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도사를 대신해>

                                   "욕먹을 각오 하라우"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2016/5/8)

  • *아래 글은 추도사를 대신해, 2016년 1월에 발간된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  미수(米壽) 문집
    <신문인 방우영>에 실었던 글
    임*

     

     

       "욕먹을 각오 하라우" 이 나지막하고 짤막한, 그러면서도 고도로 농축된 이 말씀 한 마디가 나의 언론생활 전체를 지배했다. 1981년 연초에 조선일보사 논설위원실 막내로 처음 출근해 보니 거긴 딱히 형식적으로 꽉 짜인 절차 같은 건 없었다. 오후 2시에 논설회의는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선배, 윗분들이 지나가는 듯 슬쩍 던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들이 퍽 중요했다.

       어느 날은 그런 선문답 한 마디조차 없이 하루 종일 "이제 나오십니까?" 하는 인사 외엔 도무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일이라곤 전혀 없이 지나가는 적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그 무렵의 조선일보사 논설위원실엔 나를 합쳐 '무려 7명‘의 근무자'밖엔 없었는데, 거기다 또 모든 선배들이 다 과묵한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선우휘 논설고문과 조덕송 논설주간은 방이 따로 있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논설위원실의 양호민, 김성두, 이규태 선생들은 책상 위에 둘러친 ‘책의 장막’에 파묻혀 대면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적막강산의 산사(山寺) 같은 데서나마 그래도 어쩌다가 툭하고 날아오는 선우휘 고문, 조덕송 주간, 양호민 선생 등 대선배들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은 젊은 나에겐 정신을 확 깨쳐주는 죽비(竹篦) 같은 가르침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말씀들이었다. "사설은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 없어" "너무 단정을 하면 어려워져..." "젊잖게 한 마디 해야..." 명쾌하되 지나침은 금물이라는 가르침이지만 그저 슬쩍한 번 던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막내인 나에겐 그 말씀들 하나하나가 다 천금의 무게로 다가왔다. 때는 저 무서운 신군부 시대, 쿠데타 단계에서 체육관 선거를 거쳐 5공으로 넘어가던 살얼음판이었다. 장영자 사건, 3허(許) 씨들 문제 등 권력형 부패사건과 정권 내부의 권력투쟁도 일어났고, 불완전하지만 야당 활동도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판에서 사설을 쓴다는 건 그야말로 웃고 우는 표정을 동시에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이었다. 아니,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불가능 속에서나마 “신문 사설은 비판하는 것이다”라는 원칙은 또 살려야만 했다. 연금술 중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철학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만들어내는 수준의 난(難) 코스였다. 그러나 어쩌랴, 쇼는 진행돼야만 했고, 신문 사설란은 백지로 나갈 순 없었다. 그래서 쓰고 또 썼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격주로 '류근일 칼럼'도 썼다.

       하루는 선우휘 고문이 역시 지나가는 말투로 슬쩍 던지는 것이었다. “여기선 별 말은 안 해, 하지만 다 보고 있지...” 가슴이 조려왔다. “별 말은 안 하지만 다 보고 있다...” 참 무서운 말씀이었다. 막내로서, 신참자로서 어떤 시선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이고 있는 상황.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써야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어느 날인가 방우영 사장께서 논설위원실에 들르셨다. 전혀 관료적이지 않고 비공식적인 ‘그저 한 번 둘러보는’ 형식이었지만, 신참자의 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북 출신들은 여기서 정치할 생각일랑 말아야 해. 여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땅이야. 이북 출신들은 그 대신 노래를 잘 부른다든가 해서 출세해야지...” 그러나 이건 오픈 게임이었다. 본론은 그 다음에 나왔다. “그저 써야지, 자꾸 써야 해, 그래서 화제를 불러일으켜야 해” 이거였다. 신문은 그날그날 아침 식탁에 화제 거리를 갖다 주는 것. 그래서 이야기 거리를 발굴하고 그걸 ‘맛있게’ 요리해서 안방에 배달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글은 쉽게 써야 해. 술술 읽혀야 해, 어려우면 안 돼.” 마침내 지침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대목은 얼마 후에 나왔다.

       그날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무얼 읽고 있었던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던지 누가 들어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방우영 사장이셨다. 의자 하나를 끌어 오시더니 옆에 안으셨다. 이런 저런 말씀이 있으시더니 이윽고 ‘보석’을 하나 꺼내 보이시는 것이었다. “욕먹을 각오 하라우” 욕먹을 각오! 그거였다. 이제 알짜가 나온 것이다. 논설 쓰는 자는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화살 맞을 각오로 살아야 한다는 함축이었다, 전장(戰場)에 임하는 전사(戰士)에게 검(劍) 한 자루가 안겨진 것이다.

       그로부터 2004년에 주필 직을 마지막으로 조선일보사에서 퇴직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나는 그 칼을 열심히 쓰고 또 썼다. 말도 많았고, 좋다 소리, 나쁘다 소리, 시원하다 소리, 고약하다 소리, 잘 한다 소리, 못 한다 소리, 온갖 구설들이 다 따랐다. 그러나 부러짐 없이, 유감없이 쓰고 또 썼다. 욕먹을 각오로, 욕먹어가면서. 그러면서 두고두고 생각해 보았다. 방우영 사장께서 하신 “욕먹을 각오 하라우”란 경구(警句)야말로 비판적 매체와 비판적 언론인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건이라는 것을. 이건 어떤 언론학 교과서도 가쳐 주지 않는 저널리즘의 첫 장이자 마지막 장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언론인은 완전히 성숙한 다음부터 글을 쓴다기보다는, 글을 써가면서 성숙해 간다는 게 맞을 성 싶다. 왜냐 하면 처음 얼마 동안은 머뭇거림과 헷갈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걸려들기 쉬운 게 ‘눈치 보기’의 덫이다. 글 쓰는 사람의 소매 자락을 평생 붙들고 늘어지는 게 다름 아닌 “이 눈치 저 눈치 두루 살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안팎의 금기(禁忌) 의식이다. 상황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만용을 부리면 쓸 데 없이 되잡히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그건 낭비다. 그렇다고 상황을 너무 소심하게 살펴도 죽도 밥도 아닌 글을 쓸 우려가 있다. 그래서 정답은 뭔가? 이 눈치 저 눈치 살피지 말되, 정제(精製)되고 적중(的中)한 글을 써야 한다. 방우영 회장의 “욕먹을 각오 하라우”는 그 둘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나는 해석했다.

      이 기준에 100% 맞는 글을 쓰기엔 내 역량과 기량은 너무 부족했다. 다만 그 기준에 꾸준히 접근해야겠다는 마음가짐만은 늘 상기하면서 글을 썼다. 욕먹을 각오를 하기 위해선 우선 어떤 이슈라도 절대 피해선 안 되었다. 신군부 시대, 5공 전기(前期), 민주화 욕구가 치솟던 5공 후기(後期), 그리고 1987년의 민주화 전후(前後)를 통해 이 이슈를 과연 글로 다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양자택일이 항상 언론과 언론인 앞에 던져졌었다.

       권위주의 시절엔 어떤 이슈를 논설이나 칼럼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때가 많았다. 실제로 “그건 다루지 말아주십시오”라는 요구가 모처에서 오곤 했으니까. 그러나 조선일보는 썼다. 그리고 쓰고 나면 곧잘 이런 후일담을 들곤 했다. “이제 와서 얘긴데, 실은 그 글이 나간 직후 ‘거기’ 높은 친구가 내 방에 왔었어. 류근일을 데려 갈까요 하더라고. 그래 내 그랬지. ‘여보시오, 거 쓸 데 없는 소리 좀 그만 하시오’라고. 그냥 알아만 두라고...” 알아만 두되, 쫄지 말고 욕먹을 각오를 계속 하라는 지침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냥 알아만 두라”는 정신은 김대중 정권이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 류근일 주간, 조갑제 기자 셋을 자르라고 요구했을 때도 시종여일하게 살아있었다. 사주 측은 물론 그 요구를 단호히 사절했고 방상훈 사장은 구속기소(起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필진들은 사주 측으로부터 그 어떤 ‘논조의 변화나 약화’를 직간접으로 암시받은 바가 전혀 없다. 사장이 기소되는 바로 그 날짜에도 조선일보 필진의 사설, 칼럼은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이건 나의 생생한 고백이자 증언이다.

      방우영 사장 시절 조선일보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방우영 저널리즘’이 적중한 결과였다. ‘방우영 저널리즘’의 핵심을 나보고 이야기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욕먹을 각오 하라우”와도 결국은 일맥상통하는 말이지만 달리 말하면, 지면 어느 곳(어느 이슈)에 뇌관을 설치하고, 그걸 꽝하고 터뜨리는 순간 에너지의 빛살들이 지면 전체로 확 퍼지는 지면(紙面)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마디로 ‘에너지의 폭발과 확산’ 모델이라고 하면 어떨지. 이와 반대되는 지면이 있다면 그건 ‘모델 하우스 광고지’ 같은 지면일 성 싶다.

       신문도 그렇고 방송도 그렇겠지만, 언론 행위는 결국은 퍼스낼리티(인격체)가 하는 것이다. 객관적 준칙은 따라야겠지만, 작품이란 기계가 일률적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즉 인격, 가치관, 시각(視覺), 개성, 취향이 빚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보이는 대로’의 언론만이 아니라 (인격체로서 대상을) ‘보는 언론’이다. “욕먹을 각오 하라우”는 결국 ‘보는 언론’을 만들기 위한 경구였던 셈이다. 보도와 논평은 물론 다르다. 사설과 칼럼도 다르다. 보도는 객관적 준칙에 충실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논설은 단연 ‘보는 언론’이다. 여기엔 ‘욕먹을 각오한’ 필자의 결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우영 저널리즘’은 교과서 속 이론이 아니라 여러 시대를 겪으면서 그것을 꿰뚫어 온 역사적 실존의 호흡소리다. 일제 강점기, 해방공간, 좌우갈등, 대한민국 '네이션 빌딩', 6. 25 남침전쟁,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를 불과 반세기만에 주파한 한국적 실존의 가장 민감한 감각, 그리고 한국인들이 반세기 동안 겪어 온 집단적 체험의 가장 첨예한 감각을 ‘방우영 저널리즘’은 반영하고 있다. 이 감각은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현재형이다. 미수(米壽)란 연륜은 ‘방우영 저널리즘’의 만개(滿開)일 뿐이고 ‘방우영 기자정신’은 여전히 내일 아침 조간신문들의 승부를 계속 긴장감 있게 지켜볼 따름일 것이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