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옥 박사 "우남의 원칙과 신념,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원동력"
  • ▲ 제61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 구국을 위한 3대 조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남정옥 박사.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제61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 구국을 위한 3대 조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남정옥 박사.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승만 대통령은 혼란스러웠던 6.25 전쟁 와중에도 국익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취한 3대 조치가 대한민국의 존속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국군작전통제권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중요한 카드로 활용한 것은 대한민국 외교의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제61회 이승만포럼이, 15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 구국을 위한 3대 조치>를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은,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기습남침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 3가지를 설명했다. 

    남정옥 박사는 당시 북한의 기습 남침이 대한민국에 있어 충격적인 치명타였고, 북한군의 전력 또한, 남한을 질적ㆍ양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 박사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은 국군에게 단 한대도 없는 전차 242대와 전투기 226대를 가지고 있었고, 병력도 국군의 두배인 20만명으로 크게 우세했다. 더구나 북한군은 중국대륙에서 항일전, 국공내전 등으로 다년간 단련된 중공군 내 한인병사 5만~6만명을 선봉에 세웠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해 준 전쟁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북한군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제갈량이 국무총리였어도, 공산군의 장총대포와 전차를 막을 수 없었을 것이고,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미리 세우지 못한 것은 미국의 군사물자가 오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승만 대통령의 말대로, 미국의 대(對) 한국정책은 소극적이었다. 소총하나 만들 수 없었던 신생국 대한민국은 북한의 남침 전부터, 미국에 군사동맹과 군사원조 등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결국 6.25전쟁이 발발했고, 미국과 유엔의 도움도 불확실한 상태.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희망을 잃지 않고,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유엔군사령관에 국군작전지휘권 이양 ▲미국의 해외망명정부 제의 결사 반대 ▲일본군 참전반대와 평화선 선포 등 훗날 국익에 도움이 될 조치들을 했다고 남정옥 박사는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만남

    남정옥 박사는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제안한 ‘통합군사령부 설치결의안’을 1950년 7월 7일 유엔안보리가 채택하면서, 유엔군사령부가 창설됐다”며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한국에서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한 전쟁 수행 권한을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회원국이 파견한 군대는 미국의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 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남정옥 박사는 “1950년 7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울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획기적 조치를 단행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대한민국을 위한 유엔의 공동 군사노력에 있어, 한국 내 또는 한국 근해에서 작전 중인 유엔의 육ㆍ해ㆍ공군 모든 부대는 귀하의 통솔 하에 있으며, 또한 귀하는 그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음에 비추어, 본인은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대한민국 육ㆍ해ㆍ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다.

    이에 맥아더 장군은 무초 대사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 작전통제권 이양에 관한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유엔군의 종국적인 승리를 확신한다”고 답신했다.


  • ▲ 대한민국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 ⓒ뉴데일리DB
    ▲ 대한민국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 ⓒ뉴데일리DB


남정옥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에 이양한 국군작전통제권은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카드로 작용했다. 

남 박사는 “미국이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을 추진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하겠다고 미국을 압박했다”며 “국군의 유엔군철수라는 ‘카드’는 나중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도 크게 한몫했다”고 말했다.


◆ “정부를 제주도로..” 무초 말에, 권총 빼든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미국에서조차 ‘해외망명정부’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 입장은 강경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프란체스카 난중일기’를 보면,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던 1950년 7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북한군이 대구 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하오. 그쪽(유엔군)에 부탁을 해 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 주시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가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말하자 이승만 대통령도 “다시는 망명정부를 만들지 않겠소. 우리 아이(병사)들과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주한 미국대사의 간절한 ‘망명정부’ 건의 역시, 단호히 거절했다. 

남정옥 박사는 “무초 대사가 제주도로 정부를 옮겨야 한다고 열을 내며 설명하던 때, 이승만 대통령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들어 적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발로 나를 쏠 것이오’라고 말해 무초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재차 이어진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망명정부’ 건의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으로부터 전해들은 워커 중장의 ‘하와이ㆍ괌 망명정부’ 건의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워커 그사람, 보기보다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 망명의 설움을 안고 하와이에서 외롭게 일본 제국주의와 싸웠던 나 이승만에게, 이제는 겨레를 이끌고 다시 그곳으로 망명하라는 것인가! 

워커장군에게 전하시오. 나 이승만은 영천이 무너져 공산군이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에 나서서 싸울 것이오. 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


  • ▲ ▲ [이승만 포럼]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연구하는 포럼으로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한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 [이승만 포럼]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연구하는 포럼으로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한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포’, ‘한국령 독도’의 시작 

    전황이 대한민국에게 매우 불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끝내 일본군을 한반도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남정옥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평소 가졌던 반일(反日) 감정에 대해 “그는 자신의 조국 대한제국이 20세기 초 일본의 무력 앞에 힘없이 붕괴되는 것을 봤고, 이를 되찾기 위해 40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항일독립운동을 한 진정한 애국투사였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남 박사는 “그는 건국 이후 혹독하다 할 만큼, 일본에 냉정하게 대했다”며 “일본을 혹독하게 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화는 적지 않게 회자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반공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대일강경노선은 미국에 있어,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1948년 10월 19일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이 그럴 자격(아시아 반공보루)을 갖추자면, 스스로 우방임을 실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 영토인 대마도와 36년간 착취한 우리 재산을 반납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특히, 남정옥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서 만큼은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도 영유권 문제”라며 “전시였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른바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발표했다”고 강조했다. 


  • ▲ ▲1952년 발표된 당시 '이승만 라인' 지도. ⓒ 건국이념보급회
    ▲ ▲1952년 발표된 당시 '이승만 라인' 지도. ⓒ 건국이념보급회

    남 박사는 “1951년 9월 대일강화조약 발효로 ‘맥아더 라인’이 철폐된 후, 일본의 난폭한 어업활동을 막기 위한 한국정부의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설명하면서 “이로써 동해산 독도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영토로 선언했음은 물론, 우리 어업권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라인’ 발표 이후, 일본이 강력 반발했고, 심지어 우방국인 미국ㆍ영국ㆍ대만까지 항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한국이 해양 상에 선을 그은 목적은 한ㆍ일 간 평화유지”라고 밝히고, 국제사회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1월 18일 ‘평화선 선포’ 2주기를 기념해 독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독도가 명백한 한국영토임을 재천명했다. 

    이에 대해 남정옥 박사는 “독도가 한국영토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국토사랑과 역사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조치가 없었다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억지부리는 일본에게 빼앗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남정옥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전쟁목표와 전쟁수행 원칙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국제무대에서 끝없이 표류했을 것”이라며 “종국에는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존재하기도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아울러 남 박사는 “6.25전쟁 뿐만 아니라, 평생을 통해 보여준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장점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확실히 구분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라며 “그 행동기준은 오로지 국가이익과 민족의 장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