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결혼생활 종지부..홀로서기 나선 서정희, 과거 '악연' 털고 새출발"어디에 있든지 잘 살길 바래..이젠 남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았으면"

  • 지난해 8월 개그맨 서세원(60)과 합의 이혼한 뒤 '홀로서기'에 나선 방송인 서정희(55)가 "전 남편 서세원이 어디에 있든지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란다"며 "이제는 완전히 용서했다"는 심경을 밝혀 주목된다.

    서정희는 22일 '뉴데일리'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이 좀더 성숙한 아내였다면 남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초기에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라며 "그저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순종적인 태도만 보인 자신에게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저는 살면서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냥 선한 아내, 복종하는 아내의 모습만 유지하다 보니 이런 지경까지 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서정희는 서세원과 여러 면에서 맞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선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하기보다 그냥 제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열심히 진실되게 살다보면, 언젠가 상처는 아물게 돼 있고, 진리는 통하게 돼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 서정희는 "지난 32년간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매일 밤 침상에서 울며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을 '쇼윈도 부부'라고 칭하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물론 제가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리진 못했어요. 부부의 일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들은 오픈을 할 수 없었죠. 저는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순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서정희가 생각하는 최선은 가족의 행복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자녀들의 행복이었다. 이미 오래 전, 남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서정희에게 서동주·동천 남매는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정은 단지 자녀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저는요, 저희 부부의 사생활을 다 보여드리는 것보다 제 가정을 지키고 싶었어요. 제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내야겠다는 신념이 저에겐 가장 최선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서세원씨와)계속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 지난 2014년 5월, 대한민국 전역을 들썩이게 한 '그 사건'이 발생하지만 않았어도 서정희는 '지금도 변함없이' 서세원의 옆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서울 청담동 소재 P오피스텔에서 남편 서세원과 말다툼을 벌이던 서정희는 남편에게 목이 졸리고, '강아지 인형'처럼 질질 끌려가는 끔찍한 폭행을 당했다.

    사건 직후 혐의를 부인하던 서세원은 두 달 뒤 MBC '리얼스토리 눈'에서 당시 폭행 장면을 찍은 CCTV 영상을 공개하자 그제서야 "다리를 잡아 끈 적은 있다"고 범행 일부를 시인했다.

    서세원이 폭행 혐의로 기소되면서 두 사람의 '다툼'은 사회적인 이슈로 급부상했다. 재판 중에 드러난,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깊었다. 양측의 공방전은 시시각각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됐고, 이를 통해 지금껏 서정희가 감춰왔던 결혼 생활의 민낯이 드러났다.



  • 여론의 '눈'과 재판부의 '의중'은 다르지 않았다. 서세원은 아내를 폭행한 혐의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실형은 면했으나 평생 주홍글씨처럼 따라 다닐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은 대중 연예인에겐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다.

    엄연한 '피해자'인 서정희도 많은 것들을 잃었다. 남편과의 불화를 꼭꼭 숨겨왔다는 이유로 난생 처음 그를 비난하는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고, '목회자 부부'라는 타이틀도 자동 반납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지난 1년 6개월 사이, 32년간 지켜온 가정이 '반토막'나는 참담함을 맛 본 서정희에게 '재기(再起)'란 요원한 숙제로 보였다.

    간헐적으로 이어오던 언론 인터뷰도 어느샌가 '연결 고리'가 끊기고 말았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말 그대로 외부와의 접촉이 끊어진, 기나긴 침묵의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병신년(丙申年) 새해 벽두, 서정희의 일상을 담은 '리얼 다큐'가 지상파에서 방송됐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상과 연을 끊을 것처럼 보였던 서정희가 딸과 함께 '밝은 얼굴'로 돌아오자, 대중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고, 여느 평범한 엄마로 돌아온 그녀에게 "힘내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 각 방송사와 언론 매체는 앞다퉈 서정희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포털 사이트에는 서정희와 딸의 이름이 연일 오르내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사실 그동안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건강이 무너지고 나니까 모든 게 힘들어지더라고요. 나중엔 기도하는 것도 힘들고, 숨쉬는 것조차 힘든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내 가족들과 나를 지지해준 많은 분들에게 정말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27살에 생을 마친 최영숙씨의 일화를 접한 것도 계기가 됐죠. '그래 난 다시 시작해야돼', '이렇게 멈출 순 없어'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으면서 차츰차츰 회복이 되기 시작했어요.


    지금껏 자신을 믿어준 가족과 두 자녀를 위해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결심한 서정희는 때마침 '출연 제안'을 해 온 제작진에게 OK 사인을 보낸 뒤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

    심각한 저체중에 시달렸던 서정희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잘 먹고, 잘 자는 것'에 주력했다. 병원 치료와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건강을 회복하면서 어느 순간 '뭐든지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요즘 들어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아졌어요. 드라마 주인공 대사를 따라하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고, 한달 째 탁구도 배우고 있어요. 원래는 제가 몸치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운동 신경이 있더라고요. 처음엔 겁이 나서 도전하는 걸 꺼려했는데 지금은 제가 안해봤던 건 일단 뭐든지 해보려고 해요.


    단 한 가지, 서정희의 발목을 잡는 게 있다. 서정희는 수개월 전 발병한 '대상포진'이 잘 낫질 않아, 주기적으로 온 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마음만은 스무살 처녀나 다름 없는데, 몸이 따라 주질 않네요. 지금도 머리카락만 스쳐도 움찔움찔하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약도 열심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32년 동안 해보지 못했던 걸 다 해볼 작정이에요. 저같은 사람도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걸,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 - 안녕하세요.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 돼 영광입니다. 먼저 저희 독자 여러분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아침 빛 같이 또렷하고,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그 여자가 누구인가. 바로 서정희입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2016년을 새로 시작하는 새해에 저도 여러분과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 지금 말씀하신 멘트가 서정희씨 카카오톡에 있는 문구죠?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것에 대해 제 스스로를 격려하는 문구예요. 아가서 6장 10절을 인용한 건데요. 아침 빛 같이 또렷하면, 사람의 삶도 또렷해지지 않겠어요?

    해처럼 맑다는 건, 제 안의 모든 것들을 깨끗한 것들로 '리플레시'한다는 의미가 있고. 깃발을 세운다는 건 승리잖아요? 깃발을 세운 당당한 여자, 숨지않고 당당한 여자, 그리고 힘든 일이 있다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여자가 되자는, 저를 스스로 권면하고 사랑하는 그런 문구입니다.

    - 새해부터 서정희씨에 대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지고 있어서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저간의 인터뷰 내용들을 보면 어떤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당당하자, 이제는 숨지 말자, 떳떳하자, 이런 메시지로 읽혀지는데요. 이같은 마음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사실 암흑과도 같았죠. 공허하고, 죽음과 싸우고…. 다시 소생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까? 제 스스로를 엄청 채찍질하고 밀어내는….

    - 자학하는?

    ▲그렇죠. 그리고 제 스스로를 자꾸 슬픈 모드로 몰아 넣었어요. 음악도 슬픈 음악만 듣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내가 살아서 뭐해, 이런 망신을 당하고 살면 뭐해, 이젠 아이들도 다 컸잖아? 난 아무도 없잖아, 이제 난 할 일이 없어. 이렇게 제 스스로를 굉장히 힘들게 했던 1년 6개월이었어요.

    물론 약물치료도 받고, 트라우마 치료와 상담도 받았지만, 일단 건강이 무너지고 나니까 모든 게 힘들어지더라고요. 나중엔 기도하는 것도 힘들고, 숨쉬는 것조차 힘든 시간들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최초로 스웨덴으로 건너가 경제학 학사를 취득한 최영숙이란 분이 계신데요. 1920년대 스톡홀름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최영숙씨는 당시 영어 중국어 독일어까지 능통한 재원이었지만 정작 조선에선 아무런 업적도 남기질 못했어요.

    당장 가정이 어렵고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공부한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최영숙씨는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지지 못하고 27살에 죽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와 책으로 접하게 됐는데요. 그 순간, 막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저는 그런 훌륭한 사람은 분명 아니지만,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한때는 무크지를 내고, 많은 가정에 코칭을 하고, 대표적인 미시족이자, 웰빙의 선두주자였던 서정희가 자신의 가정은 완전히 깨졌고, 끝내는 자살에 이르렀다면? 이것은 정말 저에겐 치명적이죠. 거기에 신앙인으로의 모습조차 없다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건 아니구나', '그래 난 다시 시작해야돼', '이렇게 멈출순 없어', 나를 위해서 회복하는 게 아니라, 저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 저를 믿어줬던 팬들과 신앙인들, 가족들을 위해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어요.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으면서 차츰차츰 회복이 되기 시작했어요.



  • ◆ "공허하고, 죽음과 싸우고…, 다시 소생할 수 있을까?"


    -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겠지만, 주위에 있는 가족들의 응원과 도움도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님이라든지, 지금 함께 살고 계신 어머님도 그렇고…. 그 분들에게 서정희씨가 많이 의지하는, 그런 시간들이었죠?

    ▲기자님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저를 보고 '말 잘한다', '똑똑하다'는 칭찬을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는데요. 저의 좋은 면을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만, 사실 현실적인 문제는 정반대예요.

    물론 제가 묵상하고, 책을 많이 읽고, 음악도 많이 듣고, 미술도 많이 보고, 에세이도 많이 읽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접하다보니 정신적으로 영적인 성숙도는 좀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모든 것들이 저에겐 무서운 거예요.

    85년에 운전면허를 따긴 했지만, 제대로 운전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가정 불화가 생기기 전까지 고속도로는 타 본 적도 없고요.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일을 제 스스로 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죠. 그 부분을 제 아이들이 가장 걱정하고 있어요.

    저희 엄마도 저한테 "너는 몸이 그렇게 나빠졌는데 아직도 아이들처럼 먹는다"고 타박을 하세요. 우리 아이들도 제가 먹는 걸 보고 막 야단을 쳐요. (웃음) "야채 좀 먹어", "홍당무 먹어", "흰설탕 그만 먹어" 등등. 그래서 제가 흰설탕은 자주 감춰놔요. 애들한테 뺏길까봐. (웃음)

    아무튼 제가 보기에도 저는 남들과 비교해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생각을 했죠. 나는 왜 이럴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저는 고등학교 2학년, 18살 때 학업을 중단했어요. 그 이유는 당시 저희 식구 모두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기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29살 때 혼자가 되셨는데요. 막내를 낳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5살 때부터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어요.

    당장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되는 상황인데, 환경적으로 미국을 가는 게 가장 좋겠다는 판단을 어머니가 내린 거죠. 저도 그때엔 미국만 가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영어학원을 다녔는데요.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캐스팅이 된 거예요.

    당시 태평양화학에서 '향장지'라는 미용월간지를 발행했는데요. 그 잡지에서 근무하는 사진 기자님이 저를 발탁해주셨어요. 지금도 사진 작가로 유명하신 정창기 선생님이 바로 그 기자 분이셨어요. 그런데 당시 화장품 모델은 섹시한 이미지가 선호되던 시절이라, 막상 저는 화장품 모델로 데뷔하지는 못하고, 소개를 받아서 간 곳이 제과업체 광고 회사였어요. 그곳에서 서세원씨를 만나게 된 거죠.

    - 제과업체의 광고를 찍는 프로덕션에서 서세원씨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거 군요.

    ▲당시 서세원씨가 자신의 파트너로 저를 지목하면서 함께 광고를 찍게 됐는데요. 모델 활동을 시작하면서 바로 서세원씨와 동거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회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죠. 제가 첫 순결을 바친 사람이 바로 서세원씨에요.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랄까? 저는 어린 마음에 순결을 바치면 그 집에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렇게 못할 시엔, 예전 어머님들이 은장도를 품고 계셨잖아요? 자결을 해야한다…. 뭐 그런 정서가 제 안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 선택이 좋든, 좋지 않든 혼인을 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됐어요.

    그렇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가정을 꾸리다보니, 가정 안에서 하는 일들은 누구보다도 능수능란했지만 밖에서 하는 일에는 서툴 수밖에 없었죠. 나중에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면서 제 삶을 추적하게 됐는데요. 제가 균형이 많이 깨진 성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성인인데 아이였고…,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서 키우다보니, 아이가 아이와 함께 자라는 상황이 벌어진 거예요. 사람과의 관계성이라든가, 모든 면에서 균형이 깨져 있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오해도 많이 샀고,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었어요.

    또한 지금처럼 저의 평범한 모습을 보여드린 적도 없었고, 진솔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편하게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토크쇼에 나갈 경우엔 제 안에 있는 것들을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 뿐이었죠.

    방송 토크쇼를 못 배우고 잘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제 열등감을 덮어버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던 거죠. '난 못 배웠지만 살림을 잘해', '가난했지만 지금은 럭셔리해'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제 안에 있었던 쓴뿌리들이 더욱 더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된 거죠.



  • ◆ "순결 바치면, 결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


    - 그럼 일종의 '보여주기식'으로 활동하신 부분도 있었겠군요.

    ▲그래서 매사에 더 열심이었던 것 같아요. 요리도 열심히 배웠어요. 일식만 빼고는 다 배웠는데요.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저의 수준을 더 높게 만들기 위해서 힘들게 저를 몰아갔던 시절이었죠. 그러나 힘든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진정으로 기쁨을 맛봤죠. 아이들로 인해 기뻤던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 사실 '쇼윈도 부부'의 전형이라고 많은 분들이 일컫고 있는데요.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선 동의를 못해요. 물론 제가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리진 못했어요. 부부의 일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들은 오픈을 할 수 없었지만, 저는 그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순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살아왔거든요.

    과거를 돌아보면 늘 기쁘겠어요? 아무래도 후회가 많이 되겠죠. '그때 그렇게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었는데', '그때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수많은 후회들을 할 거라는 얘기죠.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시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정직하려고 노력했고,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려고 힘썼어요.

    저는요, 저희 부부의 사생활을 다 보여드리는 것보다 제 가정을 지키고 싶었어요. 제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내야겠다는 신념이 저에겐 가장 최선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서세원씨와)계속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서세원·서정희 부부를 방송으로 지켜봤을 때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읽혀졌거든요. 또 서정희씨는 "남편을 존경한다"는 말도 몇 차례 하신 적이 있고요….

    ▲저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아침 빛 같이 또렷하고…" 같은 문구를 반복하면서 제 스스로 세뇌하는 습관이 있어요. 

    - 일종의 주문 같은 거 군요. 마인드 컨트롤.

    ▲그렇죠. 저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남편은 반드시 좋은 남편이 될 거야', '내가 기도하니까 변화시킬 수 있어', '난 해낼 수 있어' 같은 생각을 계속 되내었어요.

    - 그러면 토크쇼에서 하셨던 말들, 예를 들면 남편에 대한 '수식어'들은 결과적으로 가정을 지키고 변화시키기 위한 '선포'이자 '다짐'이었던 셈이군요.

    ▲선포죠.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살잖아요? 그날부터 불신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살 수가 없거든요. '스톡홀롬 증후군(Stockholm syndrome)'이라고 아시죠? 제가 트라우마 치료를 받으면서 스톡홀롬 증후군 같은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어떠하든지간에 그 사람을 보호하려고 하고, 그 상황에 익숙해지면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속성이 있었어요.



  • ◆ "남편은 좋은 사람..일종의 자기 암시였다"


    - 일전에 "지난 32년 간의 결혼생활은 나에게 감금과도 같은 생활이었다"고 밝히신 적이 있으시잖아요? 뒤늦게 자신을 되돌아보니 이렇게 깨달아진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이런 마음을 품고 버텨오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제가 이 자리에서 없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을 거예요. 김정은 체제에서 북한 주민들이 깃발을 들고 김정은을 칭송할 때 사실 그들의 속내가 어떠한지는 유추해 볼 수 있잖아요?

    가정도 마찬가지예요. 제 스스로 굳이 말을 안해도 제가 갖고 있는 아픔들을 언젠가는 말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없었죠. 또 많은 분들을 이해시킬 만큼 제 위치가 좋지도 않았고요.

    19살이란 나이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으로 하면 17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죠. 그런 아이들은 아직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요.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나 정체성도 확립되지 않은 시기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다보니 저는 거기에서 멈춘거예요.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 중 서두에 나오는 말인데요. 어떤 사람이 광야를 지나가다 한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잠을 청하다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마치 제 삶이 19살 때 광야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잠이 들고, 지금 이 나이에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스무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 밑바탕에는 너무나 간절했던 거죠. 딱 끊어진 필름처럼 다 잊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다시 19살로 돌아가고 싶은, 제 심리 상태가 너무 눈물겨운 거예요. 테스트를 해보니 17~19살에 했던 것들은 다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의 것들은 제가 무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잘 기억이 안나요. 치료를 받으면서 깨우치려고 노력을 해도 잘 안돼요. 그런데 트라우마 치료를 받다가도 어릴 적 기억들은 신기하게도 툭툭 튀어나와요. 이를 테면 그때 암송했던 '시' 같은 것도….

    - 시요?

    ▲청소년기에 제가 꿈이 '문학소녀'였어요. 그 당시엔 다들 그랬죠. 그리고 제가 글짓기를 나름 잘했어요. 특히 시를 좋아했는데요. 이것저것 많이 외우고 다녔죠. 이를테면 김춘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 당시엔 모르고 읊었는데 지금에와서 보니,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내 빛깔과 내가 가진 못든 것들도 누군가에게 발견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더라고요.

    또 읊어볼까요?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줄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줄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줄은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아무리 밝아도, 누구나 쳐다보면 볼 수 있는데, 저는 못 봤던 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날마다 돋는 달도 저는 몰랐던 거예요. 이제야 세상이 나와보니 그 달이 눈에 보이는 거죠. '어릴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외웠던 시들이 내 삶에 이렇게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죠.

    또, 김소월님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보면,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 오히려 세상 모르고 살았으면.

    이런 시구가 나오잖아요? 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우린 돌아서면 남이에요. 32년간 애쓰고 힘쓰고 땀을 뻘뻘 흘리고 달려왔지만, 저는 지금 아무 것도 없잖아요. 슬프죠. 그래서 치유 받으면서 이 시를 되내이다 엄청 울었어요.

    희망적인 시를 많이 외워두면 내가 힘들 때 그것들이 툭툭 튀어 나와서 나를 위로한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죠. 반면 어둡고 우울한 것들을 내 안에 가득 담아 두면 그것들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제 삶을 투영하는 것 같고, 삶의 지향점을 담고 있는 시가 있는데요. 윤동주님의 서시예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실제로 제가 앓고 있는 '대상포진'은 머리카락만 스쳐도 몹시 아파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모두가 다 아는 시지만, 저에겐 특별해요. 저 역시 저한테 주어진 길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고 기대하고 있어요. 

    '비록 50대 후반의 나이를 먹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 ◆ 김소월의 시처럼.."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 이런 서정희씨의 모습을 대중들이 봤을 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에서도 역경을 딛고 일어났다는 점,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돼 드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화제를 바꿔서요. 지금보니 암기력이 정말 뛰어나신 것 같은데요. 이런 총명한 머리를 자녀분들이 그대로 이어받으신 거 같습니다.

    ▲저는 좋은 것들이 있으면 메모를 꼭 해요. 습득하고 입으로 따라하고 반복하는 훈련들을 어릴 때부터 해왔어요. 아마도 그런 것들은 조금 닮지 않았을까….

    - 평탄치 않은 가정이었지만 자녀분들이 잘 성장을 하셨잖아요? 그런 점에서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있으시겠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나' 같은 주제로 강연을 많이 다녔었는데요. 지금 되돌아보면 저는 특별히 한 게 없었어요.

    다만 제가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 '열정'을 아이들에게 쏟다보니, 어느날 목표치를 뛰어넘는 스펙을 아이들이 쌓게 됐고, 또 아이들 스스로도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피아노를 연습할 때에는 유명 연주가들의 테이프를 계속 들으면서 함께 연구하고, 해당 분야 월간지를 정기 구독해서 열심히 리서치를 하는 노력 등은 기울였어요. 미술로 방향 전환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못 배웠잖아요? 또 가정 환경도 좋지 못했고…. 그래서 제가 얼마나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었겠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학업을 위한 것들이었죠. 아이들이 원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하나 밖에 없었어요. 엄마와의 소통. 자신의 입장에서 엄마가 잘 헤아려주길 원했던 것인데…. 저는 이미 아이들의 필요를 다 채워줬다고 생각하고, '나는 완벽한 엄마야'라고 착각한 채, 스스로 만족하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가장 가슴 아프고, 미안하고 그렇죠.

    - 그러면 지금 자녀들과는 (이전보다는)훨씬 흉금을 터놓고 지내시는 편인가요?

    ▲지금은 아이들이 저를 가르치던데요? (웃음) "엄마 왜 이렇게 못해?", "이런 거 하기 전에 겁먹지 말고, 먼저 물어봐" 같은 충고들을 자주 건네줘요. "자꾸 도전하라"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요. 저는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이 잘못하면 무작정 다그치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제가 서툰 모습을 보일 때 따뜻하게 감싸주고 기다려주는 편이에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제가 배우고 있고…, 많은 분들에게 "서정희처럼 교육하면 안된다"고 말씀을 드리고 있어요.

    -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의 나래를 펼치지 못하고, 밝은 달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상태로 지내왔다면 이제는 자신만의 삶을 사셔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은 아닌지.

    ▲요즘은 정말로 제가 스무살인 것 같아요. 너무 하고 싶은게 많아졌어요. 예를 들면 며칠 전에 제가 리코오더를 샀어요. 받자마자 그냥 불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계이름이 생각나고 손가락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거예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죠. 이런 소소한 것들에 도전을 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어요.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주인공 대사를 따라하고,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면 노래도 부르고 싶고…. 그냥 다 하고 싶은 거예요. 호호. 하물며 톨게이트를 지나갈때 "1천원이 결제됐습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나오면, 그걸 또 따라하는 습관까지 생겼어요.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해요. (웃음)

    - 안타까운 것은 그 춤을 봐줄 사람이 없다는 건데요.

    ▲왜요? 저는 혼자서도 충분히 즐거워요. 노래도 잘 못 부르고 춤도 잘 못 추지만, 제가 느끼는 감정을 행위로 표현하는 거죠. 그리고 저는 지금껏 제가 굉장히 정적인 사람인줄 알았거든요? 그냥 앉아서 책 읽고 묵상하고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런데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처음 배웠는데요. 의외로 제가 소질이 있더라고요. 속으로 '나 탁구 신동 아냐?' 하고 쾌재를 부르다가도, 10분만 넘어가면 체력이 바닥나서 "쉬고 싶다"고 먼저 말을 하죠. (웃음)

    이외에도 골프나 운전을 조금씩 익히면서 제 스스로에게 놀랄 때가 많거든요. 그런 점들이 익사이팅하고 재밌고 그래요.



  • ◆ "용서는 했지만,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 실례가 안된다면 현재 금전적인 상황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재산상의 문제를 정리 중이고요. 현재는 딸이 도움을 많이 주고 있어요. 경제적인 부분은 딸이 책임을 지고 있는 상황이죠. 저도 이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절실한 마음을 느끼고 있어요. 저는 일할 수 있는 통로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고 싶어요.

    - 듣자하니 일부 매니지먼트사에서 계약을 하자고 제안을 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감사하게도 여러 군데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대형기획사에서도 제안을 주셨어요. 현재 검토 중입니다.

    -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려면, 소위 '쓴뿌리'라고 하죠?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것을 먼저 치료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싶은데요. 자녀들과, 또 어머니와의 관계성은 이제 회복하신 것 같은데, 가장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분이죠. 전 남편 서세원씨와의 '심적인 정리'는 잘 마무리 지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2년간을 외부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쇼윈도 부부'라는 오명을 갖고 살만큼 제 안에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매일 침상에서 울며 세월을 보냈어요.

    다시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고, 단 한 번도 (이혼을)후회한 적이 없어요. 생명의 위협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남편에 대한 신뢰감이 깨지고, 나의 열심이 '한계'에 부딪힌 그런 상황을 직면했을 때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는 겁니다.

    지금은 어디에 있든지 그저 잘 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저와 안좋았던 부분에 대해선, 제가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제가 좀더 성숙한 아내였다면, 남편이 잘못을 했을 때 곪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초기에 바로 잡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살면서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냥 선한 아내, 복종하는 아내의 모습만 유지하다 보니 이런 지경까지 왔던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열심히 진실되게 살다보면, 상처는 아물게 돼 있고, 진리는 통하게 돼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제 입으로 안좋은 얘기를 쏟아내기보다는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하려고 합니다.

    - 굉장히 어려운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나는 서세원을 용서했다….

    ▲용서는 했지만, 다시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어쨌든 잘 살기 바라고, 더 이상은 세상을 속이거나 가족을 속이거나 그런 삶에서 벗어나 정직한 삶을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취재 = 조광형 기자
    사진 = 정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