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상모략

    대한민국을 세움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로가 지대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간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가득합니다. 가끔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가 언론에 보도됩니다만, 그때마다 이승만 대통령은 2% 미만의 지지율로 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는 모습이 다른 나라가 세워졌을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나 부정적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1장에서 소개한 그대로입니다만, 대한민국은 친일파와 친미 사대주의자들이 잘못 세운 나라인데, 바로 이승만이 그 원흉이라는 겁니다.
    그런 취지로 가장 지독하게 이승만을 비판한 논문으로서 송건호가 쓴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의 총론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이승만은 왕족 출신으로 체질적으로 귀족이며 반민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집권욕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야비한 인간이었으며, 그로 인해 역사에 끼쳐진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여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였고,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을 저지했으며, 농지개혁을 지주층에 유리하게 실시하여 개혁을 실패하게 만들었고, 자신과 대립한 정치세력을 탄압하여 민주정치의 싹을 잘랐습니다. 이 같은 주장대로라면 이승만은 죽어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역사의 죄인이군요. 이런 식으로 그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이야기가 40년도 더 넘게 방치되어 왔으니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가 그토록 부정적인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이 잘못 세워진 나라가 아니듯이 이승만에 대한 온갖 비난과 저주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의 중상모략이며 일종의 음모와도 같습니다. 이승만을 올바로 재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객관적 상황을 올바로 전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정치는 한마디로 ‘나라세우기’(state building)의 정치였습니다. 그 정치는 국가체제가 안정된 위에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행해지는, 토론과 조정이 가능한, 공공선택의 정치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한 나라를 세우는 데 정치원리를 자유민주주의로 할 것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독재로 할 것인가, 경제원리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공산주의 계획경제로 할 것인가를 두고 주민의 투표에 부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나라세우기’의 정치는 전쟁과 같습니다. 어느 이념의 정치세력이 승리하면 다른 이념의 정치세력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상의 전쟁이자 많은 경우 실제로 전쟁을 동반했던 것이 ‘나라세우기’의 정치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주연 배우로서 활동했던 그 역사의 무대가 평화로운 공공선택의 정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과 노선이 충돌한 살벌하기 짝이 없는 ‘나라세우기’의 정치였음을 명확히 전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개종과 자유민주주의

    ‘나라세우기’의 성공한 정치가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첫째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그에게 있어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나이 20세까지 과거시험을 위해 전통 성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그의 정신세계는 전통 성리학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재필 선생을 통해 서유럽의 사상과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이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황제의 폐위 음모에 가담한 반역죄에 걸려 1899년부터 근 6년간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됩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는 배재학당에서 들은 어느 선교사의 설교를 기억해 내곤 그의 영혼을 기독교에 의탁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정신세계에 관해 저는 많이 알지 못합니다만, 대강 다음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몸으로 홀로 선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그의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의 구원을 대리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자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종교적 구원관에서 기독교의 정신세계는 본질적으로 개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성리학의 정신세계와는 많이 다르지요. 성리학의 세계에서 인간은 부자(父子), 군신(君臣), 형제(兄弟), 붕우(朋友)와 같은 인간관계의 일환으로서만 그 존재론적 근거를 부여받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서유럽 기독교의 정신세계는 절대자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빚어지는 긴장이나 고독이나 불안을 특질로 하지요. 그러한 정신세계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나 정치적 행위와 관련하여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로 자신을 표방한다고 생각됩니다만, 여기서 그런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개종 이후 이승만의 일생은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적인 삶이었습니다. 1910년대까지 그의 정치 연설은 많은 경우 종교적인 설교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의 기독교적 정신세계는 정치가로서 그를 자유민주주의의 비타협적인 실천가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서 공산주의와의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컨대 공산당이 찬성한 신탁통치도, 미군정이 추진한 좌우합작도 그가 보기에 처음부터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권 이후 그의 통일정책인 북진통일도 그의 비타협적 반공주의의 일관된 표현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이 개입하자 미국은 휴전을 추진합니다만, 그에 대해 이승만은 완강히 저항하면서 북진통일을 추진합니다. 전쟁 이후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의회에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에도 이승만은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라도 공산주의와 대결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후진국에서 온 한 늙은 정치가의 훈수에 불쾌감을 느꼈겠습니다만, 이승만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은 이승만에게 종교적인 신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승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동시대의 다른 정치가에게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입니다. 개인주의나 자유주의가 결여된 우리의 사상적 전통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는 말이지요.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는 백성을 골고루 잘 살게 함을 정치의 최고 미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전통 성리학과 공산주의는 처음부터 일정한 친화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아마도 지식인의 대다수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것도 그 같은 정신적 전통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성리학자 출신이기도 한 이승만이 그토록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것은 무언가 특별한 설명이 요구되는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로 기독교로의 개종에서 찾고 있습니다. 앞서 저는 20세기의 한국사를 전통유교 문명과 서유럽기독교문명의 만남과 융합, 그러한 의미에서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 강렬하게 그러한 대전환을 자신의 인생사로 대변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정치적 자산

    둘째, 이승만은 철저히 현실적이며 실리적인 정치가였습니다. 중국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만, 그가 한 여러 말 가운데 가장 옳은 이야기 같습니다. 이승만은 정치의 그러한 속성을 누구보다 일찍 깨닫고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국제정치의 냉혹한 실리주의에 대해 그는 그 누구보다도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 과정을 두 눈으로 목도한 사람입니다. 주권자가 무능하거나 나약하면, 정치엘리트들의 처신이 기회주의적이면, 사회가 분열하고 타락하면, 한 나라가 어떻게 망하게 되는지를 눈물로 관찰한 사람이지요. 감옥에서 나온 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막아 볼 요량이었습니다. 참으로 사마귀가 다리를 들고 수레바퀴에 대드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무모함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최초의 실패한 외교활동에서 이승만은 국제정치가 얼마나 냉혹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이후 5년간 그는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그가 벌린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은, 그의 비판자들이 자주 지적하듯이,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럴듯한 성공을 거둔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패망한 나라의 무기력함을 그는 그 과정에서 몇 번이고 통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실패의 쓰라림이 반복되면서 그는 어떠한 명분론에도 쉽게 현혹되지 않는 매우 철저하고 현실적이며 실리적인 정치가로 성숙하였습니다.
    살벌한 ‘나라세우기’의 정치무대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의명분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믿고 끝까지 따르며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확고한 지지 세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해방공간의 정치에서 이러한 친위부대를 확보한 사람은 제가 보기에 조선공산당의 박헌영을 제외한다면 이승만뿐인 것 같습니다. 오랜 미국생활에서 돌아온 이승만이 그러한 정치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냈다는 원래부터의 명망에다 반공주의의 흔들리지 않은 원칙과 그에 입각한 대동단결을 지속적으로 호소하였던 정치기술 때문이었습니다. 대동단결은 다음 장에서 이야기할 친일파 문제에 대한 그의 정치적 처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의 정치적 입장은 단순 명료하였고 또한 강력하였습니다. 월남 동포를 포함하여 공산주의에 위협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것이지요.
    어느 연설에서 그는 지지자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죽자’하면 다 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자 ‘예’하는 대답이 우렁차게 장내에 울려 퍼졌습니다. 흥분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이승만은 대단한 연설가였습니다. 그렇지만 한갓 선동만은 아니지요. 재삼 강조합니다만 그가 발휘한 선동의 힘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입각한 것이었고, 그 점에서 이승만의 정치는 처음부터 말과 행동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이야말로 최후의 승자로서 이승만이 지녔던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농지개혁과 이승만

    《재인식》에 실린 논문 가운데 이승만의 현실주의적 정치가로서 모습을 잘 드러낸 노문의 하나로서 김일영교수의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를 들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송건호의 비난 가운데 이승만이 지주세력을 옹호하여 농지개혁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만, 김 교수의 이 논문을 읽으면 이런 비난이 사료라곤 한 조각도 읽지 않은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유언비어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에 오히려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초 1949년 3월 국회에 상정된 개혁법에서는 농민이 부담할 지가의 상환액이 평년 수확가의 300%로 정해져 있었습니다만, 이승만의 압력으로 1950년 3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에서는 150%로 낮추어져 있었습니다. 또 이승만은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기도 전에 농지분배에 박차를 가하여 법안이 통과될 당시에는 이미 대상 농지의 7~8할이 분배된 상태였습니다.
    이승만이 무엇 때문에 농지개혁에 그렇게 열심이었을까요. 가난한 소작농민을 위해서라고요. 너무 천진한 생각입니다. 어디까지나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끌어 모으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그랬을 뿐입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이미 국부(國父)였습니다. 마치 프랑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말입니다. 만약 이승만이 한줌의 무리도 안 되는 지주세력을 위한 계급정치를 펼쳤다면 그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한때 지주세력의 정당인 한민당과 우호적인 관계였습니다만, 집권 후 자신의 대중정치를 위해 그들을 버렸습니다. 이승만은 그렇게 철저히 현실주의적 정치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대한민국이 살아났던 것이죠.
    전장에서 설명한대로 농지개혁의 역사적 의의는 ‘국민만들기’의 첫걸음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침공해 왔을 때 이미 자기 소유의 토지를 확보한 농민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사흘간 군사적 행동을 중지한 것은 남한 농민들의 봉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그런 일은 조짐조차 없었습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의 재해석

    《재인식》에 실린 김일영 교수의 또 하나의 논문, <전시 정치의 재조명ㅡ부산 정치파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ㅡ>를 읽고 난 저의 소감은 씨름판에서 뒤집기 기술을 봤을 때처럼 통쾌한 것이었습니다. 이 논문이 다룬 사건은 1952년 6월 임시수도 부산에 서 있었던 이른바 발췌개헌을 둘러싼 정치파동입니다. 발췌개헌으로 대통령 선거는 종전의 국회 간선에서 국민 직선의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일반적으로 이를 계기로 국회의 견제를 벗어난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점은 어김없는 사실입니다만, 김 교수는 사건의 뒷면에 숨겨져 온 의미를 들추어냄으로써 이 정치파동이 이승만이 강인하게 추구해 온 ‘나라세우기’ 정치의 일환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이승만 정부는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 당하는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국회의 반이승만 세력은 이 참에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여 이승만을 밀어내고 장면을 수상으로 앉힐 책략을 꾸미면서 미국과 군부의 양해까지 얻어냅니다. 미국은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휴전협상에 비협조적인 이승만의 제거에 관심을 갖지요. 그렇지만 이승만이 보기에 그의 반대자들은 미국의 정책에 너무나 양순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집권할 경우 휴전에 따른 영구분단은 피할 길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에 그는 헌병부대를 동원하여 사실상 친위 쿠데타를 감행합니다. 일부 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같은 이승만의 강인한 공세에 밀려 미국도 결국 양보합니다. 이승만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결국 미국의 주선으로 이승만과 반대파가 타협하여 대통령의 국민직선제와 정부형태의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은 겉보기에는 이승만과 국회의 반대파 간에 집권을 둘러싼 거친 충돌이었지만, 그것을 넘어 전쟁정책과 통일정책 나아가 동아시아정책 전반을 둘러싸고 미국과 대립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한판 승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칼을 물고 뜀을 뛰다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을 기다리는 반공포로들. ⓒ 뉴데일리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을 기다리는 반공포로들. ⓒ 뉴데일리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 이념과 그의 현실주의적 정치기술이 그의 재임기간에 남긴 최대의 업적은 1954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습니다만, 미국은 한국과 같이 약소한 나라와 군사동맹을 체결함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미국을 군사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승만은 동서냉전의 전초기지로서 한반도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를 미국에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외교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했습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그는 휴전을 반대했으며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미국은 그의 부르짖음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 수만 명을 기습적으로 석방했기 때문이지요.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승만이 미국의 코를 세게 비튼 셈입니다. 그런 식의 무모한 외교를 당시 미국사람들은 “칼을 입에 물고 뜀을 뛰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드디어 미국은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서울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둘 실용적인 계산에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합니다. 그에 따라 이승만은 대륙의 공산주의 국제세력으로부터, 또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를 일본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위할 가장 확실한 군사적 방호막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미동맹을 체결하기까지 이승만이 펼친 능수능란한 외교에 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차상철 교수의 <이승만과 1950년대의 한미 동맹>이라는 논문이 좋은 참고가 됩니다. 저도 이 논문을 통해 위와 같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문명개화파의 적자(嫡子)

    물론 이승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권위주의적이었다는 도덕적 비판에는 동의할 만한 점도 있습니다. 그가 재임 마지막 3~4년간데 범한 정치적 실수는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에다 소득 40~60달러의 가난한 소농이고, 사회는 이념적으로 분열되어 있고,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지극히 열악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체제를 나라의 기초 이념으로 확고히 하고, 농지개혁을 통해 통합적인 국민을 창출하고, 사회주의 국제세력의 공세인 한국전쟁을 성공적으로 방위하고, 나아가 자유진영의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과 군사동맹을 이끌어 내는 등, ‘나라세우기’의 정치에서 그가 후대에 남긴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입니다. 196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의 번영은 이승만이 강인하게 추구했던 ‘나라세우기’ 정치의 성과를 전제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승만은 그를 배제하고서는 대한민국의 출발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나라세우기’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는 그를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정중하게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람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까지 그 얼굴이 사진으로 전해지는 역사교과서에 왜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은 없습니까. 워낙 근거 없는 중상모략의 비난이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서부터 횡행하고 있어 그 점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군요.
     마지막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긴 안목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을 어떻게 재평가해야 좋을까라는 전장의 말미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1876년 개항 이후 서유럽과 일본을 통해 전래된 근대 사상과 문물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해 온 문명개화파였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을 통해 갑신정변, 갑오경장, 독립협회로 이어진 제1세대의 개화파를 계승한 사람이지요. 뒤이은 식민지기를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선에 참여했습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국내에서 일제의 차별과 억압을 받으면서 근대를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근대적 인간으로 성장해 온 수많은 사람들이 문명개화파의 계승자였습니다. 그들이 일제의 패망과 미국체제의 성립이라는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체제의 일대 전환을 맞아 한반도 남부에 세운 근대국가가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요컨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을 주요 대리인으로 한 개화기 이래의 문명개화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