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논쟁 대한민국 건국 때부터… 오늘날 일부 좌파 대한민국 부정해선 안돼"
  • 서희경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센터 정치학 박사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서희경 경희대학교 공공거버넌스센터 정치학 박사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건국이념보급회가 이승만 대통령 서거 51주년을 맞아 지난 19일 제 65회 이승만포럼을 열었다.

    이날 서울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는 서희경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센터 정치학 박사가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공화주의 연원'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펼쳤다.

    포럼에서는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공화주의, 우리 헌법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서희경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역사관, 역사교과서, 건국절, 광복절까지 좌·우가 다양한 논쟁을 펼쳐지고 있다"면서 "이 출발에는 대한민국 건국, 임시정부의 문제가 있으며 이는 단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상당한 역사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깊은 고민을 해왔다"며 강의를 시작했다.

    이날 서희경 교수의 강의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문제제기 ▲대한민국 정통성과 건국헌법 전문 ▲헌법제정과정에서의 대한임정 논의 ▲민주공화주의 연원과 계승으로 진행됐다.

    서희경 교수는 "헌법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통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에 따라 변해왔다"면서 "1948년 헌법에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라고 쓰여있지만 1987년 헌법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쓰여있다. 오늘의 강의는 '1948년 헌법에 대한임시정부가 없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는 헌법 조문 차이 넘어 한국 근현대사 이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서희경 교수는 "1946년 해방이후 3.1절 기념식이 좌우로 분리되어 개최됐다. 이는 국민 사상에 큰 영향을 주는 사건이었다. 1946년 기념식에서는 괜찮았지만 1년 뒤 1947년 기념식에서는 남대문에서 좌우가 충돌하기도 했다. 이후 충돌 때문에 기념식이 개최될 수 없었던 역사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서희경 교수는 1946년 따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있었던 이승만의 개회사와 김구의 경축사를 비교했다.

    다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6년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낭독한 개회사의 일부다.

    이 날에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려는 가장 어려운 결심을 정한 것이며, 이 결심으로 한족이 민혼을 찾게 되었고, 그 후에  무한한 고초와 고통 중에서, 국혼을 견고케 하며, 그 결과 우리의 원대한 장래가 앞에 전개됩니다. 국내에서 악전고투하던 당신네와 해외의 망명으로 독립에 종사하던 우리들이 태극기 밑에서 자유일을 자유로 경축하기는 27년 동안 오늘이 처음입니다.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연합국 승전한 결과이니 (중략) 미군장병의 승리한 사실은 우리가 영구히 기념할 것입니다.


    서희경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은 민혼을 찾은 것은 주권자로서의 '민의 탄생'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역사적 고난을 거쳐 앞으로 새로운 국가가 세워질 것이라고 인식한 것이며 대한민국 역사적 정통성을 3.1운동에서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같은날 3.1절 기념식에서 김 구가 낭독한 경축사다.

    삼일운동의 위대한 의의는 실로 그 통일성에 있는 것입니다. 지역의 동서가 없었고, 계급의 상하가 없었고 종교, 사상 모든 국한된 입장과 태도를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의 독립과 자유를 찾자는 불덩어리와 같은 일념에서 이 운동을 일관했습니다.


    서희경 교수는 "김 구의 발언은 계급의 관점에서 3.1운동을 인식하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1운동의 '독립과 자유' 정신을 강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강연하는 서희경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강연하는 서희경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서희경 교수는 "같은 날 박헌영은 '3.1운동을 과대평가하여 우익 반동파에서 3.1운동을 완전한 일 대 혁명이라고 보며, 이것으로써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과대히 고조시킨다. 이 운동은 조선민족의 반제국주의적 부루조아 민주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이며, 토지개혁의 구호가 하나도 나서지 아니한 인민해방투쟁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그들은 3.1 운동을 불완전한 혁명으로 보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서희경 교수는 "당시 좌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부정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만을 지지하라는 법은 없다'면서 정통성을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찾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희경 교수는 "반면 같은 때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만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의 정치적 행정적 주권과 영토적 통일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비밀국제협약도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약속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해 달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던 좌파 세력과 달리 이승만 대통령은 '정읍발언'을 통해 국가 수립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 서희경 교수의 설명이다. 서희경 교수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서희경 교수는 해방 후 남로당 활동자의 증언도 함께 제시했다.

    당시 남로당 측근의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박갑동씨는 1991년 발표한 '통곡의 언덕에서'를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나는 해방일보에서 미국 양국의 제의 내용을 분석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원으로 미국보다 소련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양측의 제의를 비교할 때, 미국측은 미소공동위에 의해 새로운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금까지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 의도가 보인 데 비해, 소련측은 그와 정반대였다. 남북의 동질성이나 통일과는 관계없이 소련의 제도를 그대로 북조선에 옮기려는 조급한 의도가 보였다.

    -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中' (1991)


    이후 계속된 냉전과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실패에도 김구와 이승만은 다른 입장을 보였다는 것이 서희경 교수의 설명이다.

    이승만, <국민의회 주석직 유임을 거부하는 성명> (1947.9.16)

    나는 남한만으로라도 총선거를 행하야 국회를 세워 이 국권회복의 토대가 생겨서 남북통일을 영도할 수 있을 유일한 방식으로 믿는 터이므로 누구나 이 주의와 위반되시는 이가 있다면 나는 합동만을 위하야 이 주의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내가 총선거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을 영영 나누자는 것이 아니오,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서 국제상에 발언권을 얻어 우리의 힘으로 통일을 촉성할 문로를 열자는 것이며, 만일 이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지마는 아직 다른 방식이 없는 경우에는 이것이 유일한 방식이니, 전 민족이 다합심해서 이것을 촉진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2.11)

    나의 유일한 염원을 삼천만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 뿐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련다.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삼팔선을 싸고도는 원귀(怨鬼)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것도 같았다.  


    서희경 교수는 "김구는 '대한민국의 독립일에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라며 대한민국을 부정하기도 했다"면서 "당시 대한임정의 상징인 김구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한 임정의 법통성은 명시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한반도에서는 '민족통일'과 '자유민주주의국가'사이에서 팽팽한 갈등이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희경 교수는 "이후 헌법 전문 수정에서도 좌·우는 대립을 펼쳤다"면서 "결론적으로 건국헌법 전문은 대한임정의 법통성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대한임정이 3.1운동에 의해 건립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인지가 확실히 명기되지 않았다. 이는 정치세력간의 타협의 산물, 민족과 국가, 독립과 건국 등의 위태로운 공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1948년 7월 7일 제27차 회의에서 최종 가결된 수정안

    “유구한 역사의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다음은 이승만 대통령의 헌법 전문에 관한 당시 입장이다.

    내 생각은 총강 전의 전문(에) 우리의 국시, 국체가 어떻다 하는 것이 표시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것은 (…) ‘우리는 민주국 공화체이다’하는 것을 쓴 것이 있습니다. 독립선포 전문 기미년 때 선포한 것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 후 정부가 상해로 갔던 남경을 갔던 그 동안에도 이것은 독재제가 아니라 민주정권이다 하는 것을 쓴 것이 있습니다. 이 정신은 벌서 35년 전에 세계에 공포하고 내세운 것입니다. (…) 조선에 와서도 미국은 민주주의 원칙에 임하여 자기네가 세워주겠다고 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우리 헌법에 작정할 생각이 있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 민주주의라는 오늘에 있어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싸워가지고 입때 진력해 오던 것이라 하는 것은 우리와 이후의 우리 동포들이 알도록,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 이것이 나의 요청이며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1948. 7.1 헌법제2독회


    서희경 교수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원리인 민주공화주의가 어떤 역사를 거쳐 우리 한민족의 정치적 삶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는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면서 "어떻게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이행해서 '민주국 공화체'를 선포할 수 있었는지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희경 교수는 "3.1운동은 한국 민주공화주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이는 대한민국 건국사의 시원이며 대한민국 정체성의 원천"이라고 3.1 운동을 정의했다.

  • 강연하는 서희경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강연하는 서희경 교수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서희경 교수는 "민주공화제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는 1898년 만민공동회 이래, 반전을 거듭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서 공식화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서 교수는 "일부 좌파진영 또는 민족주의자들은 대한 임정을 지지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올바른 상식이자 합리적인 판단이고, 역사의 정의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이는 민족과 국가를 평면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며 민족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희경 교수는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공간에서 대한임정의 정치적 행로 검토, 북한정권의 수립과정,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한다"면서 "결국 역사의 이념과 정치의 현실을 함께 고려하는 양가적 이해가 필요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강연의 말미에서 서희경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승만은 민주국의 건국과 계승 문제를 ‘공식적·법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신적·정치사적’ 측면으로도 접근함으로써 매우 유연하게 건국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우리가 지금 건설하는 민주국은 탄생한지 아직 1년이 못되었으나, 사실은 3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민주국은 해방 후 미군정의 힘으로 성립된 것은 아닙니다” (이승만, 1949년 3.1절 기념사, 동아일보 1949/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