 72시간 동안 전쟁 상황의 불확실성과 보장받지 못한 대통령의 안전, 그리고 북한군의 직접적인 다양한 군사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반으로서, 국가원수로서, 통수권자로서 해야 될 일을 실행에 옮겼다. 결과적으로 이 72시간은 대한민국에 있어  ‘구국(救國)을 위한 소중한 시간’으로 작용했다. 비록 서울 함락 후, 북한군 점령 하에서 서울시민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살아 날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서울시민도 살리고, 국군도 온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길은, 비록 신(神)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 ▲ 북한의 전면남침을 확인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25일 즉각 무초 미국대사(왼쪽 두번째)와 미군관계자를 를 불러 긴급원조를 요구하고, 북한 남침으로 38선이 무너졌으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통일을 이룰때가지 결사 항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 북한의 전면남침을 확인한 이승만 대통령은 6월25일 즉각 무초 미국대사(왼쪽 두번째)와 미군관계자를 를 불러 긴급원조를 요구하고, 북한 남침으로 38선이 무너졌으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통일을 이룰때가지 결사 항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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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위험을 무릅쓴 이승만의 서울 체류 72시간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남침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신변은 안전하지 못했다. 적의 공습, 불순불자의 테러,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탈옥과 폭동의 가능성, 적 전차의 위협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국가 중대사를 차근차근 처리해 나갔다. 북한의 남침이 전면전인 것을 알고 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자력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국제사회, 즉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주한미국 대사 무초(John J. Muccio)와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전시 대미(對美) 및 대유엔 외교를 펼쳤다. 면담과 전화 그리고 국회의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며 호소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화답하고, 유엔안보리가 움직였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 의지에 대해서는 전쟁당일 무초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대전 천도’를 내세우며, 미국이 한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정부가 천도를 하면, 미국으로부터 원활한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무초 대사의 말에서, 이승만은 확신을 얻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에 임하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국민들의 의지를 한국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 미국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는 한국국민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미국에 피력했다. 그러니 우리 국군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지원해 달라며 당당히 요구했다. 

      그것은 중대사였기 때문에 외교적 경로에만 맡기지 않고, 직접 국군에 대한 군수지원 책임이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새벽에 직접 전화를 걸어 얻어냈다. 우리 공군에 없는 전투기도 얻어냈다. 그 와중에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에 들러 전황을 살피며,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와 탄약을 빨리 지원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했고, 미국과 유엔의 더딘 지원을 채근(採根)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대한민국이 수행할 전쟁목표도 수립했다. 그것은 ‘통일’이었다.
    전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서울이 위험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통일을 생각했다. 그는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이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긴요한 일들만 가려서 했다. 정부의 전시조치도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치안유지, 전쟁범죄, 전시수송, 전시물가, 전시피란민 구호 등에 한해 실시했다. 순수한 군사작전에 대해서는 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 경무대의 경비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군이 고유의 권한을 갖고 전쟁에 임할 수 있게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않아야 될 일을 구분했고, 해야 될 일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수행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을 살리는 데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했던 그의 통치행위는 임진왜란시 선조와는 그 격이 달랐다. 아무런 대책 없이 몽진(蒙塵)했던 선조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한 후 경무대를 떠난 이승만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난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세월호 선장’에 빗대는 협량(狹量)하면서도 천박하기 짝이 없는 역사인식은 국격(國格)을 폄훼(貶毁)시키고, 국민의 역사수준을 저상(沮喪)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겠다.    

      마침내 이승만의 서울 체류 72시간이 대한민국을 구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향후 전쟁수행에 지침이 될 전쟁에 대한 ‘가이드라인(guide line)’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고, 미국과 유엔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한국정부의 반대 속에 이루어진 휴전회담이고, 이에 대한 이승만의 대응책이 바로 반공포로석방과 이에 따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그는 당초 목표인 통일은 이루지 못했지만, 북한에 맞설 수 있는 안보적 토대를 마련했다.  
     
  • ▲ 폭파로 끊어진 서울 한강 인도교.
    ▲ 폭파로 끊어진 서울 한강 인도교.

  • Ⅲ. 한강교 폭파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1. 한강방어선 형성에 절대 기여했다.

      남침 이후 국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북한군 무기는 소련제 T-34전차였다. 국군에게는 이를 저지할 대전차 무기가 없었다. 당시 국군은 적 전차만 없으면 비교적 싸울 만 했다고 했다. 그러나 전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85밀리 주포에 두꺼운 장갑, 56발의 포탄휴대, 항속거리 200km, 그리고 시속 55km를 달리는 T-34전차는 실로 무적(無敵)에 가까웠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2, 2001, 17쪽.)
      
      북한군은 242대에 달하는 전차를 앞세워 서울을 2일차에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과 한강 이남을 잇는 한강교를 선점하여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이른바 국군의 주력을 궤멸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뒷받침할 북한군 전차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철갑으로 둘러싸인 채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32톤에 달하는 육중한 전차는 국군장병들에게는 가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국군장병들은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로 뛰어 올라가기도 하고, 대전차포나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어 적 전차 밑으로 들어가 적 전차와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북한군 전차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이를 감당하기에는 장병들의 희생이 너무나 컸다. 

      전쟁 초기 국군이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결정적인 것은 바로 적 전차의 위력 때문이었다. 국군 수뇌부가 한강교를 폭파하는 기준도 적 전차의 서울시내 진입에 두었다. 적 전차가 시내에 들어온 후, 2시간 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는 적 전차의 도하를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북한군의 추격도 따돌릴 수가 없었다. 북한군의 전차는 6월 28일 00:30-01:00에 서울시내에 진입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2, 16쪽.)
     
      이에 군에서는 한강교 상의 인도교를 비롯하여 철교들을 폭파했다. 그때 시간이 6월 28일 02:30분이다. 광진교는 이보다 늦은 04:00에 폭파됐다.

     이에 따라 북한군은 국군퇴로를 차단할 한강교 점령에 실패했고, 이는 결국 국군이 한강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됐다. 국군은 한강선을 방어하기 위해 시흥지구전투사령부(始興地區戰鬪司令部)를 설치하여 김홍일(金弘壹)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방어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국방부, 『한국전쟁사: 북괴의 남침과 서전기』제1권(개정판), 710쪽. 
     한강교가 국군에 의해 폭파되자 서울시내로 진입한 북한군 전차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서울시내에서 귀중한 3일간을 허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이는 한강교 폭파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대해 소련군사고문단은 “서울을 점령한 후 [북한군] 각 부대가 행한 극단적으로 완만한 행동과 개별부대 지휘관들의 임무유기로 인하여, 적[국군]은 한강을 도하하고 교량을 파괴했으며, 남쪽 강변에 방어선을 조직하여 ‘조선인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며 북한군 수뇌부의 작전미숙을 강하게 질타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1, 183-184쪽.)

     이는 국군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북한군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치명적인 과오였다. 이로 인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재편성을 통해 적을 막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게 됐다.
     
  • ▲ 한강 인도교 폭파후 철교도 폭파 되는 장면.
    ▲ 한강 인도교 폭파후 철교도 폭파 되는 장면.
    2. 한강교 폭파는 국군에게 배수진(背水陣)이었다.

      서울 함락직전, 한강교 폭파를 놓고 정부 및 군 수뇌부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이범석(李範奭) 장군은, “정부가 강을 건넌 뒤 한강다리를 폭파해야 된다. 이는 적이 쉽게 도강(渡江)할 수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서울에 남아 있는 국군이 퇴각할 길이 차단됨으로써 보다 완강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롤드 노블 저, 박실 역, 『戰火속의 대사관』, 40쪽.)

    는 의견을 피력했다. 일종의 배수진(背水陣)이자 고육책(苦肉策)이었다. 이범석 장군은 다소 국군의 희생이 있더라도 적이 다리를 넘지 못하도록 한강교를 폭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李鍾贊) 대령은 “서울 시민의 피난조치도 강구하지 않고, 군부가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더욱이 시민과 서울 북쪽에서 전투중인 국군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며 반대했다.(국방부, 『한국전쟁사』1, 537쪽.) 
      
      그렇지만 국군의 철수 후에 한강교를 폭파해야 한다는 논리는 군사지식이나 당시의 전선 상황과 비교해 볼 때 맞지 않는다. 당시 국군의 주력은 미아리 지역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철수한다는 것은 북한군의 무자비한 추격을 불러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군사적 상식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철수하려면 공군의 지원이나 강력한 포병화력, 또는 강력한 지상군 엄호부대가 적이 추격하지 못하도록 엄호 및 차단사격을 해 주어야 하는데, 당시 국군에게는 그러한 예비부대나 공군 및 포병전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국군이 적과 접전상태에서 철수할 경우 기동력이 뛰어난 북한군에게 오히려 국군이 추월당해 한강교도 폭파하지 못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미아리에서 한강교까지는 불과 8km도 안 되는 매우 짧은 거리였다. 시속 55km를 달리는 북한군 전차라면 30분 내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더구나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오는 진입로이자, 서울의 최후방어선인 미아리 전선에 투입된 국군과 육군본부와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육군본부 전방지휘소가 설치되었고, 연락은 연락장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철수시간을 정하고, 모든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동시에 철수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모든 전쟁사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보고 판단하고 평가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단지 전쟁결과만을 두고 과정을 평가하거나, 과정만을 앞세워 결과를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오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한강교는 조기 폭파되지 않았다.

      한강교는 조기 폭파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강교가 조기 폭파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를 믿고 있다. 한강교가 조기폭파 됐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시민과 국군이 철수하지 않았는데 폭파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진입하여 아직 한강교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폭파했다는 것이다. 

      당시 급박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2-3일내에 140만에 달하는 서울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피란시키는 일은 어떤 나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전선에서 적과 대치하여 싸우고 있는 국군을 온존이 철수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군사교리에서는 적과 대치한 상태에서 후퇴하려면, 반드시 강력한 포병이나 공중화력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상태에서 병력을 철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열세한 국군이 적을 앞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철수한다는 것은 자멸(自滅)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는 군 작전에서 금기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에 서울시민을 안전하게 피란시키고,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도 온전히 철수한 다음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일일지 모르나 당시 전쟁 상황과는 동떨어진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군은 서울시민이 피란하고 국군이 철수하도록 그냥 보고 있을까? 만약 시민피란과 국군철수를 동시에 실행에 옮긴다고 하더라도, 서울시민과 국군이 사용할 도로와 교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짧은 시간에 이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한 치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전쟁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또 북한군이 아직 한강교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미리 폭파했기 때문에 이를 두고 조기폭파라고 주장하는 것도 전쟁 상황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이 한강교에 들이닥치는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폭파하는 것이 군사적 상식이다. 학교 시간표처럼 정확히 짜여 진 계획대로 전쟁이 진행된다는 말은 익히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것과 한강교 폭파를 두고 조기폭파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조기폭파라고 주장한 자들에 의하면, 북한군 전차가 서울시내의 중심지인 삼각지로 들어온 시간은 6월 28일 08:00시경이고, 뒤를 이어 북한군 주력은 11시 30분에 들어왔는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2, 16쪽.)
     한강교 폭파는 02:30에 폭파됐기 때문에 최소한 5시 30분 내지는 9시간이나 빨리 폭파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주장하는 북한군 진입시간의 기준은 북한군 주력이 서울시내에 들어온 시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군 전차가 서울에 맨 먼저 들어온 시간은 6월 28일 00:30-01:00경이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전쟁보고서』2, 16쪽.
     그렇다면 육군본부가 최초 적 전차가 서울에 진입한 후 2시간 후에 폭파한다는 방침을 고려하면, 한강교가 폭파된 28일 02:30분은 육군본부의 최초 계획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한강교 폭파와 관련하여 고려해 볼 점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군 전차가 서울 시내로 진입한 2시간 뒤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군 전차의 속도를 고려하면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군 전차는 85밀리 주포와 시속 55km의 성능을 갖고 있는 현대식 전차라는 점을 고려하면, 적 전차가 서울외곽에 진출했다 하더라도 한강교까지는 불과 4-8km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이기 때문에, 30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렇게 볼 때 최초 적 전차의 서울 진입 2시간 후에 폭파한다는 것도 군사적으로 매우 위험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서울시민도 피란시키고, 국군도 완전히 철수시키고, 그리고 적 전차가 한강교에 도달했을 때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은 당시 전선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탁상공론식 주장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강교의 조기 폭파 운운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논리적으로나 군사적 상식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 ▲ 주저앉은 대동강 철교에 올라 남으로 피난하는 평양 시민들.
    ▲ 주저앉은 대동강 철교에 올라 남으로 피난하는 평양 시민들.
    4. 한강교 폭파에 대한 피해 통계는 잘못됐다. 

      한강교의 조기폭파로 인해 당시 교량을 건너던 500-800명의 인명과 40-50대의 차량이 피해를 입었다. 육군본부 역,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1968, 35쪽.
     이는 대체로 맞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강교 폭파로 국군 주력의 퇴로가 차단당함으로써 한강을 철수한 병력은 6월 30일 기준으로 24,00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육군본부 역,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35쪽.)
     
      그런데 24,000명이라는 숫자는 6월 29일 한강 전선을 시찰한 후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에 보고한 데에서 비롯됐다. 
     이후 한강교 폭파로 인해 국군의 피해를 설명할 때 국군 전력은 개전 당시 96,000명에서 24,000명 수준으로 떨어졌고, 한강 이북에 있던 45문의 야포, 그리고 차량 1,318대가 철수하지 못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계산으로 병력이 96,000명에서 24,000명으로 줄어둠으로써 무려 72,000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계산상의 오류가 있다. 당시 육군병력은 96,000명이었는데 이 중 전투병력은 68,000명이었고, 지원병력은 28,000명이었다.
    (합동참모본부,『한국전사』, 합동참모본부 군사연구실, 1984, 324쪽.)

     따라서 맥아더 원수의 보고서에서 말한 국군의 피해를 계산하려면, 68,000명에서 24,000명을 제외한 44,000명이다. 여기에 서울전선에 투입되지 않은 부대, 즉 제6사단과 제8사단의 병력 약 2만명, 후방에서 미처 뒤늦게 올라온 제3사단과 제5사단의 일부병력 5천명, 옹진에서 일찍 철수한 제17연대 병력 3천명, 그리고 뒤늦게 한강을 도하한 병력 4-5천명, 서울수복 후 군에 합류한 병력 2-3천명 등 35,000명과 전쟁개시 3일 간의 전투에서의 인명피해자(전사·실종·포로·부상)를 고려하면 실제로 한강교 폭파로 인해 피해를 입은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1사단의 경우 한강교 폭파로 그 당시 건너오지 못했던 병력들이 7월 중순에 사단에 합류함으로써 2천명 수준이었던 병력이 4-5천명으로 늘어났다고 백선엽 사단장은 증언하고 있다. (백선엽, 『6·25한국전쟁 회고록: 군과 나』, 대륙연구소출판부, 1989, 55쪽.)

     이는 다른 사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미국 자료에서도 6월 30일 국군 병력은 22,000명이었으나 며칠 후 제6사단과 제8사단의 병력을 합쳤을 때, 국군병력은 54,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Washington D.C.,: GPO, 1961, p.35.)

     이는 전투병력 68,000명을 고려하면 당시까지 손실은 14,000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한강교 폭파로 인한 군의 병력 피해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숫자상의 계산, 나중에 부대로 복귀한 병력의 미 고려, 후방에서 동원되지 않은 병력과 후방으로 철수한 병력까지도 모두 포함시킴에 따라 발생한 숫자상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차량에 대해서도 1,318대가 철수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6·25당시 국군 보유 차량은 육·해·공군을 포함하여 총 1,566대였고, 그 중 정비를 위해 500대를 회수하여 정비공장에 입고시켰다. (합동참모본부, 『한국전사』, 326쪽.)
     따라서 전쟁당시 실제 차량 대수는 1,066대였다. 그런데 한강교 폭파로 인한 차량 피해에 후방지역의 지원 및 특과부대 차량, 수도권 방어에 투입되지 않은 제6사단과 제8사단 차량, 6월 27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해·공군 및 육군(독립기갑연대 등) 차량, 후방에서 동원되지 못한 차량, 전투 중 고장 및 파손된 차량을 모두 한강교 폭파로 인한 피해 차량으로 포함시켰다. 

      대포의 피해에 대해서도 그 숫자가 과장됐다.
    한강 이북에서 45문의 대포 중 단 3문만 한강을 도강했다고 했는데, 이는 한강교 폭파이전 북한군과의 교전상황에서 피해를 입은 제7사단 포, 그리고 육군포병학교 교도대대 포, 그리고 옹진반도에서 철수하지 못한 제17연대 포까지도 모두 한강교 조기폭파로 인한 피해포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손실로 인한 포를 제외한 한강교 폭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파기한 대포는 제1사단 포 15문이 전부이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로 인한 국군장병의 피해는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으며, 차량도 제1사단과 제7사단 차량이 대부분으로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포도 제1사단 대포 15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철수하면서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포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대포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 ▲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의 한국참전 결의후 유엔 티그리브 유엔 사무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의 한국참전 결의후 유엔 티그리브 유엔 사무총장과 악수하고 있다.

    5. 한강교 폭파는 대한민국을 살리고 미국과 유엔의 참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강교 폭파는 수 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군의 피해가 있었지만, 전쟁의 전체국면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국군은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을 수 있었고, 가장 위협적인 무기였던 북한군 전차를 저지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국군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통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하게 됐고, 한강방어선을 지탱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부여받은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급거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워싱턴에 내놓게 됐다. 그것이 바로 미 지상군의 참전만이 한국에서의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워싱턴에 보고했던 내용이다.
     
    또 그 이전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고, 유엔군을 파병하기로 했으나, 만약 국군이 그때 한강방어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면 유엔안보리의 결의는 무위로 끝났을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평화를 위해 창설된 유엔의 기능은 이후 마비됐을 개연성이 충분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미국과 유엔회원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공산이 매우 컸다. 

      미군이 주일미군 3개 사단과 전략폭격기를 포함한 수천대의 전투기, 그리고 항공모함을 투입하고도 낙동강전선까지 밀리는 상황을 보면, 무기와 장비 그리고 열세한 병력으로 힘겹게 전투를 치르고 있는 국군이 북한군의 막강한 전력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강교 폭파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구하고, 국제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창설된 유엔의 권능을 유지하게 하고, 미군의 참전과 유엔의 참전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 ▲ 열차 석탄 화물간에 타고 피난 가는 사람들.
    ▲ 열차 석탄 화물간에 타고 피난 가는 사람들.

    Ⅳ. 맺음말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은 당시 북한군의 전력과 상황을 볼 때, 천우신조(天佑神助)였고, 국군의 한강교 폭파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일등공신(一等功臣)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전란 중 대통령의 유고는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게는 커다란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어려운 전쟁 초기 상황에서 북한군의 각종 위협과 서울시내의 불온세력으로부터 있을지도 모를 각종 위해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으로서는 행운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침 당시 수도 서울은 세계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국경을 지척(咫尺)에 둔 특수한 작전환경에 처해 있었고, 북한군은 2일차에 수도 서울로 진입하여 한강교를 점령하고 국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치밀한 계획 하에 행동했다. 여기에 북한군은 서울시내의 남로당원 6만 명을 포함하여 남한 각지의 남로당원 20만 명의 ‘인민봉기’를 기대했다.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미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 대한민국을 위해 전쟁이 일어나도 미군이 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으면서도, 북한과 소련은 혹시나 하는 우려에서, 전쟁을 1개월 만에 끝냄으로써 미국이 개입할 수 없는 ‘완벽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다. 

      그런 탓인지 전쟁 첫날부터 서울시내에는 북한전투기가 제집 드나들 듯 다니며 중앙청과 경무대를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공격했고, 이튿날 오후부터는 의정부의 함락으로 서울 시내가 적의 대포 사정권 내에 들어갔다. 여기에 서울시내에 암약하고 있는 6만 명의 남로당원이 형무소를 부수고, 풀려난 죄수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특히 북한군 전차의 성능이라면, 언제든지 경무대로 돌진하여 대통령을 생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는 그야말로 위해(危害)가 될 수 있는 모든 악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최악의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까지 전쟁목표 수립, 미국 및 유엔참전을 위한 전시외교, 국군에 필요한 무기 및 탄약요청, 전시 치안·사법·경제·교통 등에 대한 제반조치, 육군본부와 치안국 방문을 통한 전황 파악 등 전쟁지도를 태연(泰然)하게 수행했다. 상황의 위급함을 보다 못한 각료들과 측근들의 강요에 못 이겨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뒤늦게 경무대를 떠났다. 이때는 다행스럽게도 국가원수로서, 또 통수권자로서 할 수 있는 중요하면서도 긴급한 전시 국정업무를 모두 끝마친 후였다. 

      군에서는 북한군 전차가 서울시내에 진입해 들어오면, 2시간 내에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남침이후 국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이 북한군 전차였다. 북한군 전차 앞에서 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북한군 전차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한강교 폭파가 반드시 필요했다. 먼저 서울시민을 피란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한강교 폭파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한강이남에서 방어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한강방어는 결국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시찰을 가능케 했고, 맥아더는 전선시찰을 토대로 워싱턴에 미 지상군 참전만이 현재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보고를 하게 됐다. 이에 따라 워싱턴에서는 한국에 미 지상군을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게 됐고, 이는 결국 대한민국을 살리고, 유엔의 권능을 유지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의 전시피란은 임진왜란 때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의주(義州)로 피란을 간 선조(宣祖)와 비교될 수 없고, 더군다나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는 더더욱 비교될 수 없다. 이승만의 전시 통치행위를 비교하려면, 상황이 비슷했던 베트남전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자유월남’으로 알려졌던 남베트남(월남)은 북베트남(월맹군)의 공산군보다 월등하게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전쟁에 패배했다. 그 원인은 국가 및 군 지도자들의 무능과 비애국심(非愛國心)에 있었다. 

      남베트남(월남)의 대통령은 수도인 사이공으로 공산군이 몰려오기도 전에 대통령 직을 사임한 후 외국으로 망명했고, 군의 참모총장은 사이공이 함락될 상황이 되자 도망을 쳤다. 그렇게 해서 월남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처한 위기와 군 수뇌부에 닥친 군사적 상황은 월남보다 훨씬 열악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과 군은 그 위기를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용기와 지혜로 극복했다. 이를 보면 남침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군의 역할에 대해서는 비록 그 과정에서 서울시민과 군이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대국적인 측면에서 결국 이로 인해 대한민국이 살아 날 수 있었다.      

      더욱이 이승만 대통령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서울시민을 놓고 피란을 했으면서도 국가원수로서 서울시민을 구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바로 후회를 하고 이를 바로 잡았다. 그는 서울역에서 남하하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들녘에서 평화롭게 일하는 농민들을 보고,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했다면서, 기차를 다시 돌려 서울로 향하게 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실수를 과감히 인정하고, 국민들을 긍휼(矜恤)히 여기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는 그런 국가원수였다.

      또한 1951년 1·4후퇴 때, 이승만 대통령은 악몽과 같았던 남침직후의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남으로 다시 후퇴하게 되자, 이승만은 전쟁초기 서울시민을 피란시키지 못한 점을 회한(悔恨)으로 여기다가, 마침내 1·4후퇴 이전 그는 20여일에 걸쳐 군과 행정 관서를 총동원하여 서울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무사히 피란시켰다. 그리고 대통령 자신은 가장 늦게 서울을 떠났다. 그는 국민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며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현명한 국가지도자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그런 대통령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침직후, 그리고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런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국가원수로서 소임을 다했던 지혜(智慧)있는 지도자였다. 거기에는 나라를 다시 잃지 않겠다는 독립투사로서의 이승만의 애국심, 국민들을 긍휼(矜恤)히 여기는 무한한 애족심(愛族心), 전쟁의 위기를 통해 통일을 완수하려는 지도자로서 놀라운 목표의식과 강한 추진력이 밑바탕이 됐다. 

      이승만은 한 세기 전인 6·25전쟁 때 한국전선에서 유엔군을 총지휘했던 벽안(碧眼)의 미국 명장(名將)들로부터 이미 훌륭한 국가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맥아더, 리지웨이, 밴플리트, 테일러, 클라크 장군이 그들이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이승만을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국가지도자, 뛰어난 협상력을 지닌 국가원수, 아시아의 뛰어난 반공지도자로 치켜세웠다. 그들에게 있어 무능력이나 비도덕적이라는 말은 이승만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런데 유독 우리역사, 우리나라에서만 이승만을 여전히 폄훼하고 있다.
    60년 전 이승만 때문에 곤란을 당했던 미군 장성들조차 인정했던 이승만의 국가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애국심을 우리들만 인정치 않고, 여전히 저평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에 대한 전시지도자로서 평가가 시급하다 하겠다. 그 평가의 출발점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가 그 시금석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