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받은 죄수 2명, 끝까지 인도 요구
  • ▲ 1978년 북한이 억류된 한국 외교관 송환 협상을 하면서 故신영복 前성공회대 교수를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신용복 교수 홈페이지 캡쳐
    ▲ 1978년 북한이 억류된 한국 외교관 송환 협상을 하면서 故신영복 前성공회대 교수를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신용복 교수 홈페이지 캡쳐


    1975년 베트남이 패망하면서 월맹 정부에 억류됐던 한국 외교관 3명의 석방 협상 과정에서 북한 측이 끝까지 ‘신영복’ 교수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재미 언론인 안치용 씨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 한국 외교부가 작성한 비밀문서 내용을 공개했다. 안치용 씨가 입수한 문서는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회담’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베트남이 패망한 지 3년 뒤인 1978년 7월부터 월맹 정부에 억류된 한국 외교관 3명의 석방과 관련해 북한과 협상을 했다고 한다. 이때 북한 측이 당시 한국 정부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금돼 있던 故신영복 교수를 보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자국민 보호원칙’에 따라 신영복을 북한에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안치용 씨는 해당 문서를 분석한 결과 남북한은 1978년 7월 준비 회담을 시작으로, 11월 21일 월맹 정부가 억류한 한국 외교관 1명과 한국 내 ‘북한 혁명가’ 7명의 교환에 합의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북한이 9명의 이름이 적힌 ‘인도 대상자 명단’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故신영복 前성공회대 교수, 이재학 씨 등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이 한국 정부에 ‘신병 인도’를 요청한 사람은 12월 11일까지 21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13명이 이미 사형 집행된 것으로 밝혀지자 북한 측은 1979년 2월 초에 다시 13명의 ‘인도 대상자’ 명단을 한국 정부에 보내왔다고 한다. 당시 북한 측은 회담 과정에서 남파 간첩들의 생사확인과 함께 1963년 사형당한 간첩 ‘황태성’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이 “보내라”고 요구한 사람은 모두 34명.

  • ▲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가 공개한 당시 외교부 비밀문서의 일부. 아래 북한 측이 "보내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의 이름이 보인다. ⓒ'시크릿 오브 코리아' 블로그 캡쳐
    ▲ 재미언론인 안치용 씨가 공개한 당시 외교부 비밀문서의 일부. 아래 북한 측이 "보내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의 이름이 보인다. ⓒ'시크릿 오브 코리아' 블로그 캡쳐

    안치용 씨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협상 과정에서 북한 측은 ‘인도 대상자’ 명단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보내라고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라 해도 ‘인도적 문제’를 이유로 한국 국민은 절대 인도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북한은 1979년 4월 28일 한국 정부와의 비공식 접촉을 통해 “한국 출신이라도 비인도적 문제를 초래하지 않을 사람이 8명”이라고 밝히며, 이들을 포함한 11명의 명단을 제시하고, 한국 정부에 “이 8명을 포함해 10명만이라도 보내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안치용 씨가 한국 외교부의 비밀문서를 통해 파악한 결과 북한이 “반드시 데려가겠다”고 한 사람은 강대희, 노성집, 한영식, 강신오, 임병욱, 진낙현, 신영복, 이재학 등이었다고 한다.

    안치용 씨는 “만약 그때 한국 정부가 신영복 교수를 지켜주지 않고 북한으로 보내 버렸다면 1978년부터 2016년까지 신 교수는 자유민주 체제 하의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안치용 씨가 주목한 故신영복 前성공회대 교수는 1941년 8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1963년 서울대 경제학과, 1965년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의를 맡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故신영복 교수는 1988년 전향서를 쓴 뒤 20년 만에 특별 가석방 됐고, 이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과 같은 책을 써서 유명해졌고, 성공회대 교수가 됐다.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시절이었던 2006년 ‘처음처럼’ 등의 글자를 써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도 했다. 성공회대에서는 2006년 말 정년퇴임 했다.

    이후 다양한 ‘사회활동’을 벌이다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았고, 2016년 1월 16일 사망했다.

    故신영복 교수가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사람 가운데는 한명숙 前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