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포럼, 지독한 계파싸움-이승만 박사를 미워한 '언론'이 만들어 낸 거짓의 역사 밝혀‥
  • ▲ 지난 21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열린 제64회 이승만 포럼에는 이동욱 기자가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지난 21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열린 제64회 이승만 포럼에는 이동욱 기자가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난 21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기념관에서 제64회 이승만 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에서는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가 ‘건국 대통령과 거짓 선지자들의 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우리 시대에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언론’인들이 기사를 통해 만든, 우남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거짓의 역사'를 돌아봤다.

    이동욱 기자는 “우리가 예수를 판 유다의 자손처럼 되지는 않을까 불편하다”는 고백을 했다.

    이동욱 기자는 “요즘은 다들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절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물질적 풍요는 이승만 대통령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덕분”이라며 강연을 시작했다.

    이동욱 기자는 21년 전 자신이 이승만 대통령 망명 속에 담긴 진실을 취재하며 알게 된 ‘이승만 박사 하와이 망명’의 진실에 대해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떠나기 전 4.19의거와 하야, 여든이 넘은 노인의 쓸쓸한 비행길에 깔린 언론의 ‘오보’와 ‘오해’에 초점을 맞춰 관련 내용을 풀었다.

    ◆대한민국 언론의 現 주소 


    이동욱 기자는 언론이 만든 ‘왜곡된 보도’가 그대로 대한민국 ‘역사’가 되는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예로 들며, 대한민국 언론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진 공정·객관·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동욱 기자는 “개인 소득이 500배 이상 증가한 유래 없는 나라가 되면서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데 성공했고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크게 올랐지만, 정신적 측면에서 ‘지식인들의 생산성’ 은 500배 증가했는지 물어야한다”고 밝혔다. 

    이동욱 기자는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는 유별나게 정확하고 꼼꼼하게 기록됐기 때문”이라며 “조선 지식인들의 치열함을 세계인이 인정했다”고 평했다. 

    이동욱 기자는 “태조 이성계가 사냥에 가서 말을 타고 노루를 쫒다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는데 당시 이성계는 툴툴 털고 일어나서 옆 시종에게 ‘사관에게는 비밀로 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면서 “하지만 이성계가 다음날 실록을 열어보니 ‘왕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는데 사관에게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라고 적어놨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선 486년에 비하면 짧다고 할 70년 대한민국의 기록문화 유산은 어떤 수준인지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오늘날 ‘언론’을 통해 사실과 다르지만 현대사로 굳어져 간 대한민국 역사의 항목들로 ▲5.16혁명이 군사 쿠데타로 바뀜 ▲KAL 858기 폭파범 김현의 가짜설 ▲제주 4.3사건 ▲장준하 암살설 등을 언급하면서, 이는 언론이 오보로 만들어낸 역사라고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특히 “공산당이 싫어요”로 알려진 반공 소년 이승복 어린이 기사 조작설과 이승만을 ‘망명자’로 만들어버린 당시 언론을 비판했다. 

    이동욱 기자는 “사흘에 한 번 꼴로 북한 무력도발 기사가 나오던 시절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북한군의 대검에 입이 찢겨 죽은 이승복 사건은 당시 북한군에 36군데 칼에 찔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승복의 형 ‘이학관’ 씨의 증언으로 알려진 사건”이라며 언론이 ‘조작설’을 제기하며 사건의 진실이 묻히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이승복 사건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지키는 사건이고, 이승복 기념관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지키는 기념관이지만 1993년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격하됐다”고 밝혔다. 

    이동욱 기자에 따르면 2014년 당시 이승복 기념관의 한 해 예산은 1억 700만 원. 반면 같은 해 광주 5.18기념관 예산은 27억 원, 제주 4.3평화 기념관 50억 원이었다고 한다. 

  • ▲ 이동욱 기자는 1960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은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지적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이동욱 기자는 1960년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은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지적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하와이 ‘여행길’이 ‘망명’이 된 오해의 역사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난 뒤 이화장을 떠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잠깐 하와이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지만 언론에서 이를 '망명'이라 못 박은 ‘오보’로 인해 결국 돌아오지 못했던 잘못된 역사 문제도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대한민국이 전체적으로 중심축을 잡고 돌아오기에는 난망한 것처럼 보인다”며 “그 시초는 바로 이승만의 망명 오보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이 독재자로 알려지고 나면 독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선 앞뒤 정황을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종이가 모자를 정도로 설명을 해야 한다”면서 “엉터리 역사는 참 바로잡기가 힘들다”고 한탄했다. 

    그는 히틀러 부관이자 유명한 선동가로 알려진 괴벨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승만의 하와이 휴가’가 ‘망명’이 돼버린 거짓발단의 역사를 살폈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
     


    이동욱 기자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이었다고 한다. 

    이동욱 기자는 “건국 대통령을 망명시켜버린 신문”이라며 “경향신문이 이승만을 쫒아가서 망명했다고 특종을 터트리고 지금까지도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동욱 기자는 “그렇다면 왜 경향신문이 이승만을 쫒아가서 망명하지도 않았는데 망명했다고 속였을까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승만 정부와 ‘경향신문’의 깊은 감정의 골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과 이승만 정부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감정의 ‘골’을 만들어 냈으며, 결국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악감정’이 국부를 추방시킨 오보 기사를 만들었다고 평했다. 

    이동욱 기자는 “건국 대통령의 망명은 경향신문의 오보로 인해 역사화 돼버린 사건”이라며 “사건의 실상을 보려면 4.19가 일어나기 약 1년 전인 1959년 초의 상황을 봐야한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1959년 1월부터 4월까지 넉 달 동안 5건에 이르는 허위기사를 게재했고, 당시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보도해 공분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동욱 기자는 “당시 야당지인 경향신문이 정부 여당에 대한 오보기사를 연달아 내보내며 결국 ‘이승만 정부’로부터 강제 폐간 명령을 받았다”며 “2008년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 '피디수첩'에서 방송했던 광우병 선동과 같은 일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은 발행이 중단되자 법원에 ‘행정처분취소 청구소송 및 가처분 신청’을 냈다”면서 “당시 서울 고등법원이 가처분 신청 받아들이면서 경향신문은 신문을 계속 발행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묵과할 수 없다’며 행정처분을 취소하고 무기 발행 정지를 내렸다”면서 “경향신문 입장에서는 '이제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또 얻어맞은 꼴이 됐다”고 했다. 

    이동욱 기자는 “결국 경향신문과 이승만 대통령은 원수지간이 될 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당시 경향신문의 상황을 설명했다.
     

  • ▲ 이동욱 기자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언론'이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던 시대상을 설명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이동욱 기자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언론'이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던 시대상을 설명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우남 ‘이승만’을 미워했던 두 계파의 투쟁


    이동욱 기자는 이날 김인서 목사가 남긴 기록을 엮은 책 <망명 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을 언급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행이 망명으로 날조될 수밖에 없던 다른 이유도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은 국내에 있던 일종의 ‘당파 싸움’ 때문에 권력자에 대한 비난, 비판 기사밖에 나올 수 없었던 시절이라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당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체제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로, 지식인조차 서로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지 못한 시대였다”며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즉 '한 사람이 두명의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는 명분에 함몰돼, 명분 가지고 싸우기 좋아하는 조선 시대의 당파성이 꼬리를 물고 살아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김인서 목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우남 이승만 박사 계열, 도산 안창호 선생 계열, 인촌 김성수 선생 계열의 세 파벌이 주류였는데 이들 간의 극한 대립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다. 

    김인서 목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 계열이 민주당 구파가 돼 ‘경향신문’과 손을 잡았고, 인촌 김성수 계열이 민주당 신파로 ‘동아일보’와 한 편이 됐다고 했다. 

    즉 당파 싸움에서 자유당 ‘이승만’은 두 당파와는 자연스레 ‘적’이 됐다는 것이다.

    당시 도산 안창호 계열은 “이승만은 반역의 원흉” “사기꾼으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이승만” “이승만은 독립 운동도 건국도 자기가 대통령 해먹으려 했다”고 비판했는데, 이런 비판이 도산 계열을 지지하는 ‘경향신문’을 통해 드러났을 것이고, 자연스레 국민들 사고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게 이동욱 기자의 판단이었다. 

    이동욱 기자는 “인촌 계열이 동아일보에 기고를 한 적이 있는데 ‘똥은 비단보에 싸서 하와이에 보내고 이승만의 부하 똥 구더기들만 재판받고 있다’고 썼다”며 “동아일보는 이승만을 향해 독재자, 폭군, 깡패 정치가 등 12년의 재임기간 동안 매일 공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동아일보는) 그런 공격을 하는 것이 마치 민주투사인양, 자신들이 가장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길 바랐다”며 “결국 민주당의 두 파벌(신파와 구파)이 사실 오늘날 대한민국 기록의 역사를 망친 주범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대한민국 언론과 지식인들의 과오 


    이동욱 기자는 대한민국 지식인과 언론이 만들어낸 과오 중 하나로 3.15부정선거와 4.19 호헌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꼽았다.

    이동욱 기자는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풀이했다. 

    그는 “최초의 여당인 자유당이 단 한 번도 정권 이양의 경험이 없는 상태 즉 창당 순간부터 입에 금수저를 물고 있었다”며 “선거 패배를 앞두고 자유당은 선거 당락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보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동욱 기자는 “선거 패배 자체가 완전히 모든 것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자유당’의 불안함이 결국 부정선거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해방 후 지식인들이 엉겁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조선의 유교적 가치를 통해 배운 당파적 사고 방식이 남아있던 지식인들에게는 ‘공존’이 어려웠다는 평가였다. 

    이동욱 기자는 당시 지식인들은 시대적 한계에 따른 ‘무지’로 인해 부정선거를 하긴 했지만, 이후 ‘언론’이 만들어낸 4.19혁명에 대한 평가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은 ‘4.19 자유민주혁명의 완성선언’을 했어야 했다”며 “4.19는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를 선택하고 시민과의 화해도 이루어진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의 심각성을 깨닫고 “불의에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라고 했다. 시위 도중 부상당한 청년을 찾아가서는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동욱 기자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헌정 질서를 되돌려 달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 하야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4월 26일, 시위를 하던 시민들은 대통령의 거처인 이화장에 찾아가 “노후에 편안하시라” 는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또한 이화장 담장 너머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놀러들 오시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과 이승만 대통령의 관계와 달리 언론인과 반정부 지식인들은 ‘개인 이승만’에 대한 증오를 멈추지 않았고 ,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독재자’요 ‘망명자’로 만들어갔다는 지적이었다. 

    이동욱 기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언론인들이 이승만 정부에 가진 불만과 계파 싸움을 지속하던 사람들의 적대감이 결국 ‘이승만은 망명갈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대통령 제도를 12년째 체험 중이던 당시 국민들은 망명이란 단어도 몰랐다”며 “언론들이 자꾸 망명, 망명, 이야기를 꺼내면서 사람들도 실제 벌어지는 일과 다른 허상을 믿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실상과 다른 그림자가 신문에 기록되며 거짓 선지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역사로 둔갑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 행’은 건강이 나쁜 이승만 대통령의 요양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을 증거로 제시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예배를 봤다. 대통령 건강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몇 주일 쉬고 오는 게 좋지 않으냐는 측근의 제의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또 “우리는 2주일 내지 한 달 정도 하와이를 다녀올 수 있는 짐을 챙겼다”고 기록했다. 

    이동국 기자는 “실제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살던 이화장에 중요한 자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며 “망명가는 사람이 자신의 중요한 자료를 가져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망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욱 기자는 “망명은 자동사로 '내가 가는 것'을 뜻한다”며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이 원한 게 아니라 휴양을 갔는데 못 돌아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와이행은 망명이 아니라 유폐였다”며 “유폐는 타동사인데 우리 국민과 언론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건국 대통령을 유폐해놓고 ‘망명했다’, ‘도망갔다’라고 기술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 ▲ 1960년 5월 29일, 동아일보는 조간에 '이박사부처 해외 망명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 1960년 5월 29일, 동아일보는 조간에 '이박사부처 해외 망명설'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이동욱 기자는 1994년 2월 당시 하와이 총영사였던 오중정 씨와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했던 이야기를 공개했다. 

    오중정 前하와이 총영사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휴가오듯 하와이를 들렀지만 당시 이승만의 빈자리를 채운 ‘허정’ 내각이 이 대통령의 귀국을 거부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이동욱 기자가 오중정 총영사에게 “이 박사께서 하와이 도착했을 때 살아생전 그 분이 귀국 못할 것을 알았던 사람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아무도 몰랐다. 우리도 그 후에 무척 노력했지만 허사였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이승만 망명’을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 구파이자 인촌 계열로 분류된 동아일보 이웅희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 부부의 여행 준비를 ‘망명 준비’로 보고 1960년 5월 29일 조간 1면에 “이 박사 부처 해외 망명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이동욱 기자는 “설(說)은 주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쓰이는데 동아일보는 확인 되지 않은 소문을 1면 톱 기사로 내놨다”며 “밑에는 ‘맥 美대사가 알선?’ 이라고 물음표를 붙여놔 마치 뭔가가 있는 것처럼 해 놨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또 “기사에 ‘조국서 여생 보낼 결심’이라고 써놓기도 했는데 사실상 기사는 ‘들은 바 없다’, ‘근거 없다’고 증언하는 내용이었다”며 “신문이 뿌려진 후 경쟁 언론사들도 이 박사 내외가 미국으로,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를 띄웠다”고 했다.

    이동욱 기자는 “우리나라 언론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며 “결국 망명이 기정사실화 됐다”고 한탄했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 ‘망명설'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일부 기사 내용을 발췌했다.

    “이 박사의 해외망명설이 유력하게 전파되자 일부 학생을 비롯한 젊은 지식층의 많은 인사들은 이 박사가 평안하게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게 될 것을 희망한다는 견해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정계 측에서는 現 혁명단계에 있어 지배체제의 영도자요 舊 지배체제의 영도자요 상징인 이 박사의 일시적 또는 영구적인 해외망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이박사가 그의 집권당시 심어놓은 많은 요소에 대해서 국민으로부터 최종적인 추궁을 받게 될 대상인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아일보 1960년 5월 29일자 조간 1면 톱기사-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떠나던 날인 5월 29일의 실상을 다시 되짚었다. 

    프란체스코 여사의 회고록을 보면, “5월 29일 상오 7시, 우리는 이화장을 출발했다. 떠나기에 앞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돌아올테니 집을 잘 봐줘’라고 부탁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했다며 대서특필 한다. 

    이동욱 기자는 그 발단에는 ‘경향신문’의 오보 기사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 숙직실에서 근무를 하던 윤양중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 데 ‘내일 이화장쪽 동태를 잘 지켜보면 큰 기사거리가 있을 것이오’라는 전화였다”며 “당시 그는 수습 3년차 사회부 소속으로 국방부를 맡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윤양중 기자는 자신의 분야가 아니었지만 동아일보가 신문 1면에 내보낸 ‘이승만 박사의 망명설’을 떠올리고 취재를 시작한다. 

    이승만 박사의 ‘망명’을 확신한 윤양중 기자와 경향신문 사진기자 둘은 새벽 6시부터 이회장 앞을 취재하며 망명으로 생각을 굳혀갔다고 한다.
     

  •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에 '이박사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의 기사로 이승만 해외 휴양은 '망명'이 됐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에 '이박사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게재했다. 이동욱 기자는 '경향신문'의 기사로 이승만 해외 휴양은 '망명'이 됐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윤양중 기자는 이승만 박사 내외가 타있는 비행기에서 프란체스카에게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고 여사는 "불명예스럽게 하야하고 나와서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동욱 기자는 “속 뜻은 ‘나이든 남편 건강 위해 요양하러 나갑니다. 무슨 심정이 좋겠습니까’라는 뜻이었지 망명을 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동욱 기자는 “윤양중 기자가 당시 ‘또 하실 말씀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프란체스코 여사는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아이 러브 코리아’라고 했다”며 “경향신문 기자는 ‘이제 망명을 떠나는 구나 그래도 한국을 사랑하는 구나’라고 해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도 ‘조용히 가게 내버려두게, 그대로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며 “이것도 잠시 쉬게 해달라는 이야기였는데 (경향신문 기자는) ‘몰래 가게 해달라’고 오해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이동국 기자는 “‘망명’을 확신했던 기자의 취재가 결국 ‘이승만 박사 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기사로 나왔다”며 “경향신문은 당시 전체 4페이지 중 마지막 페이지인 광고만 빼고 3면 전체를 망명기사로 다뤘다”고 전했다. 

    당시 경향신문을 보면 2면에는 이승만 박사 내외의 표정을 잔뜩 담고, 제목에는 ‘주인 잃은 이화장 싸늘하고 빈 무덤 같아’, ‘책상 위엔 펼쳐 놓은 성경 한 권만’, ‘저 개 좀 봐 저것만 남았군’, ‘온돌방에는 파리채만 뒹굴어’ 등 모든 곳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을 믿게끔 보도하고 있었다.
     

  •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 2페이지에 하와이로 떠나는 이박사 부부의 모습을 담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 1960년 5월 29일 경향신문은 석간 2페이지에 하와이로 떠나는 이박사 부부의 모습을 담았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이동욱 기자는 “종이컵 하나를 놓고도 옆에서 보는 사람과 위에서 보는 사람의 시각이 다르다”며 “이승만 박사가 떠나는 과정만 보고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이야기하다 결국 망명이란 허상을 만들어 냈다”고 지적했다.

    이동욱 기자는 “1960년 대한민국 언론사는 일간지가 85개, 주간지 376개, 월간지 200개, 통신까지 886개가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며 “언론사들이 일거에 이승만 망명을 보도하고 사기꾼 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세월호 사건 당시에도 현장조사를 한 적이 없는 언론들이 (대통령을) 욕하는 경쟁에 나섰다”며 “지금 배가 산으로 가고 있는 세월호 같이 대한민국의 거짓 선지자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이승만의 망명”이라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의 ‘이승만 망명’ 취재, 어떤 문제가 있었나?


    이동욱 기자는 2013년 2월 이승만 하와이 출국길을 취재한 윤양중 기자를 만나 ‘이승만 망명’기사를 썼던 당시에 대해 소상히 물었다.

    이동욱 기자는 “대선배 기자라는 점과 그의 인생 최고의 업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힘들었다”면서 “그래도 윤양중 기자에게 ‘그날 김포공항 갔을 때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망명 가십니까?라고 물어봤냐’고 질문했다”고 밝혔다. 

    이동욱 기자는 “윤양중 씨에게 돌아온 대답은 ‘차마 그렇게는 못 물어 보겠더라구요....’이 한마디였다”고 전했다. 

    이동욱 기자는 “지금 망명 가시는 겁니까 라고 확인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며 “윤양중은 망명이라고 확신하고 취재를 했고, 모든 지식인들이 다 잘못 보도했다”고 밝혔다.


  • ▲ 이동욱 기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잊은 대한민국이 "유다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닌지 불편하다"고 고백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이동욱 기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잊은 대한민국이 "유다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닌지 불편하다"고 고백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가?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하나님 저는 너무나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게 하소서"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을 가리켜 “구십 평생을 내가 아닌 민족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이라며 “독립운동을 했을 때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오신 분이 맨 마지막에 ‘너무 늙고 지쳤습니다’라고 한 것은 정말 진심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와이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양자로 들인 이인수 박사에게 “항상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잘 알아야 한다”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 삼아서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리 국민들이)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동욱 기자는 이를 두고 “건국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마지막 유언이었다”며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는 것은 눈앞에 있는 이익을 떠나, 진영 논리를 떠나서 진실을 찾아내야 하는 것을 뜻한다”라고 해석했다. 

    그는 “왕께서 적지 말라고 하셨다까지 적고 적지 말라고 화를 내셨다까지 적었던 조선왕조실록 기록한 지식인들의 정신의 엄정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동욱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승만 박사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마라(갈라디아서 5장 1절)"을 소개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는 앞에 그리스도 대신 ‘이승만 박사’로 바꾼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이동욱 기자가 본 대한민국의 현실은 건국 대통령을 잊은 '유다의 자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