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적인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 Liddell sisters(1859) ⓒ 뉴데일리
    ▲ Liddell sisters(1859) ⓒ 뉴데일리



    1951년에 나온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때문에 주인공 앨리스의 모습은 푸른 원피스를 입은 긴 금발머리의 소녀로 고정되어 있지만, 실제 모델인 앨리스 리델(1852-1934)은 검은 단발머리의 소녀였다. 앨리스 리델은 캐럴이 수학교수로 있던 옥스퍼드대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 학장인 리델의 딸들 중 하나였다.

    캐럴이 어느 화창한 여름날 이 아이들과 뱃놀이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초본이 된다. 

    캐럴은 사진에도 취미가 있어서 리델의 자매들을 자주 찍었는데, 그가 찍은 사진 속의 여섯살 짜리 앨리스는 총명한 검은 눈동자의 매력적인 꼬마 아가씨이다. 1850년대에 찍은 이 흑백 사진에는 세월 저편 속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운 소녀의 아우라가 감돈다. 

  • ▲ 18세 Alice, 1870년 캐럴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 뉴데일리
    ▲ 18세 Alice, 1870년 캐럴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 뉴데일리

    하고 있는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였다. 꽉 짜여진 교육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꿈꾸거나 상상할 시간이 없었다. 어린이용 동화가 따로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도 교훈적이거나, 규율과 복종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전혀 교훈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전래 요정 이야기 주인공과는 달리 주인공은 근대 영국의 부르주아 계층의 일곱살 짜리 작은 여자아이이고, 줄거리는 그녀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아무도 인습적인 규칙에 복종하지 않는다. 앨리스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 얘기도 자주 하고, 가끔은 이 세계와 자기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고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한다. 말장난과 상상을 통해 루이스 캐럴은 지나치게 근엄했던 과거의 동화들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전통 요정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도 시련, 변신, 마법의 물건, 말하는 동물들, 원조자와 반대자 등이 있다. 그러나 앨리스의 세계는 꿈의 세계이다.  앨리스는 심심해서 꿈을 꾸었고, 꿈 속에서 ‘이상한 나라’에 갔다. 그 나라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상사이고, 코커스 경주, 크로케 경기, 수수께끼 등 모든 종류의 놀이들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루이스 캐럴 자신이 “내가 가장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책이 어린이들에게 진정으로 순진무구한 즐거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라고 1877년에 썼듯이, 어린이들은 저자의 삽화가 곁들인 책 속에서 자신들이 꾸었던 꿈과 똑같은 체험을 하며 열광했다. 이 책이 즉각적이고도 지속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이다.   

  • ▲ Alice: mad hatter's tea party ⓒ 뉴데일리
    ▲ Alice: mad hatter's tea party ⓒ 뉴데일리


    루이스 캐럴의 책은 19세기에 나왔지만 그 기발한 발상은 월트 디즈니의 상상력을 능가한다. 아니 디즈니의 상상력이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나 싶다. 크로케 경기에서 살아 있는 고슴도치를 공으로 쓰고, 역시 살아있는 홍학을 방망이로 사용하는데, 홍학이 기다란 목을 비틀어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는다든가, 겨우 홍학의 머리를 되돌려 놓고 보면 고슴도치가 어디론가 기어가 버리고, 그걸 잡아다 홍학으로 치려 하면 이번에는 아치를 이루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어린이 만화 영화 ‘톰과 제리’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기발하고 신비하고 재치가 넘치는 단어들, 무수한 암호와 그것들을 해독할 코드들, 정신분석의 대상이 될만한 내용들에서부터 논리학적⦁언어학적 형식들에 이르기까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무궁무진한 독법(讀法)을 제공하는 의미의 보고(寶庫)이다. 
     

  • ▲ Alice: window in daresbury church ⓒ 뉴데일리
    ▲ Alice: window in daresbury church ⓒ 뉴데일리

     
    루이스 캐럴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진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깊이’, ‘높이’, ‘표면’이라는 세 차원의 공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을 시도해 볼 수 있다.

  • ▲ Alice 삽화 'drink me' ⓒ 뉴데일리
    ▲ Alice 삽화 'drink me' ⓒ 뉴데일리

    앨리스가 좁은 토끼굴 속에 빠져 끝없이 추락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첫번째 부분(1-3장)은 전적으로 깊이(심층)에 대한 분열증의 표출이다. 좁은 굴 속으로 한없이 빠진 후 흰 토끼 뒤를 쫒다가 들어간 곳이 넓은 방, 황금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문을 여니 쥐구멍 보다 크지 않은 작은 구멍과 연결돼 있지 않은가. 무릎을 꿇고 그 구멍으로 내다보니 이제껏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정원이 보인다. 그러나 그 구멍으로는 머리조차 빠져 나갈 수 없다. 그래서 테이블 위의 작은 병의 액체를 마시니 몸이 작아져 그 구멍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또 케익을 먹고 몸이 커졌지만 너무나 커져서 그 구멍을 지나 정원으로 나간다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옆으로 누워 한 쪽 눈으로 정원을 내다 볼 수 있는 것 뿐, 한참 울다보니 눈물이 강을 이루어 그 안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모든 것이 음식, 대변(大便), 유해한 혼합물이고, 좁아서 빠져나가기 힘든 구멍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부분은 명백하게 구강적, 항문적, 요도적이다. 앨리스는 키가 작아질 때는 이 물체들 중의 하나, 즉 음식, 대변 등이 되고, 커질 때는 그것들을 담는 용기(容器)가 된다. 
    두번째 부분(4-7장)은 앨리스에 의해 가득 채워진 집이라는 테마이다. 창문과 탁자가 있는 깨끗한 방에 이른 앨리스는 거울 옆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병을 집어들어 마신다. “이걸 마시고 다시 커졌으면 좋겠어. 이제는 이렇게 조그만 벌레처럼 돼 있는게 정말 싫어”. 반 병쯤 마셨을 때 이미 그녀의 머리는 천장까지 치솟고 있어 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쉬지 않고 커져서 마침내 무릎을 꿇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드러누워야 했다. 그래도 커지는 것이 멎지 않아 그녀는 한 팔을 창 밖으로 내밀고 한 발은 굴뚝 위에 얹었다. 집을 가득 채운 소녀의 팔과 다리가 창과 굴뚝으로 나와있는 이 장면은 꼬마 독자들을 열광시키는 재미있는 이미지이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어린아이-페니스-대변이라는 분열증적 계열이다. 

    이번에는 ‘높이’이다. 여기서 커지게 만드는 것과 작아지게 만드는 것은 높은 버섯 위에서 이루어진다(5장).

  • ▲ 팀 버튼 영화: white queen 역의 Anne Hathaway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white queen 역의 Anne Hathaway ⓒ 뉴데일리

    고양이는 두 번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공작 부인의 부엌에 있을 때, 다음에는 앨리스에게 산토끼 또는 모자 장수를 보러 가라고 충고할 때이다. 체셔 고양이가 나무 위 또는 하늘에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그것이 좋은 것, 페니스, 우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어느 때는 무사하고 또 어느 때는 상처입은 상태인데, 왜냐하면 때로는 몸 전체를 드러내고, 때로는 머리가 잘린 채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현전이거나 혹은 부재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미소만 남긴채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꼬리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여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고양이의 미소는 그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한 동안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따금 웃지 않는 고양이를 본 적은 있지만, 미소 없는 고양이, 아니 고양이 없는 미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존재일거야!”라고 앨리스는 생각한다. ‘고양이 없는 미소’라니, 얼마나 재미있는 말장난인가.  

    하여튼 나무 위 또는 하늘 속같은 체스터 고양이의 위치는 그것이 초자아(超自我)임을 보여준다. “그는 성질이 좋아보여” 라고 앨리스는 생각한다. 상층의 심급에 대한 테마는 캐럴에게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 ▲ 팀 버튼 영화: 모자장수 역의 조니 뎁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모자장수 역의 조니 뎁 ⓒ 뉴데일리


    세번째 부분(8-12장)은 평평한 ‘표면’의 요소이다. 황금 열쇠로 커튼 뒤의 자그마한 문을 열고 나가니 눈부시게 찬란한 화원과 분수로 가득찬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앨리스는 버섯살을 조금씩 뜯어 먹어 키가 30cm쯤 되어 있었다. 이 정원에는 정원사와 병사들, 왕과 왕비까지 모두가 평평하고 두께 없는 장방형 형태의 트럼프 카드들이었다. 다이아몬드 카드의 신하 열 명 뒤로 또 열 명의 시동이 둘씩 손을 잡고 나타났는데, 그들은 모두 트럼프의 하트(heart) 카드들이었다. 그 뒤로 진홍색 벨벳 쿠션 위에 왕관을 받쳐든 하트 나라의 시종무관이 따랐고, 이 위엄있는 행렬 뒤로 드디어 하트 나라의 왕과 왕비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크로케 경기와 가짜 거북이 이야기를 지나 마지막의 재판 장면. “이 아이의 목을 베어라!”는 여왕의 고함에 “너희들은 보잘것 없는 트럼프 카드일 뿐인데!”라고 앨리스가 코웃음을 치자 장내에 있는 모든 트럼프 병정들 아니 트럼프 카드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그녀 위로 떨어진다. 바로 이 순간 앨리스는 눈을 떴고, 언니는 앨리스의 얼굴에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내 주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분석한 학

  • ▲ 팀 버튼 영화: red queen역 헬레나 본햄 카터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red queen역 헬레나 본햄 카터      ⓒ 뉴데일리
    자들에 의하면 루이스 캐럴은 외디프스적 상황과 대면할 수 없을만큼 소극적인 사람이다. 아버지와 대립하여 아버지를 극복하기 보다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쳤고, 어머니의 사랑을 원하는 외디푸스적 단계에서 아버지와 싸워 어머니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찌감치 어머니를 포기했으며, 팔루스(phallus, 남근)와 동일시되는, 그러나 페니스는 없는 어린 소녀에게로 욕망의 방향을 틀었고, 그 결과 구강-항문기로 퇴행했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의미론

    들뢰즈는 이런 식의 진단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작품을 통해 저자를 잠재적 혹은 실제적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이 동화에서 의미와 무의미의 놀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얽힘을 발견했다. <거울 저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순수 사건들이라는 범주 라고 그는 말한다. 
    들뢰즈는 의미 이론이 역설(paradoxe)로부터 분리하기 힘들고, 의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실체이며, 더 나아가 무의미와 매우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그가 루이스 캐럴을 그토록 중요하게 다룬 것은 루이스 캐럴이 처음으로 의미의 역설들을 수집하고, 쇄신하고, 발명하고, 조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 ▲ Dali의 조각: 앨리스 ⓒ 뉴데일리
    ▲ Dali의 조각: 앨리스 ⓒ 뉴데일리

    “앨리스는 커진다”고 말할 때, 이 말은 그녀가 이전보다 더 커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곧 그녀가 지금보다 더 작아짐을 뜻한다. 분명 그녀는 보다 크면서 동시에 작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가 보다 커지고 보다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그녀는 지금 더 크고, 그 전에는 더 작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전보다 더 커지는 것과 이후보다 더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이다. 이것이 생성(生成)(to become, devenir)의 동시성이다. 그러니까 생성의 고유한 성격은 현재를 교묘하게 피하는 것이다. 

    생성에는 현재가 없고, 오로지 과거와 미래 두 방향의 동시성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생성의 본질이다. 그래서 앨리스는 다시 작아지지 않고는 커지지 않으며,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양식(良識)(bon-sens)은 모든 사물에 하나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sens는 프랑스어에서 ‘의미’를 뜻하기도 하지만 ‘방향’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양식’은 ‘좋은 방향’, ‘올바른 방향’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paradoxe, contre-sens)은 두 방향을 동시에 긍정한다. 

    순수 생성은 양 방향으로 결코 멈추지 않으며, 늘 현재를 비켜가며, 물질의 동시성 속에서 미래와 과거, 최대와 최소, 지나침과 충분치 않음을 일치시킨다. 들뢰즈가 미친 듯한 생성(devenir-fou)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보다 덥고 보다 추운 것은 어떻게든 움직일 뿐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만일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으며 정지해 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생성이 없다. “보다 젊은 사람이 보다 늙은 사람보다 더 늙게 되고, 보다 늙은 사람이 보다 젊은 사람보다 더 젊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생성을 끝마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성하기를 그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생성하지 못할 것이요, 단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라고 플라톤은 ‘파르메니드’에서 말하고 있다. 이 때 존재란 변화 없고 생성 없는 물질 상태의 무기력한 정태적(靜態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 ▲ 팀 버튼 영화: Alice in wonderland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Alice in wonderland ⓒ 뉴데일리

    플라톤의 파에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플라톤의 생성론을 유아적으로 풀어 쓴 플라톤적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커지면서 동시에 작아지는, 또는 작아지면서 동시에 커지는 앨리스의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에돈’을 그대로 상기시킨다. 당연히 그것은 또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이론을 관통하는 저류이기도 하다. 

  • ▲ 앨리스: we're all mad here ⓒ 뉴데일리
    ▲ 앨리스: we're all mad here ⓒ 뉴데일리



    소크라테스와 심미아스의 대화를 옮긴 ‘파에돈’의 한 장면을 옮겨보자.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그 반대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닌가? 가령 아름다움과 추함, 옮음과 옳지 않음 같은 것이 말일세. 이 밖에도 반대 것에서 생기는 것들이 무수히 있지. 이제 반대 것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반드시 그 반대 것으로부터 오고 결코 딴 데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 보기로 하세. 가령, 어떤 것이든 더 크게 된다는 것은 먼저 작았던 것이 보다 크게 되는 것 아닌가?”

    심미아스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계속 말한다.

    “보다 작은 것이 생기는 경우에도 먼저 보다 큰 것이 있었고 그리고나서 보다 작게 된 것이지. 보다 약한 것은 보다 강한 것에서 나왔고, 보다 빠른 것은 보다 느린 것에서 나왔지? 보다 나쁜 것은 보다 좋은 것에서, 보다 옳은 것은 보다 옳지 않은 것에서 나왔고? 그러면 상반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즉, 그것들이 모두 반대 것에서 나왔다고 말이야? 즉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는 두 가지 생성이 있지 않을까? 이것에서 저것에로, 또 저것에서 이것에로 말일세. 가령 보다 큰 것과 보다 작은 것이 있으면 또한 증가와 감소가 있어서 커지는 것은 ‘늘어난다고’ 말하고 작아지는 것은 ‘줄어든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 밖에도 분리와 결합, 차게 되는 것과 덥게 되는 것처럼, 이것에서 저것이 생기고 또 저것에서 이것이 생기는 것이 많이 있는 거야. 이 모든 경우에 우리가 일일이 명칭을 붙이고 있지는 않지만, 상반하는 것들은 모두 반드시 이와 같이 서로서로 반대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느낀 쾌락과 고통의 상관관계를 예로 든다. “쾌락이란 참 이상야릇한 거야. 고통은 쾌락의 반대의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은 그 관계가 묘하단 말이야. 이 두 가지 것은 동시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은 없으면서도 그 중의 하나를 추구해서 얻으면 대체로 반드시 다른 하나도 얻게 마련이거든. 지금 내가 경험해 보니 쇠사슬에 묶여 내 발이 아프더니 그 고통이 가시니 쾌감이 뒤따르는 것 같군.” 
     

  • ▲ 팀 버튼 영화: 토끼가 시계를 점검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토끼가 시계를 점검 ⓒ 뉴데일리
     
  • ▲ 팀 버튼 영화: 앨리스가 거대버섯 숲속에서 꽃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앨리스가 거대버섯 숲속에서 꽃들에게 인사하는 장면 ⓒ 뉴데일리

     
    생성은 시뮬라크르의 특징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원론의 참모습이 가지적(可知的)인 것과 감각적인 것 사이의 것이기 보다는 감각적인 것(물질적인 사물들) 자체 내에서 둘로 나뉘는 이원론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데아와 현상계 사이의 이원론이 아니라 현상계(現象界) 속에서 형상(形相)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과 피해가는 것 사이의 이원론이다. 즉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라 복사본과 시뮬라크르의 구분이라는 것이다. 

    ‘파에돈’에서 말하는 순수생성 즉 무제한성은 바로 시뮬라크르의 성질이다.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의 작용을 교묘하게 피해가고, 원본과 복제에 대해 동시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교묘히 비켜가는 이 순수 생성의 역설은 다름아닌 무한한 동일성이다. 과거와 미래, 어제와 내일,

  • ▲ 팀 버튼 영화: 앨리스 역의 미아 와시코프스카 <br />ⓒ 뉴데일리
    ▲ 팀 버튼 영화: 앨리스 역의 미아 와시코프스카
    ⓒ 뉴데일리

    ‘더’와 ‘덜’, ‘너무’와 ‘아직’,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 등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무한한 동일성을 고정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작은 소녀를 동일한 하나의 소녀로 고정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앨리스’라는 이름이듯이. 

    팀 버튼 감독, 3D버전 내년 출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1865년 맥밀란 사에서 출판된 이래 거의 150년 동안 여러 나라의 언어로 출판되고, 연극, TV 드라마, 영화로 만들어져 오늘까지 그야말로 ‘앨리스 산업’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팀 버튼 감독에 의해 다시 한 번 영화화 된다. 

    지난 6월 22일 팀 버튼 감독은 3D 버전의 새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내년에 출시한다고 발표하고, 스틸 사진 10장을 공개했다. ‘가위 손’, ‘찰리와 초콜릿 공장’, ‘스위니 토드’ 등 이미 6편에서 팀 버튼 감독과 호흡을 맞춘 조니 뎁이 모자 장수로 나오고, 감독의 실제 부인인 헬레나 본햄 카터가 “머리를 잘라라!”라고 말하는 악한 하트의 여왕(Red Queen)으로 나오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여주인공 앤 헤서웨이가 흰색의 여왕(White Queen)으로 나온다. 주인공은 미아 와시코프스카(Mia Wasikowska)라는 뉴질랜드의 신인 여배우가 맡았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속편에 가깝다. 주인공은 어린 소녀가 아니라 프로포즈를 받고 토끼굴로 뛰어든 17세의 처녀로 설정되었는데, 거기서 앨리스는 어린 시절의 모험을 다시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 팀 버튼의 앞선 영화들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공포 영화에 가까운 괴상하고 흥미롭고 무시무시한 영화가 될 가능성이 많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무의식의 세계를 감추고 있는 이 소설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한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내년에 나올 영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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