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과 함께하는 선진화: 실천방안
  • 대자연과 함께하는 착한 선진화 실천방안
    문화유산 – 선진화의 길

                                      이 배 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

  • 이배용 한국선진화포럼 특별위원장이 제105차 월례토론회에서 주제를 발표하고 있다.(2016.7.28)
    ▲ 이배용 한국선진화포럼 특별위원장이 제105차 월례토론회에서 주제를 발표하고 있다.(2016.7.28)


    1. 자연에 대한 도전과 순응

              目察秋毫之末
              耳不聞雷霆之聲
              耳調玉石之聲  
              目不見泰山之高            
                                -淮南子 俶眞訓篇-

      눈으로는 가을 동물의 털끝이 가늘어지는 것을 볼 줄 알면서
    귀로는 우뢰의 큰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愚)는 범하지 않는가?
    귀로는 옥과 돌 소리가 다름을 들을 수 있어도
    눈으로는 태산이 높은 것은 보지 못하는 우는 범하지 않는가?
    라는 내용으로 자연의 섭리를 제대로 인식하여 균형 잡힌 조화의 지혜를 갖추어야 함을 일깨운 것이다. 회남자 숙진훈(淮南子 俶眞訓)에 나오는 자연현상의 준엄함과 인간의 편협된 안목을
    경고하는 목소리다. BC120년경인 한나라 초기에 백과전서로
    회남왕(淮南王) 유안(BC17~BC122)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시작한다.
    때로는 엄청난 재앙의 시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의 순리를 겸허히 받아들여 조화의 지혜를 배우기도 하였다. 대자연은 하모니이고 질서이며 조화이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일일이 여기저기 사람의 손으로만 가꾸어진 것이 아니라 심으면 스스로 자리를 잡고 때로는 릴레이로 지키기도 한다. 또한 꽃은 늘 주인공으로 있기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피고 지고 봄꽃이 지면 여름꽃이 나오고 저마다 주인공 자리를 내놓으면서 릴레이로 피어난다. 나무도 꽃도 말이 없으나 마음은 있다.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를 인간보다도 더 잘 알고 역사를 지켜왔다. 대자연의 언어는 경이롭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마음 속에 자연을 잃었다. 자연은 인성교육의 시작이다.

     바로 인간의 역사는 문화형성의 과정이다.
    인간이 자연의 힘에 도전하고 자연이 주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서 문화는 형성되었다.
    자연에 대한 도전을 통해 인류인간은 ‘비문화’의 영역을 줄이고 ‘문명’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과 자연이 상호작용하는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처음에 인간은 공포와 신비의 대상으로 자연을 대하였으나 점차 자연을 개발하여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 조선왕국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축물. 북악산 기슭에 안긴 경복궁 경회루(자료사진)
    ▲ 조선왕국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축물. 북악산 기슭에 안긴 경복궁 경회루(자료사진)


     이 새로운 자연관은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활동영역을 확대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르네상스 이래로 세계는 공간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되기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근대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으로 인류사회의 물질적 부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인간생활의 안락함은 크게 향상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사회의 부는 증대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속화 되었다.

     앞으로 정보통신, 생명공학, 우주공항,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생활의 혁명적이며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은 틀림없다. 반면에 과학과 기술의 고도의 발전으로 초래되는 환경의 불균형과 생태계의 파괴, 비인간주의적 요소가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는 21세기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제 현대 과학 기술 혁명이 초래한 휴머니즘의 상실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 이 방법의 탐구와 관련하여 인문학의 전통이 어떻게 회복되는가, 휴머니즘이 어떻게 교육에 접목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사를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를 통해 보면, 인문 정신은 항상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서양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인문 정신을 부활시켜 근대로 가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가장 최근에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IT기술문화의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인문학 및 인문정신을 강조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인문정신은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풍부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인문정신을 멀리 서양에서만 찾지 않고, 한국 역사 속에서 찾는 지혜와 태도가 필요하다.
    한국의 고유사상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문정신이 기저에 있다.
    하늘을 경외롭게 여기고 대지에 대한 숭고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겸허한 자세가 늘 한국 역사문화 속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어느 일화에 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밭에 콩을 심는데 할아버지는 한 구멍에 세 알씩 넣었다.
    그랬더니 손자가 왜 한 알만 넣지, 세 알씩 넣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한 알은
    하늘에 나는 새가 먹고, 또 한 알은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가 먹고, 마지막 하나는 우리 사람들이 먹자고 하였다. 바로 이 세상에는 인간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섭리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달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 우리 선현들이 쌓아온 인문정신이다. 

     한국 역사 속에는 전쟁도 있었고 시련도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로, 갈등은 상생으로, 좌절은 도약으로, 경쟁은 열정으로, 반목과 분열은 화해로 승화시킨 힘도 인문정신에 담겨져 있다. 단군의 홍익인간, 불교의 화쟁사상을 기본으로 한 이타행, 유교문화의 역지사지, 배려의 도덕관과 실학의 실용정신, 인간주의 정신이 한국인의 공동체적인 끈끈한 유대를 다져온 것이다.

     이제 물질만능, 과학화 시대에 한국은 세계문화를 리드하는 국가로 부상해야 한다.
    문화리더국가는 문화적 향유를 통해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져 행복감이 증진되고 문화를 통해 세계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국가를 뜻한다. 궁극적으로 인류 평화를 위해 물리적으로, 외형적으로 힘이 있는 나라나 힘이 약한 나라도 문화로 희망을 열고 함께 손잡고 가는 따뜻한 동행의 길을 진정으로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문화에도 자연이 함께 있을 때 더욱 의미가 크다. 

  •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자료사진)
    ▲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자료사진)

    2. 자연과 함께한 문화유산

    1) 사대문(四大門)과 성곽

    전통시대 문화유산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건축을 조성하였다.
    1392년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여 서울을 디자인할 때도 항상 자연과 함께 조화를 고려하여 궁궐과 관아를 건축하였다.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전국적인 이동이나 통치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지역이다. 또한 지형상 겹으로 둘러싼 산들이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바깥으로는 북한산, 관악산, 아차산, 덕양산이 둘러싸고 있다. 안으로도 서울은 북쪽에 백악산(白岳山), 남쪽에 목멱산(木覓山), 동쪽에 타락산(酡酪山), 서쪽에 인왕산(仁王山)의 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이다.

    북한산에서 갈라져 내려온 백악산이 서울을 품고 있으며, 백악에서 동쪽으로 응봉을 거쳐 타락산을 이루고, 백악의 서편으로는 인왕산을 이루었으며, 앞에는 목멱산이 안산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백악과 응봉, 인왕, 목멱산에서 발원한 물들은 흘러들어 서울 한복판에서 줄기를 이루어 청계천이 되었고, 이는 서울의 내수(內水)가 된다. 청계천은 중랑천과 합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고,
    한강은 목멱산을 끼고 서울을 반 바퀴 휘감아 돌아 황해로 흘러들어 서울의 외수(外水)가 된다. 한강으로 인해 서울은 육로와 수로 교통의 요지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서울은 일찍부터 주목받아서 백제의 초기 수도로서, 고대에는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주도권 쟁탈의 중심지가 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을 보완하는 남경(南京)으로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서울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수도로 정해지면서부터였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후 천도(遷都)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였으며, 1394년(태조 3) 서울 곧 한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조성하는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 궁궐과 관아를 짓고, 종묘, 사직을 건설하였으며, 새로운 도읍, 한성부를 다른 지역과 구분하는 성곽을 쌓고 이 성곽을 통과하는 4대문과 4소문을 조성하였다. 또한 왕실 및 관아, 도성 사람들에게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시전(市廛)을 건설하고, 교육과 선현 봉사를 위해 학교를 지었다.

    한편, 현존하는 도성의 문 중 유일하게 조선 초부터 소실되지 않고 자리를 지켜온 숭례문의 누각이 몇 년 전 문화재에 대한 인식 부재로 훼손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건축물을 그 형체로서만 인식하고 시대정신을 반영한 우리 조상의 얼이 새겨진 민족의 귀중한 유산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무지함의 소치이다.

    문화재에 시대정신과 자연에 대한 소통과 존중의 정신이 배어 있다는 점은 4대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유교 이념에 기반 한 사회체제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도성에 사는 사람들과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도 자연을 기억하며 유교 윤리에 바탕한 심성과 도덕성을 갖추기를 기대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을 반영하여 도성을 출입하는 문의 이름을 지었다.

  • 흥인지문(동대문)과 성곽. 멀리 남산이 보인다.(자료사진)
    ▲ 흥인지문(동대문)과 성곽. 멀리 남산이 보인다.(자료사진)


     4대문의 명칭이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은 유교의 5상(常)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그런데 인의예지신의 인간의 이치인 5상의 원리는 자연의 이치인 목(木), 금(金), 화(火), 수(水), 토(土)의 5행(五行)의 이치와 일치한다.
    즉 나무(木)는 가지를 뻗고 이파리가 무성하게 퍼지면서 그늘도 되고 쉼터도 된다. 바로 사람 마음의 인(仁)도 자기 속으로 숨어드는 사랑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이타행이다.
    쇠 금(金)은 칼이나 가위 등을 만드는 분명하게 자르는 것이다. 바로 사람 마음에 의(義), 정의로움, 의리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불 화(火)는 모든 것을 환하게 밝힘으로써 질서가 분간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礼)인 것이다.
    물 수(水)는 지(智)로 연결되며 앎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물의 원리가 낮은 곳으로, 더 넓은 곳을 향해 흘러가듯이 배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포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흙 토(土)는 모든 것의 기본으로 바로 사람 관계에서도 중심은 믿음(信)인 것이다.

    바로 이 사대문의 명칭도 자연과 함께하는 도덕적 기준에서 세워진 것이다.

    한편, 서울 한복판에는 조선 초부터 종루(鐘樓)를 설치하여 종을 걸어두고 이 종을 쳐 도성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 종루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단층의 종각(鐘閣)을 지었다. 이 종각에 고종은 1895년 보신각(普信閣)이라고 사액하였다. 5상 중 하나인 신(信)을 따서 종각의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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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문화유산 종묘.(자료사진)
    ▲ 세계문화유산 종묘.(자료사진)


    2) 궁궐과 종묘사직

    경복궁은 한양 천도 직후(1395년) 완공된 조선 최초의 궁궐이다.
    조선 전기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궁궐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궁궐이었다.
    그래서 정궁(正宮) 또는 법궁(法宮)이라 한다.
    그리고 경복궁의 배치나 구조에는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서의 위엄과 함께 백성과 나라를 위한 정치를 지향하는 유교적인 통치철학이 반영되어 있다. 경복궁은 뒤에 북악산을 의지하고 남에서 북으로 일직선으로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868년(고종 5)에 이르러서야 중건되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열강의 침략 속에서 경복궁은 조선 전기에 누리던 법궁으로서 지위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였다. 특히 일본인의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이후에는 1897년 10얼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선의 중심지는 덕수궁으로 이동하였다.

  • 경복궁 근정전의 야경.(자료사진)
    ▲ 경복궁 근정전의 야경.(자료사진)


    창덕궁은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졌다. 창경궁은 1482년(성종 13) 과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 거처하던 수강궁을 당시 대비였던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수리․확장하여 완성하였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마찬가지로 소실되었다. 그런데 전후에 조선 전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중건되어 조선 후기 중심 궁궐로 이용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으면서 왕실 가족들의 처소로 이용되는 등 주로 창덕궁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다. 경복궁이 소실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 조선의 중심은 경복궁이었다. 따라서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이 두 궁궐을 함께 일러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다.

    창덕궁과 창경궁에는 조선 후기 왕실과 정치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창덕궁은 뒤에 응봉자락이 동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전각들의 배치를 응봉 기슭에 맞추어 옆으로 가면서 배치하였다.
    창덕궁의 후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단순히 왕들의 휴식처나 놀이터가 아니다. 국정을 구상하고 왕자들의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갖추는 훈련장이고 독서실이고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체험의 장이다. 창덕궁 맨 끝자락 옥류천 뒤에는 2평 남짓 논과 초가집이 있다. 임금이 왕자들과 함께 백성들의 농사짓는 고달픔과 수고로움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벼를 심고 추수한 후에는 작은 수확물이라도 백성들에게 나누고 볏짚으로 지붕을 얽은 것이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백성들과의 소통과 배려, 화합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고대부터 도시를 만드는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가 좌묘우사, 즉, 종묘는 왼쪽에 사직은 오른쪽에 배치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조선에서도 이 원칙을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배치하였다.
    종묘는 동쪽에 낙산 밑에 세워진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었다.
    종묘의 주요 건물에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정전에는 태조와 현 왕의 4대조에 해당하는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4대가 넘어가면 정전 서편의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4대가 넘어도 공적이 뛰어난 왕들은 계속 정전에 모셨기 때문에 정전의 규모는 세월이 지나면서 늘어나 현재 현실(玄室)만 해도 19칸이 된다.

    사직의 사직단은 서쪽에 인왕산 밑에 구성되어 있는데 두 개의 네모난 제단을 볼 수 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으로 이 중 하나는 국토안보의 신인 ‘사(社)’에게, 다른 하나는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 드리는 제단이다. 이 공간은 통치자로서 백성들에 대한 외침에서 보호하는 안보와 민생의 풍요를 기원하던 공간이었다.

  •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40기중의 하나, 7대왕 세조를 모신 광릉의 석물들.
    ▲ 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릉40기중의 하나, 7대왕 세조를 모신 광릉의 석물들.

     3) 왕릉

      올해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지 7주년이 되었다.
    그동안 조선왕릉이 세계적 유산이 되면서 국민적 자긍심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울지역에 8기, 경기도 일원에 32기, 총 40기가 18개 지역으로 나누어 분포되어 있는데 연속유산으로서 위용이 돋보인다 하겠다.

     조선왕릉은 조상을 기리는 한국의 효 사상의 상징이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정통성의 표상이다. 풍수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건축 및 자연과 어우러지는 경이로운 조경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으며 한편 지금까지 이어져 행해지고 있는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또한 조선왕릉 전체를 정부에서 통합적으로 보존관리하고 있는 점도 높이 평가 되었다.

     조선왕릉의 특성은 첫째, 유교와 동양 전통사상의 조화 속에서 발전해 온 역사적, 정신적 유산이라는 점이다. 조선왕릉은 유교와 동양전통사상에 따라 입지 선정이나 공간의 구성, 배치 등이 이루어졌고 조선왕조 기간 동안 조선왕릉은 당대 최고의 예술과 기술을 집약하여 조성되었으며 그 조형방식에서 역사적 변화를 담고 있는 유산이다.
     둘째, 자연 친화적인 독특한 장묘, 전통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타 유교문화권 왕릉들과는 다른 조선왕조 특유의 세계관, 종교관 및 자연관에 의해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장묘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다.
     셋째, 인류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잘 보여주는 능원조성과 기록문화의 보고이다. 5백년 이상 지속하여 만들어진 조선왕릉을 통해 당대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 자연관을 압축적으로 살펴 볼 수 있으며, 조선왕릉과 관련된 여러 기록 문헌들을 통해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 기술과 사상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넷째, 조상숭배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이다.
    조선왕릉 제례문화는 조상숭배의 전통에 기인하며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온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조선왕릉의 제례는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종묘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섯째,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루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시대를 뛰어넘는 공존의 조화를 통해 역사적 교훈과 시대정신의 숭고함을 느끼게 하고 이를 현대적 가치로 재창조하여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지속가능한 중심공간으로서 의미가 크다. “지속가능”이란 해당 유산이 현 세대에게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에게도 생태 및 문화적 관점에서 그 특성이 유지, 보존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선정 배경이 되는 유산가치(OUV)는 18개 지역에서 형성된 40기의 왕릉으로 구성된 점과 1408년에서 1966년까지 500여년에 걸쳐 형성된 조선왕릉은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조상신을 나쁜 기운으로부터 보호하고, 조상의 묘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설된 배경에 있다. 뒤로는 주산이 있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고 멀리 여러 겹의 산줄기가 겹쳐 있으면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위치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자연친화적이고 자연과 인간의 순리의 지혜를 일깨워준다.

     조선왕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왕조 500여년을 지나오면서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하늘로 올라간 왕실의 조상들의 음덕을 받아 이 땅의 번영을 누리는 가교의 역할을 하는 의미로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이다. 또한 능에는 여러 기가 있어도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공간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또한 능마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다양하며 시대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의 하나, 동구릉 목릉(선조).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40기의 하나, 동구릉 목릉(선조).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성역이라는 개념 아래 유교적 이상의 위계질서가 반영되도록 능역을 조성한 공간이다.
     주인공이 묻혀 있는 능침공간은 주변 산세와 지형에 따라 단릉, 쌍릉, 합장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성 되었으나 대부분은 양 옆과 뒤 쪽의 삼면으로 곡장을 두르고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을 수호하는 각 두 쌍의 석호, 석양을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석양은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땅 속의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설치하였으며 석호는 밖에서 들어오는 사악한 것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하였다. 능침공간, 제향공간, 진입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무엇보다 주인공이 묻혀 있는 봉분을 둘러싼 능침공간이 중심이 된다. 봉분은 주변 산세와 지형, 왕비나 왕비의 돌아간 날 등을 고려하여 조형 형태의 차이가 있다. 단릉, 쌍릉, 합장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왕릉을 둘러싼 건축물들은 매우 장엄하고 절도 있게 유교적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동구릉으로부터 모든 능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모습은 한 번에 능이 다 보이지 않고 한 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단계가 있고 절차가 있는 의례의 품격과 절차와 과정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정자각 앞의 참도의 양 옆에 도열하고 서 있는 소나무 모습을 보면 나무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숙연해지기도 한다. 즉 한 나무도 다른 방향을 하지 않고 능의 주인공을 향해 서로 마주 보며 참배하고 있다. 자기가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책임을 다하는 한결 같이 본분을 지키는 모습이 사람보다 더 진지하게 느껴진다.
    사초지를 올라 능 앞에 서면 상석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과 양과 호랑이, 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임금이 살아생전 아끼고 가까이 했던 석물들이 주변을 호위하고 영원히 지키고 있다. 이 석물들도 시대에 따라 크기가 각각 다르고 얼굴 모습도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벙글벙글 웃음 짓는 모습이 해학적이기도 하다.
     또한 국가적으로 장례 풍속을 검소하게 하라고 권장할 때는 능묘 조성이 간소해지기도 하고 조금 완화되면 화려해지기도하나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항상 왕이나 왕비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형문화 유산에 내포된 의미와 시대정신을 일깨워주면 훨씬 살아 숨 쉬는 역사 이야기로 친근하게 다가가 관람객들의 흥미와 감동을 자아낼 것이다.

    바로 자연을 경배하는 인간의 겸손함과 진정성이 임진왜란, 일제 침략기, 6.25전쟁기에도 어느 한 부분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온 힘은 인간의 정성도 있지만 하늘과 땅의 자연이 도와주고 보호해 준 것이라 생각된다.

     이외에도 서원, 사찰, 정자 문화 등 전국 곳곳에 자연과 함께하는 문화유산이 무수히 많다.

    서원의 문화유산을 보면 천인합일의 경관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건축을 하였다. 또한 지성보다는 인성교육에 치중하여 인간의 순리를 자연의 이치에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정신적 가치 지향의 교육과 당장의 성과보다는 시대에 책임을 지고 내일의 참된 길을 열어가는 차세대를 위한 교육의 열정들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전통사찰도 수려한 자연경관과 함께 오묘한 자연친화적 건축기법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현재 서원, 사찰문화(산사)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 중이다.

  •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후원(비원)의 연못 애련지의 정자 애련정(자료사진)
    ▲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후원(비원)의 연못 애련지의 정자 애련정(자료사진)

  • 애련정의 한국미에 심취한 필자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똑같은 정자를 연구원 구내에 건축하여 '학의정'이라 이름하였다.
    ▲ 애련정의 한국미에 심취한 필자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똑같은 정자를 연구원 구내에 건축하여 '학의정'이라 이름하였다.

    3. 자연, 착함, 선진화

      자연과 함께하는 착한 선진화 실천방안은 어떤 이론의 난무보다도 우리의 문화유적을 돌아보면서 직접 느끼는 감동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화현장에 가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에 대한 경외로움이 있고, 착하게 살고 후손들을 위해 어떤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지에 진정성 있는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건축물을 세우거나 정원을 꾸밀 때에도 반드시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시하였다. 과도한 인공조경을 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해석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자연과 하나 되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태도는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자연 파괴가 문제시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한중일의 자연을 인식하는 태도는 다르다. 중국은 워낙 대륙이 넓어 산만 있는 곳은 산만 보이고 바다만 있는 곳은 바다만 보여 모든 자연 현상을 함께 어우러지는 건축이라기보다는 조형양식이 매우 크고 색깔도 강렬하다.

     일본은 자연이 무섭다. 왜냐하면 항상 지진의 공포에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조경은 사람의 손 안에 넣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에 축소지향적이고 인공적이다.
     한국은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건축양식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색감도 자연색이다. 단청, 한복, 한옥, 한식이 오방색 내지 융합적 색감을 연출하여 은은하고 자연스럽고 설레임의 아름다움이 있다.

     착함은 편안하고 온화해야 한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면 상대방을 존중하게 된다.
    따라서 관용, 배려, 나눔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박애정신이 피어나야 한다.
     선진화는 앞서가는 것 속에 발전이 있고 품격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사람 간의 조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조화로움을 유지해야 하고 더 낳은 세상을 향해 바르게 그리고 상생과 공존의 지혜로 희망을 열어야 한다. 따뜻함, 아름다움, 평화로움이 함께 있는 자연에서 배워 인간의 착한 심성을 일깨우고 따뜻한 동행의 길을 열어갈 때 다음과 같은 의미가 마음 속에 하트웨어로써 자리 잡을 수 있다.

     첫째, 바로 자연을 보면 산이든 바다든 탁 트이고 시원함, 평안함이 있다. 그래서 자연에 안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지 않는가?
     둘째, 자연은 순리의 미학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어길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피고지고 들꽃같이 다시 피어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는 호연지기 정신, 바로 자연이 주는 따뜻함이자 준엄함이다.
     셋째, 자연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연의 언어를 깊이 새겨 들을 때 소나무의 늘 변치 않는 의리심, 은행나무 같은 끈기, 인내의 정신을 배울 수 있다.
     넷째, 오케스트라가 함께 모여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듯이 자연을 통해 화합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상생과 공존, 하모니를 자연 속에서 서로 받쳐주고 비켜주고 배려의 마음에서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색깔의 설레임과 신비로운 오방색과 아울러 우리나라 단풍이나 녹색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어느 나라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섯째, 자연에서 이상을 배운다. 드높은 산, 넓은 바다, 고고한 역사를 지켜온 거목들을 통해 상생의 희열을 느낀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엎을 수도 있다는 점도 함께 인식할 때 인간은 자연 앞에서 겸허해질 수 있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지만, 봄이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함께하는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 속에서 착한 선진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세계화와 개방화, 융합화의 시대적 추세 속에서, 인류는 당면과제를 함께 해결하고 인류 평화와 복지 증진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과연 인류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깊이 사색할 때, 한국의 정신문화에 깃들어 있는 화합과 소통의 정신, 인간주의적 사랑, 인간과 자연의 조화, 나눔과 베풂의 정신, 인간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진정성은 바로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글로벌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신뢰 속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상의 평화는 인간끼리의 소통과 화합만이 아니라 자연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룰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전 지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전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