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새누리당은 정체성이 있나

     
  •   새누리당이 총선 참패의 충격으로 마치 촉수 잘린 곤충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무얼 해야 할지, 동쪽이 어디고 서쪽이 어딘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조차 모르는
    의식의 혼미와 정체성 혼란에 빠져 있다.
 
 때를 같이해 '보수 유권자들이 새누리당에 왜 등을 돌렸나?'를 놓고
정치권 안의 친박(親朴)·비박(非朴)은 물론, 정치권 밖의 친박·비박 오피니언들도 날 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친박 여론은 김무성-유승민의 '배신의 정치'와 '도장 들고 튀기'가 민심 이반을 불렀다고 주장한다. 비박 여론은 청와대를 업은 이한구-최경환의 갑(甲)질이 지지층 이탈을 더 불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쪽 다 '집권당의 자해(自害)'란 결과에선 공동의 책임이 있다.

새누리당을 외면한 보수 유권자들도 이젠 좀 난감해할지 모르겠다.
 
 한심한 건 친박도 비박도, 4·13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여태 총선 참패에 대한 자성(自省)·자괴(自愧)·자책(自責)은커녕,
계속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대위원장에 손학규, 한화갑을 모셔 오자" "김병준, 최장집에게서 들어보자"라며
홍몽(鴻濛·몽롱함) 가운데서 중구난방, 횡설수설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사들은 물론 유능한 인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새누리당에 표를 주어 온 전통적 지지 진영엔 '모셔올 분'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인가?
정히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김대중 민주당-노무현 열린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으로 갈 일이지 굳이 이회창 당-이명박 당-박근혜 당에 들어가 보수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 했나?

 선거 땐 보수 시늉을 해 보수표를 걷어 먹고, 당선되고 나선
"나도 실은 보수가 아니라 제법 진보라오"라는 식이라면,
그건 '위계(僞計)에 의한 표 사취(詐取)' 아닌가?
 
  하긴 상당수 새누리당 의원은 이미 자유주의를 넘어 '비(非)시장적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으로 흘렀다고 한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와 이승수 연구원은 '19대 국회 의원입법 공동 발의 네트워크 분석'이란 논문에서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의 보수 정체성을 살리는 덴 전혀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야당의 좌파적 정체성의 확장에 기여하는 입법 활동에 적극 협력한 의원 24명이
새누리당 지도부의 공천을 받아(2명은 무소속 당선을 통해) 20대 국회에 다시 등장했다"고 했다. 그리고 "일부 새누리당 의원은, 좌파성이 너무 강해 정부-당 지도부-보수 진영이 격렬하게 반대한 야당 법안에 공동 발의자로 나섰다"고 했다.
유승민 의원 등이 발의한 '사회적경제체제법'이 그랬다.
 
 외국의 보수 정당 안에도 물론 주류 보수와는 다른, 리버럴한 흐름이 흔히 있다.
새누리당 안에도 그런 흐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본말이 뒤집혀
"우리 안에는 주류 그룹도, 주류 노선도, 주류 사부(師父)도 더 이상 없다. 이젠 자유주의-보수주의를 밟고 넘어 진보 이미지, 양극화론 이미지, 최장집-김병준 이미지로 가자"라는 정도라면
그건 해체(解體)주의랄 수밖에 없다. 영혼 없는, 혼쭐 빠져버린, 그래서 다른 영(靈)이 씐 좀비(되살아난 시체)의 당이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새누리당은 그래서 자기들의 주된 정체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해 보여야 한다.
새누리당은 '반(反)전체주의-안보 정통주의-시장 자유주의-선별 복지'(A)인가,
 아니면 안철수처럼 '경제는 중도-진보, 안보는 보수'(B)인가,
아니면 '경제도 중도-진보, 안보도 햇볕'(C)인가?
지금까지는 (A)이면서 때때로 (B)로 갔다 왔다 했다.
그러나 20대 국회에선 비박을 중심으로 (B)와 (C)가 (A)에 노선 투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이 노선 투쟁이 친박-비박의 권력 투쟁과 맞물려 2017 대선 때까지
어떤 부침(浮沈)을 그려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상은 자유다. 친박-비박은 더 이상 '동지'가 아니기에,
양쪽이 아예 자유-보수와 중도-진보로 갈라서는 건 어떤가?
안철수와 천정배-정동영도 영 궁합이 맞지 않는다.
제2 헤쳐 모여는 어떨지? 말도 안 된다고?
그러면 친노(親盧) 비노(非盧)가 갈라선 것만 말 되고,
새누리당 안 자유-보수와 '강남 좌파'가 갈라서는 건 말이 안 된다?
친박과 유승민 신드롬이 '한 지붕 별거'하는 건 그럼 천생연분이라 해야 할까?
 
 지난 총선 때 새누리당을 혼낸 자유-민주-보수 유권자 파워가 다시 작동해야 한다.
저만큼 피멍 들게 쥐어박았으면 이제는 새누리당이 자유-민주-보수 유권자들의 쓸모 있는 정치 기기(器機)로 리사이클링 될 수 있게 견인해야 한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