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⑫ 개헌 전쟁...지방의회 선거...직선제 개헌 국민운동

'대통령의 개헌안' 참패...공산 포로들은 대규모 폭동 납치

인보길 대표이사 회장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6.10.30 19: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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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⑫ 개헌 전쟁...지방의회 선거로 직선제 개헌 국민운동

'대통령의 개헌안' 참패...공산 포로들은 대규모 폭동 납치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직선제의 해’가 밝았다. 1952년 임진년, 도요토미 헤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지 360주년되는 이 해에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헌법이 확정되고 역사상 최초로 ‘직선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뽑던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직선제가 결정되기까지
이승만은 또 다시 ‘1인 전쟁’을 벌여 성공한 것, 부산정치파동=발췌개헌이란 ‘개헌전쟁’의 

막이 열린 임진년 드라마, 그 하일라이트를 따라가 보자 .

직선제 개헌 패배...찬성 겨우 19표...정치개혁 시작

지난해 11월 국회로 넘어온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양원제 개헌안이 새해를 맞았다.

보나마나 부결이 뻔한 개헌안 처리를 미뤄놓았던 국회는 1월15일 정기국회가 문을 열자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치우듯이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처음부터 반대를 밝힌 민국당은 물론, 원내자유당 마저도 의원총회에서 찬성자는 겨우 3명뿐, 
표결에서 반대하기로 결정하는 판이었다. 

이틀동안 토론에서 찬성토론자는 아무도 없었다.
18일 아침, 당대의 웅변가들이라는 엄상섭, 서이환, 김정실 등 자유당 소속의원들이
반대 토론에 앞장섰고 민국당 서범석, 무소속 곽상훈 등이 점심시간도 넘기면서
경쟁하듯이 반대 발언만 이어갔다.
총리서리 허정만이 제안설명에서 이승만을 옹호하였다.
“전쟁중임을 구실로 민주국가의 백년대계를 지연시키는 것을 정부는 승복할 수 없다.”는
발언에 국회는 또 '발언 취소하라' 말 싸움이 벌어졌다.

오후 2시 30분, 서둘러 표결에 들어간 비밀투표는 30분 만에 끝났다.

“가(可)에 19표, 부(否)에 143표, 기권이 하나, 그래서 163표가 됩니다.
이것으로써 대통령이 제출한 헌법개정안은 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
사회를 맡은 국회부의장 조봉암(曺奉岩)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박수를 친 의원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때늦은 점심을 먹으러 끼리끼리 몰려나갔다.

1승1패---건국 3년에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도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도 실패로 끝났다. 

진땀을 빼고 돌아온 허정이 이승만에게 또 한번 ‘타협을 통한 간선 승리’를 건의하였다.

“이제는 미스터 허까지 나를 반대하는가? 두고 보면 알아. 나한테 복안이 있어.”

‘찬성 19표’의 처참한 패배, 점심을 먹는 국회의원들은 승리감에 취해 술잔을 돌렸지만,
그들이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주리라 생각하고 냈다면 이승만은 바보다. 

그것은 국회를 흔들어 정치개혁을 단행하려는 대통령의 ‘선전포고’ 깃발이다.

아니 전국민에게 ‘직선제’를 국가 아젠다로 공식 제안하여 민의와 국론을 결집시키려는
이승만식 민주정치 전략전술이었다.  그의 복안은 즉시 거리에 나타났다.

국민투표 제안...국회의원 소환운동 본격 가동

개헌안 부결 이틀 뒤에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 국민투표를 제의한다..

“대통령을 직선할 것과 국회를 양원제로 작성하자는 개헌문제를 국회에서 부결한데 대해서

국회는 민중이 이 개헌안을 찬성치 않는 것으로 아는 것이므로 국회의원들 생각에는
민의를 위반한 것이 없는 줄로 양해되는 것이요. 정부측으로서는 민중이 전적으로 자기들이
직접 선거를 하는 것을 주장하는 줄로 알고 있어서 의견이 충돌되고 있으면
이런 중대문제를 자연 해결키 여려울 것이므로 순리로 저리할 방식은
민중의 공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먼저 밝히는 것이 공정히 판단하는 순서가 될 것임으로
무슨 방식이던지 정당한 방법으로 민의를 물어서 그것이 판명된 후에는
민의를 쫓아 작정될 것이다.“
그가 늘 거론하는 국민투표 밖에 해결책이 없다는 담화는 전에 없이 강력한 것이었다.
.


잇달아 피난수도 부산 거리에는 벽보가 나붙기 시작하였다.

“민중의 분노를 아는가? 민중의 분노는 이렇다”

“민주국가에서 민의를 거부한 국회의원은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들은 모조리 소환하라”

임시 국회의사당인 경남도청 주변은 물론 주요도로 건물 벽과 전신주에 붙은 벽보는
대한청년단(단장 이승만)의 부단장 문봉제(文鳳濟) 등이 국민회, 한청, 노총, 부인회등과 함께
직선제 개헌안 부결을 규탄하면서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국회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법치국가 정부가 의원소환운동을 벌이는 것은 경찰국가이며 비민주국가”라며
허정 총리서리를 불러 정면공격을 펴나갔다.

이승만은 또 담화를 발표하고 의원소환 데모의 정당성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민주국가 시민의 가장 신성한 권리를 소수자들만이 행사하여
대한민국의 토대를 위태롭게 하며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이 민의가 어떤 것인가를 소상히 알아 즉시 번안해서 교정할 줄로 나는 믿는다.
그러지 않는다면 유권자들이 투표해서 자기들의 대표를 소환하는 결정을
국회에 알려야 할 것이다. 이런 소환조건 없이 대표를 국회에 보내서
국사의 안위에 불구하고 사리사욕에만 급급하다면 이런 위험한 일이 없으니
국가의 주인되는 유권자들은 각자 권리를 사용하여 처단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기름에 불붙이는 대통령의 담화에 힘 입은 ‘소환운동’ 추진체는
전국애국단체연합회를 구성, 각가지 머리띠와 플래카드를 마련하여
대규모 데모를 연일 계속하였다.

“국민의 기본권을 약탈하는 국회의원을 추방하자.”
“민의 무시하는 국회는 해산하라”

“직선제와 양원제는 전국민 의사이다”
“국민의 언론자유를 봉쇄하는 국회의원 소환하라”

원외 자유당과 청년단 등의 합동 시위는 시, 읍, 면 단위로
벽보전과 가투(街鬪)결의대회를 비롯하여 언론을 통한 여론전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국회는 특별조사단을 만들어 국민데모를 ‘관제 민의’로 규정하고,
이승만에게 12개항의 공개질문서를 보내 ‘소환운동은 불법’이니
대통령의 불법행위를 직접 해명하라고 촉구, 경고하였다.

질문서를 받은 이승만은 솔직하게 답변하였다.

“헌법에 국회의원을 소환하지 말라는 조항이 없으므로
민주국가의 주인되는 투표자들이 자기 대표자들을 소환한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누가 막을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에 이 직선제를 실현해야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추진하겠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모르고
국회의원들이 자기 권리만 주장한다.”며 간접선거의 위험성과 직선제의 집념을 거듭 밝혔다.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는 말, ‘책임감을 갖고 추진하겠다’는 말,
이 두 가지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을 국회의원이 몇이나 될까.
냉엄한 국제정치 현장에서 평생을 싸워온 그의 말에 메아리가 돌아올 리 없다.
이승만은 그래서 또 혼자 싸워야 하는 현실임을 절감한다.


 야권, 호헌 결의....반박 성명...무초 대사는 국회편

당당한 이승만의 답변을 놓고 기가 죽은 국회는 며칠간 궁리한 끝에
 ‘헌법 수호를 다지는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여 찬성 110, 반대 49표로 채택하였다. 

결의안은 “대통령의 언명은 일관해서 어떤 종류의 운동을 옹호 조장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며 국회의 직능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독재정치의 방향으로 기울어질 위험이 많고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호헌을 위하여 결사투쟁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고 되어있다.
수세에 몰린 약자의 집단행동으로 보이는 이 결의안은
‘독재정치’라는 말을 국회차원에서 처음 공식문서에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이승만은 또 담화를 발표하여 국회의 결의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거나 민의에 반할 때에는
국회에서 탄핵조건을 정해서 탈선하지 못하게 하여 민권을 보장했으나,
국회가 탈선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방비한다는 조건은 아직 없으니...
이런 조건을 명뭉화해서 헌법에 올려서 민의에 반항하는 국회의원을 소환하게 하고....”

대통령의 담화는 들은체 만체 냉담한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게 되자 다가오는 차기대통령 선출 대책과
내각제 개헌 추진 작업에 정파별로 대책 마련에 부심하게 된다.

정치권의 움직임에 관한 보고를 접하는 이승만은
다시 국민들이 들으란 듯이 장문의 훈시조로 직접 쓴 담화를 발표한다.

“내가 기왕에도 몇 번 말한 바이지만 대통령의 임기가 몇 달이면 만기가 되어서
대통령을 투표선거케 될 것인데 민중이 아직도 이전 전제시대의 습관을 타파하지 못해서
누구나 나서서 자기가 대통령 후보자라고 선전치 못하는듯 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통령을 반대하는 자라는 의심을 받을가 해서
상당한 인물을 두고도 공개로 나설 생각을 못하고 있는 듯 하니...(중략)...
이것이 사실인진대 민주제도는 앞으로 우리가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국가의 정치제도를 그 제도대로 행하지 못하고 지하공작으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파당을 지어가지고 있는 말 없는 말을 조작 전파하여
편협한 생각으로 파당적 사심을 성취하기를 기도하게 되면
정당제도와 배치되는 것이니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할 것이다....(중략)....

근자에 정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비밀리에 백가지로 사실 없는 말을 선전하여
요사이는 말하기를 어떤 우방에서 이대통령을 반대하는 글이 와서 정부에서 안내놓는다는 등
낭설을 유포시키고 다닌다하니 본 대통령은 이런 글이나 말이 있으면
주저치 않고 공포하는 성질이고 좋으나 나쁘나 비밀리에 숨기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므로 이런 허무한 말에 대한 우려나 두려움이 없으므로
이런 것이 음흉한 소인배들의 습관이니 이런 습관으로 정당 싸움을 하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중략)....이것이 민중의 의구심을 만들어
감정의 씨를 심는 고로 이와같은 음흉한 말을 조작해다가 서로 중상을 꾀하게 할 것이니
그 결과는 정당한 정치운동을 버리고 음흉하고 사특한 언사와 행동으로
서로 분열을 꾀하는 가운데 민중의 통일이 이산되고 민주정체가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정객들은 자기들의 장래를 보든지 나라의 장래를 보든지
부디 몇몇사람씩 사사로이 모여서 비밀공작을 행하지 말고 공개로 일어나와서
자유국민의 정당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우방’은 미국을 지칭한다.
미국이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싫어하고 반대한다는 말,
이것이 낭설이며 유언비어를 조작하야 여론을 선동하지 말라는 경고,
장면등이 숨어서 장난치지 말고 공개적으로 나오라는 충고, 

미국과 친미정객들의 야합에 쐐기를 박는 이승만의 직격탄이었다.

미국 대사 무초는 이미 직선제 주장 데모대를 ‘폭력단’으로 칭하며
“우리는 국회를 강화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본국 국무성에 보고했다.
무초는 2월15일자 보고서에서 “노쇠해지는 이승만은 더욱 고집이 세지고 있는데,
최선의 후임자는 장면과 허정이지만 둘다 좀 약하고 대중의 인기가 없으니...”
이번 국회 간선에서는 "장면이 당선되는 게 우리의 최선의 바람일 것“이라고 썼다.

일찍부터 미국의 속내를 익히 아는 이승만의 담화는, 그래서 정치권만 겨냥향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회를 포섭하여 대통령을 바꾸려는 미국의 ‘내정간섭’ 공작에 정면으로 들이대는
대미 반격의 외교카드, 이때 이승만의 ‘1인투쟁’의 특징 역시 해방후 미국-소련과 싸운
‘건국투쟁’의 연장선에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담화정치...필라델피아 건국강령...대한민국 학교의 교장

“또 담화정치 하네” 툭하면 담화, 툭하면 성명을 발표하는 이승만에 대하여
당시 정치권 사람들이나 언론은 ‘담화정치’라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특히 국민을 겨냥한 담화문은 길기로 유명하여 신문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대부분 구어체로 쓰여진 대통령 담화, 그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이야기하듯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설명하듯이, 자상한 말투로 동어반복이 많고
간절히 거듭 당부하는 호소문 같기도 하였다.
왜 이승만은 그랬을까.

“백성이 깨지 못해 나라가 망했다. 똑똑한 백성이라야 독립국가 될 수 있다.
백성들 교육이 급선무다” 그의 옥중 저서 [독립정신]에도 누누히 나오는 말이다.
“1%의 양반들이 99% 백성을 사유물로 억압착취하고 노예로 빨아먹는 전제주의”를 타파하고
민주공화국을 세우면 ‘국민교육’이 첫째 과업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승만 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 독립 운동가들의 절실한 컨센서스였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이승만은 스승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국 국민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고
대한민국 건국프로그램격인 ‘건국종지(宗旨:The Aims & Aspirations of Koreans)를 발표한다. 

민주공화국 수립등 5개항을 명시한 내용 중에는
 “민중의 교육수준이 낮고 자치능력이 부족한 사실을 감안해
정부 수립 후 10년간은 중앙집권적 통치를 하되, 정부가 국민교육에 치중함으로써
국민이 미국식 공화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중앙집권 10년간 국민교육’이란 결의문은 특히 이승만에겐
한성감옥에서부터 하와이 교육공동체 실천까지 굳게 세워진 ‘교육입국’ 신념이다.
그 국민교육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3년, 국민의 문맹율은 80%를 넘어서는 나라,
‘의무교육 6년’을 선포하고 각급학교를 늘리는 와중에 공산군 남침으로
그나마 국민교육은 풍비박산 지경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급한 것이 

구식 왕조시대 출세개념에 머물러있는 정치인들에게 민주제도를 교육시키는 일이다.

정계 중진이라 해도 이승만에겐 모두 제자였고 제자 같은 젊은이들이다.
신익희와 조병옥은 19년차, 허정과 이기붕과 김성수도 21년차, 장면은 24년차,
이들이 이승만의 후계그룹으로서 “후계자로 꼽을 만한 인물이 마땅치않다”고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 한탄을 털어놓았다.

“신익희는 가장 똑똑한데 이게 문제이고...조병옥은 추진력은 있지만 술 고래...
장면은 성실해도 미국 말 잘 듣고...” 등등 나름대로 인물평까지 곁들여 걱정하는 편지다.

담화는 국민 강의록...'교육대통령'의 초지일관

역대대통령 중에 이승만 만큼 담화와 성명을 많이 낸 지도자는 없다. 

그 ‘담화 정치’의 목적은 요즘 말로 바꾸면 ‘국민과의 소통’인 셈인데
소통 이전에 3천만 국민에게 강의하는 대통령 이승만의 ‘강의록’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소통은 서로 대등한 수준의 지식과 인식과 교양등 평균적인 교감의 토대가 있어야 가능 한 것, 

이승만의 담화 하나하나는 쉬운 말로 국민수준에 맞는 표현으로 강의 하다보니 길어진다.
그가 청년시절 단 5년만에 미국명문대 학사-석사-박사까지 마쳤듯이,
국민교육도 집권 10년간 완성목표를 세우고 가능한 자원을 총동원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대한민국이란 거대한 학교의 이사장-교장-교사 ‘1인3역’을 자임하여
휴전후 7년간 미국과 싸우면서 원조자금으로 이룬 눈부신 교육성과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을 독재자로 비난하는 측도 그가 ‘교육 대통령’이었다는 점은 부정 못한다.

이승만이 초지일관하여 단기간에 교육시킨 그 학생들이 4.19를 일으키고
그 군인들이 5.16을 일으키고 그 국민들이 산업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
학자가 아니라 해도 대한민국의 건국 역사 기록임을 국민들은 알고 있다. 


야당, 내각제 개헌안 다시 제출...대통령은 누구? 

초대 대통령 임기만료 3개월 전, 4월 17일 내각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1년전 부결된 내각제 개헌안을 두 번째로 낸 대표는 무소속 곽상훈(郭尙勳)의원이다.
서명의원 123명은 원내자유당 93명중 48명, 민국당 39명 전원, 민우회 21명,
무소속 15명등 개헌선 3분의 2를 1석 넘는 다수였다. 

이 개헌안이 제출될 때까지도 정치권은 ‘권력 배분’ 문제로 진통을 거듭하였다.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한다면 이승만 반대세력이 압도적이므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장면을 대통령으로 뽑느냐? 이승만을 놔두고 내각이 국정을 장악하느냐?
내각제 개헌 주동인물 곽상훈은 고집불통 이승만을 몰아내고 운석(雲石: 장면의 호)을
대통령으로 뽑는데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면서 이런 사연을 털어 놓았다.

“....집에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승만 박사는 상징적으로 대통령 자리에 앉혀놓고
 내각제로 바꿔 운석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는게 좋겠다고 밝혔으나
 젊은 과격파의 반대로 묵살되었다. 그들은 장면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소장파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韓昌愚)와 장면 총리비서실장 선우종원(鮮于宗源)등은
51년 하반기부터 장면을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한다는 전략을 짜고 있었다. 

선우종원은 훗날 “장면 대통령 공작이 국회 3분의2선을 넘으니까 의견충돌이 생기고
또 이승만 세력과 내통하는 배신자가 생겨...” 장면 대통령 전략에 차질을 빚었다고.
민국당(당수 김성수)도 ‘장면 대통령’ 카드에는 선뜻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나타났다. 장택상(張澤相) 국무총리의 등장이다.

지난해 가을 파리 유엔총회에 참석하러 떠난 장면은 이듬해 3월까지 뉴욕으로 하와이로
‘신병 치료’를 이유삼아 돌아오지 않자, 이승만이 장택상을 총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영남 갑부의 아들인 장택상은 10대시절 일본을 거쳐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 유학하였고
26세때 뉴욕으로 건너가 허정 등과 함께 이승만을 만나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의회 대회에도 참석한 그는 이승만에게 독립운동 자금도 제공하였고
초대내각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2대국회 부의장에 조봉암과 함께 뽑혔다.

여러면에서 장면과는 대조적인 장택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폭 넓은 인맥, 기발한 발상, 추진력과 말재주를 갖춘 책략가이며
인정미와 과단성이 있어 정치인으로서 매우 유능”하다는 찬사가 많은 반면,
당시 정치판 일각에서는 잔재주를 부리는 기회주의자로 폄하되기도 하였다.


장면과 동반하여 파리에 갔다가 먼저 돌아 온 장택상을 이승만이 불렀다.

“장면이가 치밀한 계획을 꾸며서 의원들과 손을 잡고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려 하는데
자네라도 빨리 와야 될게 아닌가...”라고 역정을 냈다고 전해진다.

국회의 ‘장면 옹립’ 움직임과 이승만의 내심을 두루 아는 정치가 장택상은
국무총리가 되자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맹활약을 펼친다.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을 거부하고 ‘내각제와 간선제’의 모순속에서 고민하는
정치권의 아픈 곳을 후비는 것처럼 은근히 내각제 개헌안의 지연작전을 폈다.

“대통령은 누가 할 것이냐...개헌이 먼저냐, 대통령 선출이 먼저냐” 등등
내각제 개헌에 ‘이의(異議) 4원칙‘이란 걸 만들어 또 다른 서명작업을 벌였다.
요컨대 지금 시국에서 타이밍이 안 좋으니 개헌은 재고하라는 개헌 방해공작, 

노련한 이승만의 의회정치 용병술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지적되는 부분이다.

이때 미국대사 무초는 귀국한 장면을 은밀히 만나 결정적 언질을 주었다.

“미국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재선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지방의회 선거...자유당 대승...침묵하는 국민 다수 조직화 성공

“자유당은 하나”라며 원내 자유당의 술수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원외자유당만 인정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번에는 전국민을 아우르는 ‘빅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국 지방자치체 의회선거, 49년에 제정한 지방자치법이 정한 지방선거를
전쟁 통에 무기한 미뤘다가 한꺼번에 도의회, 시의회, 면의회까지 투표를 실시하여
방방곡곡 산골까지 국민의 대의기관를 설치한 것이다.

4월25 시읍면 의회선거, 5월10일 도의회 선거, 두 선거에서 자유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시읍면 의회 387명 중 무소속 148명, 자유당 118명, 민국당은 겨우 16명만 당선되었다.

도의회 306명 가운데 자유당 147명 당선, 민국당은 4명뿐으로 두 선거에 연패를 당했다.

그때 농민들의 말로는 “한민당(민국당 전신)은 미군정 때도 우리를 사람취급 안했다.
농민의 뜨거운 맛을 이제 알 것”이라며 웃었다고 한다.
왕년의 지주들에게 본때를 보였다는 듯.

과연 이승만의 카리스마, 그는 일거에 ‘국민의 대통령’임을 다시 한번 실증하였다.

1석 5조의 지방의회선거, 첫째 원외자유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당성을 획득하였고, 

둘째 국회 안의 정쟁에 갇혀있는 의원들을 민심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국면을 만들어냈고,

셋째 미국등 강대국들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리더는 이승만이란 현실을 재확인해 주었으며,

넷째 민주제도를 모르는 국민들에게 자유민주 정치체제를 일깨워주는 정치교육의 효과,

다섯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실현하여 이승만이 주장하던 바 “미국보다 더 직접적인 민주국가”로 진일보한 것이었다.

.


서민호, 육국대위 총살....“살인 국회 물러가라”

지방선거 운동기간에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지역구를 지원하러 나선 국회의원중에 전남 서민호(徐珉濠)의원이
순천 식당에서 말다툼 중에 육군대위를 권총으로 살해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국회는 조사 끝에 정당방위를 내 세웠지만 자수한 서민호는 다음날 구속되어
살인죄로 기소되자 국회는 석방결의안을 반대없이 통과시켰다. 

그러나 군법회의에서는 서민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재심을 요구하여 8년 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미군정때 전남도지사를 역임한 서민호1903~1974)는 한때 이승만의 비서도 지냈는데
2대 국회의원이 된후 무슨 까닭인지 이승만 공격의 선두에 선 인물이 되었다.
사고가 터진 날 지방유지들과 식사를 하던 서민호를 알아 본 장교 서창선(徐昌善)은
 “옳다, 잘 만났다. 니가 서민호냐?”면서 그의 사상을 비난하며 덤비자
서민호가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았다는 것이다. 서 대위는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서민호는 4.19 직후 석방되어 7.29선거때 정치에 복귀, 국회부의장이 된다.)

국회를 규탄하는 청년단이 호재를 만났다. 플래카드에 한 가지가 더붙었다.

“국회의원 서민호는 살인자다” 

“살인범 의원을 옹호하는 국회는 물러가라”

“살인국회는 즉각 해산하라”

‘서민호 석방 결사 반대’ 벽보들이 나붙고 국회의원 소환운동에 가속도가 붙었다.

전국에서 벌어진 소환운동은 ‘아무개 의원 환영대회’나 ‘농산물 증산대회’등 명목으로 

지역구 의원을 불러다놓고 대통령 직선제냐 내각제냐 찬반을 묻고 성토하며
“민의는 직선제에 있으니 존중하라” 압박을 가하는 식이었다.
더불어 내각제 개헌안 반대 시위가 국회주변을 포위하였다.

지방의회 선거를 통해 말없는 국민의 힘을 조직화한 이승만은
그의 목표대로 ‘직선제 개헌’ 추진에 천군만마의 동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돗드 수용소장 피납

판문점 휴전 협상은 공산측이 유엔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면서 줄다리가 계속되자
미국 언론들도  “성사 가망없다”고 사설을 쓸 정도로 오락가락 하던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의 폭동이 터지고 말았다.

한국전쟁 중 포로수용소가 처음 설치된 것은 그해 7월 대전형무소,
중공군의 참전이후 급증하는 포로는 수십만명, 몇개소에 분산했으나
거제 수용소가 가장 많은 17만 6천여명이다.

문제는 공산군 포로들의 행패, 인공기를 계양하고 적기가를 부르고
담요를 뜯어 만든 군복에 계급장까지 붙이고 나와 행진하며 날마다 인민재판, 

돌맹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난동을 피웠다. 반공포로들을 습격하여 집단린치에 학살 감행,
북한 지령 받아 ‘해방동맹’이란 조직을 만들어 미군무기를 탈취하여 수용소를 장악한다는
대규모 폭동 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미 2월에 한차례 방화 폭동에 성공했던 그들이다.

문제는 ‘빨갱이’를 모르는 미군의 허술한 관리, 제네바 포로협정을 준수한다면서
이제나 저제나 휴전회담이 잘 되기만 바라보는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그 휴전회담의 북한측 대표 남일(南日)은 거제포로수용소에 위장 포로들을 들여보내
모종의 협상카드를 만들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것이 수용소장 돗드 준장 납치사건이다.
2월 폭동에 책임지고 경질된 수용소장의 후임 돗드 준장 역시 어수룩한 미국인 장군,
집단학살된 반공포로들의 피로 만든 인공기를 휘두르며 “미국의 학대를 시정하라”는
공산군 포로들의 면담 요청에 대책없이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5월7일 오후 1시간이 넘는 시비에 지친 돗드 수용소장이 돌아서자 포로들이 덮쳤고 

수용소 안으로 납치되자. 한국군 경비들이 발포하려 했으나 미군은 듣지 않았다.

역사상 포로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된 것은 처음, 판문점의 남일은 의기양양했다.

“미국은 포로를 야만적으로 학대하여 납치까지 당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신문은 연일 대서특필 하고 유엔측은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수용소사령관 콜슨 준장은 돗드 석방을 위한다며 포로들의 요구를 몽땅 들어주었다.

그 속에는 ‘미군의 고문, 대량학살, 독가스와 세균전 중지, 원자탄 실험에 포로이용 금지’ 등등

허무맹랑한 거짓 주장을 미군은 무작정 오케이, 미국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

돗드 준장은 78시간만에 풀려났지만 미군은 지금까지 중장모략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작년부터 반공포로들의 참상을 국방부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이를 갈았지만 

공산군과 싸울 줄 모르는 미국과 공산국들을 한방에 정신 차리게 해줄 전술이 필요하건만,

그것은 때를 기다려야 하는 국제외교전쟁, 직선제 개헌으로 리더십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두번째 직선제 개헌안 공고...'민의' 동원 거리정치 만발

5월14일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안을 두 번째로 공고하였다.
여기서 초대대통령 임기는 이승만이 선출된 7월24일까지로 규정,
그 한달 전인 6월23일까지는 2대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지난달 내각제 개헌안을 제출한 야권은 다시 한번 이승만 서슬에 맥이 풀렸다.
이승만의 카리스마나 그 기세로 보아 이번엔 직선제 개헌을 관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날마다 국회주변에서 벌어지는 시위대의 위세와 구호에도 위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포로 강제송환을 반대”한다는 구호가 ‘휴전 결사반대’와 함께 추가되어
이승만의 담화정치와 더불어 자유당과 민중을 동원한 거리정치의 물결이
'의원 소환, 직선제 지지'를 외치며 피난수도의 도심을 날마다 휩쓸고 있었다.

도청앞 광장 시위는 “살인국회의원 서민호를 총살하라” “순국용사 서 대위의 영에 보답하자”는 구호도 난무하고,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경남도청 임시의사당 도로 변은
조직적인 준비로 새로운 군중과 새로운 벽보와 새로운 플래카드에 묻혀버렸다. 

이제는 서울 덕수궁 앞 광장에서도, 인천에서도 시민대회와 직선제 지지대회가 열렸다.
환도를 앞둔 이승만이 서울 경무대도 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과 정치판의 대결, 이승만과 미국의 대결,
미국과 야당은 과연 이승만을 이길 것인가.<계속>

    • 인보길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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