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이승만(1) 부산정치파동제헌국회서 뒤집힌 헌법 초안

     대통령을 임금처럼 앉혀놓고 뭐라?” 이승만 최후통첩

     한민당, 내각책임제 포기...총리직은 살리는 비빔밥 헌법’ 관철

  • ▲ 경복궁을 가로막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건물. 5.10총선후 제헌국회 의사당이자 건국정부청사 '중앙청'으로 사용된 르네상스식 석조 5층건물, 사진은 1995년 김영삼정부가 철거하기 전 모습이다. 멀리 북악산아래 노태우정부가 새로 지은 청와대가 보인다.(자료사진)
    ▲ 경복궁을 가로막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건물. 5.10총선후 제헌국회 의사당이자 건국정부청사 '중앙청'으로 사용된 르네상스식 석조 5층건물, 사진은 1995년 김영삼정부가 철거하기 전 모습이다. 멀리 북악산아래 노태우정부가 새로 지은 청와대가 보인다.(자료사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헌국회 의사당

     제헌국회를 찾아 길을 나섰으나 찾아 갈 곳이 없다. 빈터라도 가봐야 할 것인가.

    20년 전에 사라진 제헌국회 의사당, 한때는 동양 최대의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식 석조건물로
    건축가들이 평가하던 그 건물은 1995815일 광복절에 와장창 폭파되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김영삼(金泳三)정권이 일제잔재를 없애 민족정기를 높인다며
    거액을 들여 완전 철거한 것. 일제(日帝)가 광화문도 허물고 경복궁을 가로막아 지은 일본 총독부 육중한 화강암 청사는 일제식민 36년을 살지 않은 사람이라도 눈에 거슬려 치워버리고 싶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어디 그리 간단한가. 치운다고 지운다고 치워지고 지워지던가.
    승전국 미국 군정사령부가 장악했던 총독부 건물은 19485.10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나라이름 대한민국을 작명하고 531일 개원식과 더불어 헌법을 만들고 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을 선출하고, 815일엔 건국기념식을 열어 국가독립을
    유엔 만국에 선포한 현장. 우리 정부가 중앙청으로 명명하여 6.25남침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매주 국무회의를 진행하였고, 제헌 국회는 수많은 국법을 제정하여 신생 독립국가를 운영하던
    건국의 역사 창조‘ 기록이 가득 찬 우리 현대사의 유물이기도 하다.

    망국의 역사도 침략의 역사도 역사일진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역사의 증인이요 역사의 교재인 건물은 그 자체가 또한 역사이다.
    더구나 그 건물은 적으로부터 빼앗은 승리의 노획물로서, 나라를 적에게 내주었던 조선왕실의
    정궁 경복궁 앞에 있으니 국민과 지도자들이 망국의 교훈을 되새기기에 절묘한 위치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또한 박정희 정부가 종합청사를 지을때까지 산업화 혁명을 불지르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 베를린 왕궁은 동독공산당 울브리히트가 제국주의 잔재는 부끄럽다1950년 철거해버리고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을 만들었지만, 통일후 무려 9400억을 들여 복원하였다.

    일제총독부 청사를 새삼 복원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멀쩡히 서있는 역사를 무너트리면
     역사 바로 세우기가 바로 서는 걸까. 스페인은 700년 지배받은 이슬람 유물로 관광대국이 되어 먹고 산다던데 총독부 부순다고 일제잔재가 얼마나 사라졌던가? 일제가 지은 시청, 한국은행,
    서울역사는 왜 철거하지 않았는지?
    하기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임시정부 이래 우리 문민정부가 최초의 정통정부라고 선언했듯이, 건국이래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부들을 모두 부정해버리는 식의 역사관을 과시하였으니 자신의 역사 이외의 역사는 역사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나라 왕궁도
    부수는 동독 공산당이나 공자묘까지 깨는 중국 모택동의 야만적 문화혁명 사태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무지의 만용이 무서운 줄 모르고 되풀이 하는 역사 파괴의 비극
    다이너마이트 폭발음과 함께 문민정부야 속이 풀렸는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건국정부 청사이자 제헌국회 의사당은 어디에서 다시 찾아 볼 수 있단 말인가. 

  • ▲ 김영삼 정부는 1995년 8월15일 광복절에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기공식을 가졌다. 당시 국립박물관이 되었던 옛 제헌국회 의사당 앞에서 "민족정기 회복" 구호를 걸고 요란한 행사를 벌였다.(자료사진)
    ▲ 김영삼 정부는 1995년 8월15일 광복절에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기공식을 가졌다. 당시 국립박물관이 되었던 옛 제헌국회 의사당 앞에서 "민족정기 회복" 구호를 걸고 요란한 행사를 벌였다.(자료사진)


    한민당 후배들 설득한 이승만, 평생 목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관철

    북한 김일성과 좌우합작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김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5.10선거는 문맹률 80%라는 유권자 투표에서 유효표 97%의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남한 전역에서 198명의 제헌의원들이 탄생하였다.
    정원 200
    명중 제주도 2명은 공산당의 4.3폭동으로 선거를 못해 이듬해 뽑았다.

    1948531일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제헌의회는 감격의 첫 개원회의를 열었다.
    전국민 감동의 순간, 국회의장 이승만의 감회는 또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고종황제 치하 구한말, 독립협회 청년운동가 이승만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자 만민공동회 농성데모를 한달이나 벌였던 1898, 버티던 고종이 양보하여 왕립 의회격인 중추원(中樞院)을 
    개편, 개화파를 수용함으로써 23살 이승만은 의관(議官:임명 의원격)이 되었다.
    열혈파 이승만은 그러나 첫날부터 급진개혁을 외치다가 한달만에 파면당하고 반역죄로 투옥되고
    만다. 의회 설립의 꿈도 독립협회도 무산되었던 젊은 날의 뼈아픈 악몽
    ...그로부터 50년 만에
    자유공화국 국회가 마침내 열린 감격은 그만의 것이 아닐 수 없었다
    73세에 국회의장이 된
    박사 독립투사
    , 단상에 오른 이승만의 목소리가 더 떨려 나왔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제헌의원들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두 일어섰다. 간단히 하라는 기도는 30분쯤 걸렸다.

    기독교 국가도 아니거늘 기도로 제헌국회를 시작하는 이승만,
    그의 카리스마에 덩달아 눈을 감은 국회의원들이 그런 기독교 신념으로 뭉친
    이승만의 인간과 정치철학과 신앙적 리더십을 좀 더 일찍 알고 좀 더 깊이 이해하였던들,
    우리 헌정사는 보다 평탄한 길을 걷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제헌의원들은 젊었다. 지도급 의원들조차 대부분 이승만을 따르던 제자들,
    한국민주당 김성수(金成洙)도 그에게 배웠던 열여섯살 아래 아들 뻘이었다. 

  • ▲ 제헌국회 개원회의를 주재하는 이승만 의장. 이곳 의사당서 제헌의원들은 6월1일부터 헌법제정을 강행군한다.(자료사진)
    ▲ 제헌국회 개원회의를 주재하는 이승만 의장. 이곳 의사당서 제헌의원들은 6월1일부터 헌법제정을 강행군한다.(자료사진)



    건국정부 수립을 서둘러야 하는 제헌국회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개원 축하행사를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하게 치른 의원들은 즉각 헌법 제정을 시작한다.

    다음날 전형위원 10명 선출, 다음날 전형위원들은 헌법기초위원 30명 선출, 다음날 63일부터 22일까지 헌법초안 작성, 712일까지 초안심의 결정, 마침내 7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선포한다.

    건국정치판의 민낯...한민당, 내각책임제 추진한 까닭

    61일부터 48일간의 헌법 제정과정에서 건국 정치판의 민낯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일찌감치 만든 내각책임제 헌법초안을 내놓고 적극 추진하였다.
    한마디로 상징적 대통령, 실권형 내각, 즉 한민당이 당시에 권력장악을 위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승만-한민당 공존 공생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해방직후 1945916일 창당한 한민당은 박헌영-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성명을 내고 임시정부를 적극 옹립하자고 결의한 국내 자유민주세력의 집합체다.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등 임정인사들은 그러나 한민당등 국내파를 친일파로 매도,
    박대함으로써 한민당은 뜻밖의 정치현실 앞에서 위기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단결을 외치는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자유정부를 세워 통일을 준비하자는 단정수립 방침을 밝히자
    한민당은 주저없이 반공의 리더 이승만 지지로 진로를 바꾸었다.

    일제의 핍박아래 애국운동을 펼치며 지위와 재산을 일군 지주, 기업인, 문화인등 한민당 세력은
    새 나라의 정권을 자기들이 맡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이치'로 인식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승만은 경쟁자가 없는 독립운동의 영웅,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앉히고 실권은 한민당이
    누리는 권력체제를 법제화하도록 유진오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것이 총리 중심 내각책임제.
    당시 유진오는 한국에 하나 밖에 없는 내각제 연구자’였다고 한다. 영국등 각국의 내각책임제를 참고했다는 유진오 헌법’ 초안은 한민당의 집권 청사진이었던 셈이다.

    결국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로 하고, 국회는 단원제로 하는 헌법초안이
    입법의 헤게모니를 잡은 한민당 기초위원들 중심으로 일사천리로 정해져 나갔다.
    문제는 한민당이 권력구조 문제에 대하여 이승만과 사전협의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의 목표는 20대 청년시절부터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다.

    배재학당에 들어가 처음 발견한 놀라운 신대륙 미국, 자유와 법치로 굴러가는 넓은 나라를
    대통령 혼자 이끄는 유토피아, 그는 미국 공부에 흠뻑 빨려들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달달
    외울 정도였던 그는 배재학당 졸업생 대표 연설도 조선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Korea)을 영어로 열변을 토하여 서울 장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형수로 감옥생활 57개월동안에도 미국 역사, 독립전쟁, 법체계 연구등 불변의 국가모델로
    삼았고, 하바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까지는 물론 독립운동 40년 내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꿈꾸는 나라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로 더더욱 구체화되어 갔다.

    1944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이승만은 친구인 미국 법학자들에게
     대한민국 헌법초안에 관한 조언을 구하였으며, 해방후 귀국하는 그의 머리 속에는
    그 완성품이 명확하게 들어있었다. 하지만 초장부터 그 본심을 드러내는 일은 삼가하였다.
    해방3년간 건국운동을 함께 한 자유세력은 모두 포용하자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내세웠다.

  • ▲ 확정된 제헌 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국회의장.(자료사진)
    ▲ 확정된 제헌 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국회의장.(자료사진)


    대통령을 왕처럼 불가침적 존재로 앉혀놓고 수상이 다 하겠다고요?”

    내각제 유진오 초안’이 굳어져가자 이승만은 후배들에게 맡겼던 헌법을 더 이상 놔둘 수 없었다.

    영국이나 일본의 제도가 내각책임제라 할 것인데, 그 나라들은 군주정체로 뿌리가 박혀서
    갑자기 왕을 없일 수 없는 관계로 그러하나.....우리나라는 3.1운동때 세계에 선포한 민주정체를 당장 실현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을 군주같이 모셔놓고 수상이 다 책임진다는 것은 비민주제도
    이다. 이러면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독재정치가 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간선제로 대통령을 뽑는다 해도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았으니 대통령도 국민이 선출한 이상 모든 일은 잘하든지 못하든지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 사리에 맞는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세 차례쯤 나타나 대통령중심제를 설명하고 설득작업을 
    계속하였으나 한민당 기초위원들은 듣지 않았다. 드디어 이승만은 결단을 보여야만 했다.

    만일 이 초안이 그대로 국회에서 채택된다면
    나는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으로 남아서
    국민운동이나 하겠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기초위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허정, 유진오등을 이화장(梨花莊)에 보내 이승만 설득작업을 벌였다.

    이승만은 내각제를 강조하는 젊은 학자 유진오가 대견하다는 듯
    할아버지 같은 미소로 맞장구 치며 어깨를 두드리고 격려하였다.
    유진오는 이승만이 그때 설득된 줄 알았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웬걸, 설득사절단이 돌아가자 이승만은 대표 김성수를 불러 최후통첩을 내렸다.

    나는 이름만의 대통령은 할 생각이 없소.
    한민당이 꼭 그렇게 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으시오.”

    이날은 초안 확정 마감 날, 충격에 놀란 한민당 간부들은 서울 계동의 김성수 집에 모였다.

    이승만을 빼놓고 대통령 할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승만의 영도력 없이 한민당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겠으며,
    이 혼란한 정국을 주도하여 국가안정을 도모할만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이승만을 앉혀놓고 총리등 내각을 장악하는 길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낙착되었다
    .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정 전에 뜯어고치자고 합의되었다..
    당대의 천재 김준연(金俊淵) 기초위원이 나서서 즉석 수정안을 만들었다.
    내각책임제 초안은 금방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바뀌었다.
    뒤늦게 불려온 유진오는 수정안을 보며 말했다. 비빔밥 정부가 될 것이오"

    대통령 부통령 아래 국무총리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정부 조직,
    비빔밥이 아니라 머리가 둘 달린 괴물 정부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었다.
    제헌헌법은 그래서 4년뒤 부산에서 등장한 발췌개헌의 짬뽕헌법 그 원형이다.

  • ▲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한 날, 제헌의원들이 중앙청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자료사진).
    ▲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한 날, 제헌의원들이 중앙청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념촬영(자료사진).

    이승만은 그 '비빔밥' 마저 거부할 순 없었다. 어차피 다 끌어안고 가야할 건국의 길.
    75일부터 사회봉을 든 이승만 국회의장은 조항마다 기립투표로 찬반을 물으며
    10장 102개조 헌법을 통과시켜 나갔다
    . 헌법이 확정되자 그에 따른 정부 조직법도 만들었다.
    마침내 첫 제헌절이 된 날! 17
    일 오전10시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헌법 공포식 팡파레~~~.

    “3천만 국민을 대표한 대한민국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3독 토의로 정식 통과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나 이승만은 국회의장 자격으로 이 간단한 예식으로, 서명하고
    이 헌법이 우리 국민의 완전한 국법임을 세계에 선포합니다.”

    이승만의 이 말이 끝나는 순간부터 발효된 헌법은 또 얼마나 많은 드라마를 만들 것인가.
    불안한 한민당은 기대반 걱정반...희망대로 내각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잠을 못이루었다.
    아무도 예측못한 부산정치파동까지 앞으로 4년...그럼 건국내각 구성을 살펴보자. .
    자, 이화장 조각당(組閣堂)을 향하여 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