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 歷史 교과서 논쟁사례: 英, 국가수반이 직접 나서 自國史 긍정 교육 도입

    '역사논쟁'의 최종 승리를 가져온 대처 수상의 애국심

    김필재   
  • ▲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前 영국 수상.
    ▲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前 영국 수상.
     영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역사교육이
    위기에 처했다’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역사교과목의 비중 축소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으나, 무엇보다도 사회 일각의 역사교육무용론이
    위기감을 부추겼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보수진영이 이념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대(對)좌파 공세를 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특히 신(新)보수 논객들은 역사학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지하고 ‘역사학의 위기’를 나름의 방식대로 해석해 대안을 마련하려 했다. 
     
     당시 영국의 교육현장 일반이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위기로 받아들였다면, 신(新)보수는 좌파적 급진사학, 곧 수정주의에 입각한 현대역사학의 대두를 위기의 징후로 판단했다. 
     
     신(新)보수는 또 1960~70년대의 비판사학과 이른바 ‘밑으로부터의 역사’의 득세를 우려했으며, 이 같은 좌파적 현대역사학의 성과가 교육현장에서 반영되고 있음을 비판했다. 
     
     일례로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와 정치적 소신은 여전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항상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의 경험은 바람직한 정책이나 제도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영향을 주고 색깔을 입힌다”고 지적했다.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경제사가인 하트웰(Ronald M. Hartwell)의 경우
    “지식인들은 계몽시대 이후 진보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들은 18~19세기에는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그리고 20세기에는 개입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관점을
    가졌다”면서 좌파를 공격했다. 
     
     당시 정권의 담당자였던 ‘철의 여인’ 대처 수상 역시 발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세대가 우리 국가사(National History)를 그릇되게 이해하고 평가 절하하는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학자와 저술가들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보가 이루어진 바로 그 시기(산업혁명, 빅토리아 시대)를, 영국이 다른 국가보다 가장 앞서 나갔던 바로 그 시기를, 가장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다”고 했다. 
     
     영국은 대처 수상의 취임과 함께 그동안 보수진영이 우려해온 역사학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역사수정주의’(History Revisionism)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제도화하는데 힘썼다. 
     
     대처 수상은 81년 보수당의 실세 정치가였던 키스 경(Sir Keith Joseph)을 교육부 장관에 임명했으며, 장관은 보수성향 역사학자인 엘튼(Geoffrey Elton), 토머스(Hugh Thomas) 등의 도움을
    받아 중등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과과정의 국정화를 추진했다.
     
     이들은 모두 영국사를 긍정하는 역사 서술을 교과과정에 도입하는데 주력했다. 
     
     핵심요소는 祖國과 祖國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함양하는 애국주의, 역사적 변화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보수주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도덕주의 등이었다.
     이들은 노예무역, 제국주의, 외국에서 저지른 악행 등에 대해 지나치게 자세히 기술하는 것을
    ‘자학사관’으로 여겼다. 
     
     영국의 이 같은 ‘국가교육과정’(역사)은 권위, 규율, 위계질서, 국가, 강력한 정부를 강조했다.
    국가교육과정을 통해 영국의 보수세력은 종래의 영국교육, 즉 교사가 마음대로 주제를 선택해
    가르쳐 왔던 것을 중지시키고 국가가 교육에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역사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과목에 대한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1986년 케니스 베이커(Kenneth Baker) 교육부 장관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다. 보수성향의 베이커 장관은 정부 중심의 교육통제와 국가교육과정의 도입을 강력히 추진했다. 
     
     1987년 1월 베이커 장관은 한 모임에서 영국 교육의 실패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개별학교와 교사에게 교육과정을 맡긴 데 있다고 주장하며, 국가교육과정을 영국에 도입할 계획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베이커 장관의 이 같은 계획은 결국 ‘역사논쟁’을 일으켰다. 
     
     좌파 성향 역사가와 교사들, 정치인들과 일반인들이 역사논쟁에 참여했다. 전문 역사가들은 내용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역사교육의 중요한 목표인 ‘역사적 탐구 기능’ 위축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좌파 성향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자율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노동당 정치인들 그리고 일부 일반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1988년 ‘교육개혁법’(Education Reform Act 1988)이 통과되었고, 이에 따라 1989년 1월 새로운 교육과정을 초안할 ‘역사분과 초안그룹’(History working Group)이 정부에 의해 임명되어 작업에 들어가 1990년 1월 최종보고서가 완성됐다. 
     
     이후 국가교육과정은 1995년 그 첫 번째 개정을 보았고, 두 번 째 개정이 1999년 9월9일 확정되었으며, 11월에 각 학교로 보내져 2000년 9월부터 시행됐다. 대처 수상을 이어받은 새로운 보수당 출신의 존 메이저는 교육에 관한한 대처 보다 더 보수적 경향을 보였다. 
     
     그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제2차 국가교육과정은 영국사 부분이 더 강화됐다. 제3차 교육과정은 영국사 중심의 학습내용을 계속 지켜 나가면서 교사들에게도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영국 역사 교육의 성공은 잘 구성된 국가교육과정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학습 성취 목표와 학습 프로그램, 그리고 양자 사이의 체계적인 연결이 영국 역사교육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대처 수상 집권 이후 지금까지 영국의 역사교육은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다.
    초등학교 뿐 아니라 중등학교에서 역사교육은 타 교과목에 비해 두드러진 성취를 보이고 있으며, 교사들은 이에 고무 받아 自國史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정리/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