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백범기념관(白凡紀念館, kim koo museum &library)의 규모는 부지면적 5552평, 연건평 2292평에 달한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0년 6월 26일 기공해 2002년 10월22일 개관했다. 이 기념관은 『자주 · 민주 · 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분투하신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의 삶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됐다』고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기념관 건립 취지문을 읽어 보면 해방 이후 김구의 행적을 좌익들 입맛에 맞게 왜곡(歪曲)한 표현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선생은 단정(단독정부 수립)이 민족분단(民族分斷)과 대외예속(對外隸屬)을 심화시킬 것을 훤히 내다보면서 그 참여를 단호히 거부하였던 것이니, 아아 당대에는 그렇게 매도당했던 선생의 예지가 50여년이 지난 지금에사 세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칭송을 받게 되었다.』고 해 놓았다. 
     
    「대한민국의 단독정부 수립이 민족분단과 대외예속을 심화시킬 것」운운한 부분은 좌파들이 대한민국을 헐뜯을 때마다 나오는 거짓선동이다. 
     
    민족분단을 초래하는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은 북한이었다. 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臨時)인민위원회는 소위 토지개혁, 산업국유화, 주민사상 개조운동 등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을 수행했다. 김일성 역시 같은 해 2월20일 북조선임시(臨時)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 연설에서 『2월8일 북조선임시(臨時)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우리나라 력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중앙정권기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46년 11월 북한에선 도·시·군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됐고, 47년 2월에는 국회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회의(人民會議)를 구성했으며, 행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가 만들어졌다.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대한민국의 5.10선거는 1948년에 치러졌다. 사실상의(de facto) 북한정부가 수립된 지 2년3개월 후였다. 이승만 박사의 단독정부 수립발언인 「정읍발언」이 나온 것도 1946년 6월4일. 북조선임시(臨時)인민위원회가 구성된 지 4개월 후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북한의 공산화로 인한 민족분단에 맞서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민족통합을 이루려는 자위조치였다. 이를 가리켜 『민족분단, 대외예속』이라 비난하는 것은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말년의 김구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은 통찰력의 부족이자 그의 뜨거운 민족애(民族愛)를 가리는 오점(汚點)이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는 부지면적 5552평, 연건평 2292평에 달하는 백범기념관을 건립하고 거대한 김구 동상을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독립운동가 김구를 기리는 행적이 아니다. 절체절명의 민족적 위기 앞에 남한지역 주민들의 공산당 지배를 저지한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외면과 부정이다. GDP 세계 15위, 삶의 질 세계 25위라는 멋진 나라를 만들어 낸 이승만 박사에 대해선 단 1평짜리 기념관도 세워져있지 않다. 50년대 남산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 동상은 명륜동 폐가에 버려져 있다.
     
    인간이 완벽할 수 있을까? 공(功)이 있으면 과(過)도 있다. 백범(白凡)은 해방공간에서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의 업적으로 거대한 기념관과 동상이 세워졌다. 우남(雩南) 역시 말년에 실정(失政)했으나 항일운동과 건국의 공로는 5천년 민족사에 길이 남을 위업(偉業)이다. 
     
    건국의 아버지를 폄훼(貶毁)하는 것은 건국의 폄훼로 이어지고, 이것은 국민의 정신을 통합(統合)이 아닌 분열(分裂)로 몰고 간다. 대한민국이 자유통일과 북한구원을 하기 위한 선결과제는 국민통합, 건국에 대한 긍정, 그리고 그 이전 이승만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추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