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보국' 팽개친 중앙일보, '보수 깃발' 내리고 섹시한 '붉은 기' 펄럭홍석현 회장, 언론 기고문서 "김정일, 공단부지 제공..'영웅적 결단' 내려"
  • 사진은 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재계중진 산업시찰에서 나선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가운데).  ⓒ 연합뉴스
    ▲ 사진은 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재계중진 산업시찰에서 나선 고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가운데). ⓒ 연합뉴스

        

    나는 4·19와 5·16을 거치며 단 한번 정치가가 되려 생각한 적이 있다. 경제인의 힘의 미약함과 한계를 통감한 것도 정치가가 되려고 한 동기였다. 그러나 1년여를 숙려한 끝에 정치가로 가는 길은 단념했다. 그런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한 끝에 종합 매스컴 중앙일보를 창설하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생전 이병철 회장은 구사하기에 따라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하는 언론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그는 '마상의 총검'보다도 강한 힘을 지닌 언론을 이용해 국가와 민족에 공헌해야겠다는 일념이 강했다.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사업보국·事業報國)'는 일념을 경영철학으로 내세운 이병철 회장은 64년 동양 라디오와 TBC동양방송, 65년 중앙일보를 잇달아 창설한 뒤 언론사 경영 전체를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 일가에 일임했다. 중앙일보를 균형 감각이 잡힌, '힘 있는 언론사'로 만들기 위해 제 3자로 하여금 경영 전반을 책임지도록 한 것.

    물론 67년 3남 이건희 현 삼성회장이 홍진기 전 장관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하면서 두 집안은 '남이 아닌' 사이가 돼 버렸지만, 언론사와 기업을 형식적으로나마 분리·경영한 것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고집스러운 경영철학과 무관치 않았다. 특정 세력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는 언론, 자율적이지만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자세가 바로, 이병철 회장이 꿈꾸던 중앙일보의 이상(理想)이었다.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 뉴시스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 ⓒ 뉴시스



    ◆ '족벌언론' 선입견 벗기 위해 몸부림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창간 1주년을 앞두고 터진 '한국비료 사건'이 갈 길 바쁜 중앙일보의 발목을 잡았다. 정론직필을 내세운 중앙일보였지만, 정작 독자들은 보도 이면에 삼성이 개입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어정쩡한 보도 스탠스도 부수 확장의 걸림돌이었다.

    재계에선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던 이병철 회장이었지만 홍진기 일가(一家)에 위탁한 중앙일보 만큼은 예외였다. 60년대 후반 야심차게 출발한 '중앙일보'의 앞에는 언제나 다른 매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오래 전엔 '경향신문'이, 그 이후엔 '한국일보'가, 80년대에 들어선, '조선일보'가 1위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중앙일보'에는 항시 '만년 2등'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중앙일보는 '족벌언론'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99년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했다. 2006년에는 보광그룹과도 결별을 택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엔 변함이 없었다.

    창업주가 내세웠던 '이상'과 중앙일보의 '현실' 사이에 벌어진 거리감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중앙일보가 택한 전략은 포지셔닝의 변화였다. 초창기 '보수의 기치'를 올린 덕분에 '3대 보수일간지'에 합류한 중앙일보였지만, 언제까지나 조선일보의 그늘에 가려 있을 수만은 없었다.



  • ◆ 좌경화 충격요법..보수 '탈색' 성공?


    종합편성채널 JTBC가 개국한지 4년여가 흐른 지금, 더 이상 '중앙일보 계열사'를 보수 언론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중앙일보와 JTBC가 시도한 '충격요법'의 효과는 컸다.

    먼저 JTBC는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불러들여 삼성그룹의 '노조 무력화' 문건을 공개하고, ▲좌파 인사로 분류된 표창원, 진중권, 이철희 등을 토크쇼 주요 패널로 앉히는 파격 인사를 단행하는가하면, ▲'음모론'의 불씨를 지폈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를 스튜디오에 출연시켜 구조당국을 힐난하는 '좌편향 방송'을 강행했다.

    중앙일보는 ▲좌파 매체 한겨레와 사설 교류를 하고, ▲'반자본주의자' 신영복을 수차례 띄워주는 삐딱선을 탔다. ▲'광주사태'에 대한 탈북자 증언을 소개한 종편을 맹비난하는 독설논조를 펼친 신문도 중앙일보였다.

    자본주의의 '최대 수혜 집단'인 삼성이 세운 언론사가 거꾸로 '좌편향성 보도'를 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며 중앙일보의 논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100분 토론'의 손석희가 JTBC 보도·시사교양 부문 총괄 사장으로 취임하고,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좌파 성향'의 방송인들이 우후죽순격으로 JTBC에 출연하면서 마침내 시청자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가 달라졌다!


    "취재에 성역(聖域)이 있을 수 없다"는 손석희 사장의 보도 방침은 오래 전 창업주의 '설립정신'을 잇는 듯 했다. 정부와 여당을 서슴없이 비판하는 JTBC의 보도에 청년층은 열광했고, 한겨레-프레시안-오마이뉴스 등 이른바 좌파언론들은 "TV조선-채널A와는 현격하게 다른 방송"이라는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 ◆ '사업보국'보다 '시청률'이 우선?


    이병철 회장이 중앙일보를 창간한 목적은 오로지 '사업보국(事業報國)'에 있었다.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일념을 이루기 위해 언론사를 창설한 그는 당시 가장 믿을 만한 동지였던 홍진기 전 장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현재 중앙미디어그룹의 총수를 맡고 있는 홍석현 회장은 홍진기 전 장관의 장남이다. 부친의 대를 이어 중앙일보를 경영하고 있는 홍석현 회장은 중앙일보그룹에 '붉은 색'을 입힌 장본인이다. 손석희 사장을 영입하고 그에게 '편성 전권'을 위임한 인물도 바로 홍 회장이다.

    홍 회장은 모 기업 삼성의 치부를 정면으로 건드리면서 중앙일보의 트라우마였던 '삼성 나팔수'라는 족쇄를 벗어제꼈다. 덕분에 중앙일보는 '꽉 막힌' 보수언론이라는 선입견에서도 벗어났다. 계열사 JTBC를 젊은층이 가장 선호하는 종편 채널로 만들었다.

    그러나 중앙일보그룹의 이같은 '섹시한 변신'은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선대 회장의 '창설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실상 사기에 가까운 '다이빙벨'의 효능을 극찬한 뉴스 앵커와, 지상파 3사의 출구조사 결과를 무단 사용한 보도국, 그리고 노골적인 '성적 표현'을 남발한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에겐 어쩌면 '사업보국'이란 말보다 '시청률'이 더욱 절실한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 이종인 대표와 인터뷰한 손석희, 이 인터뷰에서 다이빙벨은 20시간 연속 잠수가 가능하다는 말이 처음 나왔다.  ⓒ JTBC
    ▲ 이종인 대표와 인터뷰한 손석희, 이 인터뷰에서 다이빙벨은 20시간 연속 잠수가 가능하다는 말이 처음 나왔다. ⓒ JTBC



    ◆ 미디어재벌로 성장..홍 회장 '맨파워'도 동반 상승


    JTBC의 지상과제가 '시청률 상승'이라면 중앙일보의 최대 숙원은 무엇일까?

    ABC인증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부수 확장도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됐다. 중앙일보의 최근 행보를 보면 내실보다 외연 확장에 더욱 주력하는 모습이다.

    드라마하우스&제이콘텐트허브, 중앙미디어큐채널, 메가박스, 허스트중앙, 중앙일보문화사업, 설앤컴퍼니, IS일간스포츠 등 계열사를 기하급수적으로 불린 중앙미디어그룹은 미디어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

    그토록 '재벌家 언론'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던 언론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재벌화'하는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는 것.

    중앙일보의 '외형적 성장'과 발맞춰 최근 도드라지게 활동의 폭을 넓히는 이가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다름 아닌, 사내에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홍석현 회장이다.

    큰 아들(홍정도 중앙미디어네트워크ㆍ중앙일보ㆍJTBC 공동대표 사장)과 작은 아들(홍정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 신사업추진단 부단장)을 그룹 전면에 내세워 '친정체제'를 구축한 홍석현 회장은 요즘 들어 중앙일보의 '맨파워'를 실감케하는 다양한 행사를 주도하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행사장에는 청와대 관계자나 여야 대표, 통일부 장관 등 '실세'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현재 한반도포럼 고문을 겸하고 있는 홍 회장은 지난해 한 대학교 강연에서 '제3의 개국'을 외치는 등 정치인이나 다름 없는 행보를 걷고 있다. 열변을 토하는 그의 강연을 듣다보면 당장이라도 선거에 출마할 기세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기고한 글(통일 한국의 출발점은 개성공단의 성공)에선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을 강하게 비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홍 회장의 화두는 최근 2~3년간 '통일'과 '북한'에 집중돼 있다. 그의 정치적 지향점도 이와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남북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이니셔티브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합니다. 북핵은 하나의 대화 목표로 삼고 대화의 조건으로 걸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꾸만 접촉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얘기하지만 통일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입니다.

    북한에 어떠한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가지 잊은 게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영웅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과 가까운 최전선 지역의 일부를 남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단부지로 제공했습니다. 그는 군부의 반대를 누르고 그런 결단을 내렸습니다.

    신뢰야말로 남북한에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신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북 모두 과거의 관행을 반드시 재고해야 하며 관계 진전의 계기를 마련할 토대를 상대편에 제시해야 합니다.

    개성은 한반도의 얽히고설킨 많은 문제들로부터 격리된 성역이었습니다. 개성공단의 그런 특별한 지위가 복원돼야 합니다. 개성과 마찬가지로 금강산도 큰 그림으로 보면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윈윈 프로젝트'입니다. 그 프로젝트를 다시 살릴 때가 됐습니다.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이 지난해 11월 29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중일 30인회 환영 리셉션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의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뉴시스
    ▲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이 지난해 11월 29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로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중일 30인회 환영 리셉션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의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뉴시스



    ◆ 중앙 "공단 폐쇄, 실효성에 대해선 의문"


    중앙일보는 11일자 사설에서 '대북 강경 대응론'을 주창한 조선·동아와는 다른 논조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중앙일보는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한 것은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정부의 논리와 고충은 이해하지만, 실효성과 적절성에 대해서는 의문"이라는 물음표를 달았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에 유입되는 연간 약 1억 달러의 현금이 사라진다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북한이라면 문제가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어 중앙일보는 "얼마간 타격은 있겠지만 정부가 기대하는 '혹독한' 제재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면서 "개성공단 폐쇄에 감동 받아 중국이 강력한 대북제재에 동참할지도 의문이고, 124개 입주 기업들로서는 심각한 손실과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에도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 카드까지 꺼내진 않았었다.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장거리 로켓 실험을 하자 공단 폐쇄 결정을 내렸다. 과연 비례적 대응에 맞는지 의문의다. 개성공단이 폐쇄됨으로써 남북 간에 남은 마지막 끈마저 사라졌다.


    중앙일보의 사설은 "북한 핵폐기를 전제한 대북정책 때문에 남북한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안보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 홍석현 회장의 강연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 ◆ 미디어오늘 "중앙 사설, 경향 논조와 비슷"


    이와 관련, 좌파 언론의 선봉에 서 있는 미디어오늘은 "개성공단 중단에 따른 아쉬움과 정부 비판 논조를 드러낸 11일자 중앙일보 사설은 '공단의 전면 중단은 그 명분과 논리적 결함 문제를 떠나 대북 제재 효과의 관점에서도 실효성이 전혀 없는 조치'라고 비판하는 경향신문의 논조와 유사하다"며 두 매체를 '같은 선상'에 올려 놓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보수 언론의 한 축으로 알려졌던 중앙일보를, 공히 좌파언론의 한 축으로 돌려 놓으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어쩌면 이같은 좌파언론의 반응이야말로 홍석현 회장이 의도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홍 회장은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얘기하지만 통일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지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며 북한과의 연대·연계가 끊어지면 안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지난해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광복 70주년 기자회견에 나선 문재인 대표는 "북한과 경제공동체를 이뤄 국민소득 5만 불을 달성하자"는 구상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남북이 통일은 안 되더라도 먼저 경제 공동체를 이룬다면, 국민소득 5만불 시대로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동북아 평화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 ◆ 그가 꿈꾸는 이상(理想)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앙일보는 선대 회장의 '보국(報國)' 이념을 바탕으로 출범했으나, 2세 경영인으로 넘어오면서 점차 '사유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통 보수 이념을 대변했던 논조는 어느새 경향신문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좌도 우도 아닌 '회색지대'를 걷고 있는 게 오늘날 중앙일보의 모습이다.

    좌경화 충격요법으로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애써온 '경영인'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내심 꿈꾸는 이상(理想)이 선대 회장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