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승만史 (1) 부산정치파동⓲ 전국민 사상 처음 대통령 선거하다

최초의 직선 대통령 탄생… "자기가 독재하려고 개헌했나?"

"나의 평생중 50년은 투쟁의 역사...자유민주에 목숨 바치겠다"

[연재] 이승만史 (1) 부산정치파동⓲ 서울 중앙청서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최초의 직선 대통령 탄생..."자기가 독재하려고 개헌했나?"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오메나, 우리가 나가서 대통령두 뽑는대유? 그래두 되는 거래유?”

석유 등잔불을 켜 놓고 다듬이질 하는 부엌 아줌마가 바느질하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그럼, 좋은 세상이지. 지난번 우리 양반 선거 때두 안 찍었지? 이번엔 꼭 찍어.”
우리 양반이란 나의 아버지를 말한다. 동네 이장(里長)을 오래 하던 39세 아버지는
그해 4월 면의원(面議員) 선거에 등 떠밀려 출마하였는데 제꺽 당선되었다.
국민 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생 나는 면의원 아들로 출세(?)하여 으쓱거리던 그때,
이번엔 대통령 선거 투표날이 다가온다.

“손가락으루 찍는대유? 뻘건 인주 묻혀서...” 아줌마는 신기하다는 듯 자꾸 웃는다.

“아녀, 붓두껑으루 찍는 겨. 걱정 마러, 내가 가르쳐 줄텡께. 잘못 찍으면 헛수고여.”

충청남도 당진(唐津) 바닷가 소나무 마을에 삼복더위 여름 밤이 깊어간다.
사랑방으로 달려간 나는 장기판을 기웃거리며 빨리 어른 되어 투표란 걸 해 보고 싶었다.
제헌국회 선거 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는데 한해에 연거푸 선거를 세 차례나 하다보니
아버지 사랑방에 밤마다 모이는 마을사람들 화제도 자연 시국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란 이름을 나는 처음 들어봤다. 학교에서도 못 들었던 그 이름.

“이승만 찍어야지?” 한 사람이 말하면 “아암, 그래야지.” 여기저기서 맞장구쳤다.

“전쟁 중인디 무슨 선거를 이렇게 자주 헌다나? 면의원, 도의원, 대통령에 부통령...” 

“이게 민주주의란 거여. 미국처럼 되는 거라구. 북한 빨갱이 놈들은 어림두 없잖응감.” 

미군과 세계각국 군대들을 끌어다가 전쟁하는 미국 박사 이승만은 하늘 같은 어른,
그분 덕분에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잘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들이 이어진다.
장기(將棋) 두며 저마다 피우는 독한 담배 연기로 사랑방은 코가 매워 숨막힐 지경이다.
그날 밤에도 나는 건너 마을 반장님을 두판 내리 이겨버렸다.


최초의 직선제 선거전...부통령 9명 난립...저마다 '이승만 짝' 경쟁

건국 4년만에 역사상 최초로 시행하는 대통령 직접선거는 26일이 후보등록 마감.

이날 선포 두달 넘긴 비상계엄령이 선거분위기를 위해 28일0시를 기해 해제령이 내렸다.

다음은 동아일보 1면 머리 기사:
 [대통령 부통령 선거 입후보등록은 지난 19일 개시하여 26일 하오12시 마감하였다.
이날 등록은 마감시간 몇분 전에 부통령으로 조병옥씨가 최후로 등록을 한 것으로 끝마쳤는데
이로써 대통령에는 이승만, 이시영, 조봉암, 신흥우 4씨가 입후보등록을 완료하였고, 

부통령에는 이윤영, 조병옥, 함태영, 임영신, 전진한, 이범석, 백성욱, 이갑성, 정기원 등
9씨가 출마케 된 것이다. 한편 중앙선선거위원회에서는 27일 상오10시부터 국무회의실에서
정부통령 입후보자의 기호 추첨을 하였는 바, 대통령 입후보자의 기호순위는
1호 조봉암, 2호 이승만, 3호 이시영, 4호가 신흥우씨로 정해졌다. 그리고 부통령 순위는......]

동아일보는 앞으로 1주일간 전개될 선거전이 백열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하면서,
신익희 국회의장이 ‘정치적 불이익 우려’를 이유로 불출마를 선언했다는 1단 기사를 실었다.
장면 역시 “출마하고 싶지만 나의 지지자들이 피해를 볼 것 같아 포기”한다고 발표하였다.

직선제 헌법 확정후 ‘이승만 천하’를 실감한 정치판은 이처럼 출마를 주저하는 형편이었다.

투표를 해보나마나 대통령은 ‘이승만 당선‘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국당이 내각제 개헌안을 밀어붙이지 못한 것도 이승만과 감히 맛설 만한
대통령 감이 없었던 탓이요, 이승만을 제거하고 싶었던 미국조차 ‘대체 인물’이 없는
한국의 정치현실에 진작 비밀작전을 포기하고 이승만과 타협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등록 마감이 임박해서야 민국당은 부통령을 사임한 이시영과 조병옥을
정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조병옥은 마감시간 5분전에야 허겁지겁 서류를 냈다.

무소속 조봉암은 공산당시절 이래로 자기만의 목표가 있었으므로 유일한 좌파후보였고,
부통령에 출마한 무소속 노동운동가 전진한은 이도저도 아닌 중간파로 분류되었다.

개헌과 함께 전국민이 ‘국부(國父) 이승만’을 추앙하는 일방적인 열기에 들뜬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은 맥이 빠졌으나, 난립한 부통령 후보들의 경쟁은 이상한 열기를 뿜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친(親)이승만’ 점수를 내세우는 이승만 덕보기 싸움이 벌어진 것.

“위대하신 민족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밀어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아니다, 내가 진짜 이승만 박사의 충성스러운 일꾼이다” “아니다, 나도 친히 점찍어 주셨다”
끼리끼리 치고받는 모습은 오랜 뒷날 ‘친DJ’ ‘친노’ ‘친박’ 현상의 원조라고나 해야 할까.

전쟁 중에 휴전협상과 남북통일등 국가적 과제가 발등의 불인데도 국정공약이나 정책경쟁은
찾아볼 수 없이 이승만의 선택받은 부통령이 누구냐에만 쟁점이 집중된 판이었다.


개헌 공신들 세력화...새로운 당쟁 조짐에 이승만 '쐐기'

집권 2기를 앞둔 이승만은 새로운 정국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문제점에 직면하였다.
이승만은 “나는 어느 누구도 부통령으로 지명한 일이 없다”는 담화부터 발표해야 했다. 

“여러 분이 부통령후보에 입후보하고 나서 대통령이 지명한 것처럼 자기편에 유리하게
선전을 하고 있다는데 나는 특별히 누구를 지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 말은 이승만-이범석을 추대한 자유당에 직격탄이었다. 이승만이 이범석을 친 것이다.

왜 그랬을까...옛날 왕권을 둘러싸고 죽자사자 덤비던 당쟁이 이승만을 둘러싸고 또 생겨나
개헌공신 다툼을 벌이는 신판 당쟁, 못 말리는 한국인의 당파 근성에 머리를 내두른 이승만은
원내외 자유당 파벌과 원외자유당내 세력다툼을 보다 못해 폭탄선언을 던졌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원외자유당내 민족청년단(족청)의 지도자 이범석은 끝내 재기할 수 없게 된다.

한발 더 나아가 이승만은 정쟁의 화근이 될 부통령 쟁탈전에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자신보다 2살 많은 심계원장(審計院長:현 감사원장) 함태영(咸台永,79세)을 사퇴시켜
부통령에 출마하라고 적극 권유하여 하루밤새 후보로 내세운 것이다.
정국은 또 한번 놀랐다. 전혀 뜻밖의 인물 함태영이 등장한 내막은 물을 것도 없다.
이범석의 득세를 막으려는 이승만이 진짜 점찍은 후보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 함태영이 이승만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누가 알까. 

1898년 만민공동회, 급진적인 왕정개혁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일이다. 이상재(李商宰) 등 7명이 함께 법정에 섰던 1899년 1월, 당시 그 재판의 검사보가 함태영.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동감하고 있던 그는 사형이 불가피해진 이승만을 도왔다.
“이들은 반역하려 한 것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국정 운영을 밖에서 돕고자하여...” 

유망한 청년들에게 사형은 부당할 뿐더러 가볍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었다.
검사가 아니라 변호사였던 셈, 함태영은 그 주장때문에 파면 당하고 말았다.

오랜 세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있던 이승만은 정부 수립후 그를 심계원장으로 앉혔다.

파벌 없고 당쟁 싫어하는 그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새 정치세력들의 싸움판을 무력화 시켜 보려는 이승만 스타일의 탕평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통령 후보 조병옥, “조봉암은 빨갱이, 사퇴하라"

찻잔 속의 돌풍처럼 대도시 중심으로 벌어진 선거운동 기간 중에 눈에 띈 것은
민국당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사상문제를 정면 공격하고 나선 것이었다. 

“조봉암은 공산당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나 마찬가지이며 즉시 사퇴해야 한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치는 것은 선거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로당 두목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고 ML(마르크스-레닌)당 활동과
소련과의 깊은 연대등 조봉암의 화려한 경력은 그가 해방후 1946년 ‘전향’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를 막론한 자유진영으로부터 이념적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뿌리깊은 조봉암 불신은 2년후 민국당이 민주당으로 확장할 때도 그는 왕따가 된다.

이런 조봉암을 이승만은 건국내각에 왜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였을까.

그것은 순전히 ‘농지개혁’을 서둘러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유상몰수-유상분배였지만 지주계급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으므로
계급투쟁 전문가 조봉암으로 하여금 토착지주들의 반발을 제압하려는 '견제 카드'였다.

노련한 정치의 달인 이승만의 묘수,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도 공산당 출신을 쓴다.
일찍이 공산당의 ‘평등주의만은 동감’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듯이
왕조시대부터 경자유전(耕者有田), 즉 농민에게 농지를 주자고 주창해온 개혁가 이승만에게
젊은 조봉암은 바로 이럴 때 써먹을 인재였다. 말하자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병법 카드,
동시에 친일파뿐만 아니라 공산당도 ‘전향하면 중용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 출범에 반대하는 일부 세력과 북한에도 보란 듯이 겨냥했을 것이다.

농림장관 조봉암은 그러나 역시 급진적인 농지 개혁안을 내놓아 논란을 일으키고,
이에 분노한 국회내 지주 자본가들은 조봉암의 ‘공금횡령’을 잡아내 쫓아내고 말았다.

‘출신은 속일 수 없다’는 공산당 말처럼 그후 조봉암은 좌파노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김일성이 남한적화전술로 내건 ‘평화 통일’ 깃발을 들고 진보당을 창당하는 중에
북한의 정치자금을 간첩을 통해 받은 혐의로 체포되어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의 시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조봉암 동정론과 더불어
좌파정권이래 친북파와 북한의 대남전술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대법원이 이 사형사건을 재심 끝에 무죄로 선고하였다지만,
그것은 ‘민간인 범죄를 육군특무대가 다뤘다’는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을 뿐,
조봉암도 인정한 북한자금 수령이 무죄라는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였다.
당시 특무대는 국군내 공산당을 잡아내는 방첩기관으로 설립된 강력한 권력기관,

정부, 국회, 언론, 기업, 교육기관등 주요 조직에 침투하는 간첩 수색이 주업무였다. 

휴전후 혼란상태에서 빈약한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도 벅찬 때였으니까.


이승만 72%득표 압승...부통령엔 새 얼굴 함태영 당선

드디어 8월5일, 직선제 투표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 역시 유엔이 감시하였고 전국을 돌아본 언커크는 “평온한 성공”이라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예상대로 압도적인 승리, 전남 광주에서만 민국당 이시영에게 뒤졌을 뿐,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지지를 얻어 총 유효투표의 72%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승만 523만8,769표, 조봉암 79만7,504표, 이시영 76만4,715표, 신흥우 21만9,696표.

특이한 것은 부통령에 함태영이 이범석을 크게 누르고 당선된 것이었다.

함태영 294만3,822표, 이범석 181만5,692표, 조병옥 57만5,260표 등이다.

자유당에서 이승만-이범석 티켓을 내놓아 이범석이 당선 될 줄 알았던 예상보다
100만표 이상 차이로 함태영이 압승하자, 이범석-장택상 암투관계가 증명되었다며 수근거렸다.

건국때부터 총리와 장관자리를 주고 받으며 이승만 정부를 이끌어온 ‘영원한 맞수’의 선거전,
총사령탑 국무총리 장택상은 라이벌 이범석의 선거운동을 알게 모르게 견제하며
이승만의 숨은 카드 함태영을 일방적으로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유진산(柳珍山)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선거판에서 ‘압 철기, 부 송암(壓鐵驥, 扶松岩)’이란
암호가 돌아다녔는데 이것은 ‘철기 이범석을 누르고, 송암 함태영을 도우라’는
장택상의 지령문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사람의 갈등은 50년대 내내 이어진다.

국민의 손으로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내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지만 국민 대다수가 또 한 번 수고해달라고 희망하는 모양이니
은퇴하고 싶은 소원을 버리고 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4년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나는 미국 친구들의 협력과 국민의 충실한 지지를 얻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직선제의 성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이승만이 “은퇴하고 싶다”는 말을 또 하고 있다. 

지난 1년간 그는 직선제 개헌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할 때마다
“나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니 많이들 출마하시오”라는 담화도 발표하였고 
“직선제 헌법을 만드는 일이 평생의 마지막 목표” “이것만 이루면 그만둔다”
“대통령직에 있을 때 꼭 해야겠다” 등등 정치계와 미국대사에게까지 몇번 말해왔다.

야당에선 이것을 이승만의 말장난이나 속임수로 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승만은 자의건 타의건 결국 출마하였고 국민들은 엄청난 지지표를 던졌으니까,

"내 일생 50년은 투쟁이었다" 중상모략 정적들 비난 

이승만은 공식적인 당선 성명을 국민을 향해 발표하였다.
그는 왜 그동안 출마 않겠다고 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밝히고 있다.

“첫 째 나의 나이가 출마를 거부합니다. 내 나이가 많아서 나보다 젊은 사람이 나와
더 낫게 하기를 바랐던 것인데...내가 젊었을 적에 혁명가로 나서 자유를 위하여 싸워온 이래
50년간 내 평생은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이제는 싸우기가 귀찮아졌습니다”라고 토로하였다.

독립운동 시절 흥사단과 공산당등 반대파들의 집요한 방해와 중상모략,
해방후 귀국하여 미국의 좌우합작 압력과 싸울 때 배신한 김구등 임정세력 등등,
그리고 공산당과 전쟁하면서 지금 또 국회와 끈질기게 싸웠으니
80을 바라보는 노인 대통령이 이젠 쉴 때도 벌써 지난 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는 매양 싸우지 않고는
안되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나와 경쟁한 이 분들의 목적은 오직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괴상한 말로 세계에 전파하기를 내가 국회를 무력을 써서 해산시키고
딕테이터(독재자)가 되려한다는 등 허무한 소리가 이 이들중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헛된 말들을 듣고 민중은 대단히 분개하였고 민중의 힘으로 개헌이 되었습니다.
나는 진리와 대의는 언제든지 승리하고 만다는 것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평민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생각을 양보해서 민족의 사명에 복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패배자들에 대한 승리자의 말로서는 매정하게 들리지만 지극히 솔직한 고백이었다.

경쟁자에의 승리가 아니라 진리와 대의가 승리했다는 이승만의 말은
이번 선거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평생의 독립투쟁과 대한민국 건국이란 승리를 통해
거듭거듭 확인한 자유민주주의 투사로서 뼈속까지 녹아든 기독교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통일 없이 공산당과 한땅에서 살수 없다" 취임사 선언

8월15일 제2대 대통령 취임식은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아직 환도 전이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취임식을 검토하였으나 이승만은 서울을 택했다.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취임일뿐더러 휴전협상 중의 취임식인지라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에서 휴전반대와 국토통일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이날도 배은희(裵恩希) 목사의 기도로 시작한 행사에서 선서를 마친 이승만은
취임연설을 통해 일선장병과 참전 연합국에 감사하고 특히 자유세계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국제연합 제국과 우리의 가장 친한 우방인 미국이 여러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이니 즉 우리 대한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 남북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맺힌 결심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 가에 달린 것입니다.
한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단이 되거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제국주의를 허락해서 길러주고는 자유를 지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공산제국주의는 전세계의 자유민족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이니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모든 나라들의 승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가 될 것입니다.
자유세계의 단결은 누가 깨트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치는 힘이 클수룩
모든 반공국들의 공동안전을 위하는 단결심이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과 일부라도 공산당의 점령 상태로는 살수 없다’고 단언한다는 말은
이후 이승만이 휴전반대 투쟁에서 미국에게 일관되게 보여준 통일의지였다.
이듬해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동맹 체결에 이르기까지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절규는
구호 아닌 약소국 생존 키워드, 미국도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벼랑끝 전술’로써
목숨을 걸고 자유대한의 안보장치를 확립하려는 국가생존 독립투쟁의 일환이었다.

이날 취임사에서 이승만은 부산개헌파동을 설명하며
‘민주주의에 나의 생명을 걸겠다’고 맹세하고 있다.

“나의 개인 멧세지로서 우리 국민과 또 친구들인 우리 연합국들에게 한마디 하려합니다.

내 평생은 우리나라의 운명과 같아서 낙관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해온 것인데

어떤 때는 앞에 장해가 너무 커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

1882년 한미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쇠락하여 가는
군주정치의 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싸워왔던 것입니다.

지금 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사람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민주정부를 세워
민의에 굳건한 토대 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친구들이 우리를 호위하고 있는 이때에....(중략).....이제야 겨우  공화민주국가로 되어 지나간 4년 만에 처음으로 민국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내가 60년동안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안전과 자유와 통일이
민주국가 틀 안에서 굳건히 성립되는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소위 정치파동은 손바닥안의 미풍 같은 것으로서....다행히 우리 국민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
힘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이제는 대통령선거권을 국회에 맡겨두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민주주의가 강력하게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모든것을 바쳐 헌신을 다할 것을 다시금 선서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잠깐! 이날의 경축식을 1~2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광복절과 독립기념일 그리고 제2대 대통령 취임의 날을 알리는 인경소리로 15일의 아침이
밝자 3년 만에 활기를 회복한 서울의 거리는 물 끓듯 끓어올랐다.

가가호호에는 일제히 태극기가 나부끼고 먼데서 이날의 성전을 바라보며 축하하려는 시민들은
중앙청 앞으로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성장한 기마경찰대를 선두로 이대통령이 육군군악대의 주악속에 아직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중앙청 앞 식장에 도달하자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식과 동시에 오전10시 정각 장엄한 식전이
개막되었다. 2대대통령의 선서를 위하여 신익희 국회의장이 국회의 개회를 선언하니
6대의 비행기가 ‘축 대통령 취임’의 푸랑카드를 나부끼여 지상과 호응하여 축복을 올리는 속에
이대통령은 국민에게 직책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할 일 국민들이 해야할 일을 차근차근 말하고 나서 원래(遠來)한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대장을 소개하자 동 장군은 ‘한국을 비롯한 자유세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세계인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사 표시와 대통령의 재선을 축복하였다.
그리고 난후 총무처장으로부터 이대통령에게 대통령기가 진정되고 이화여자중학교 합창단의
합창, 이대통령과 동부인, 부통령 및 클라크 장군과 동 부인에게 각각 화환이 증정되고 나니
장 국무총리 선창의 ‘대한민국 만세’ ‘이대통령 만세’가 각각 3창된 후 식전을 끝마치었다.]


당시 언론 '광복절=독립기념일' 표현...지금은 '건국절'도 부정

기사 첫머리에 나오는 [광복절과 독립기념일]이란 표현이 눈을 사로잡는다.

그때만 해도 모든 국민과 언론은 8월15일 광복절은 곧 독립기념일로 인식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기사를 쓰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국 이듬해 1949년 정부가 국경절을 제정할 때 건국한 8월15일을 ‘독립기념일’로 정하였고
해방은 한국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승리로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수동적으로 얻어진 것일 뿐이기에 따로 기념일을 정하지 않았다. 이 법안을 국회가 법제화면서 명칭만 ‘광복절’로 바꾸었고
해마다 그렇게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왜 ‘광복절과 독립기념일’이라 분리 표현하였는가.
광복절엔 ‘해방기념일’이란 개념이 포함되었던 탓이다.
이승만이 설명하였듯이 독립정부수립으로 건국이 완성되었으므로 건국선포식 행사를
일제패망 해방의 날 8월15일에 거행하여 두 가지 기쁨을 하루에 곱절로 경축하자는 취지였으며, 국회가 설명하였듯이 ‘해방’과 ‘독립’ 모두 광복으로 표현될수 있으므로
4대국경절 3.1절, 제헌절, 개천절에 맞춰 광복절로 운을 맞춰 작명하자고 공감하였던 것이
 ‘빛을 다시 찾은 날-光復節’인 것이었다.

이와같은 ‘광복절=독립기념일‘ 명칭에서 언제부터인지 ’독립‘은 빠지고 ’해방‘만 남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독립한 8월15일을 ‘독립기념일’이라고 쓰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러니까 1945년 해방만 광복절로 기산(起算)하고 1948년 건국기념일을 기점으로는 몇주년 숫자를 계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 12년간 신문들을 보면 8월15일마다 ‘건국기념’ 보도를 찾아볼 수 있다. 1958년 8월15일엔 ‘건국 10주년’ 특집 기사들이 요란하다.
기념식은 물론, 꽃전차, 시민예술제, 건국동이 선발대회, 건국 백일장 등 푸짐한 잔치를 벌였다.


지난 몇년간 ‘건국절’ 부활-제정 운동이 한창인데, 이상하게도 임시정부세력의 3.1운동 주장과
좌익세력의 대한민국 불인정 억지에 밀려 정부는 이 눈치 저 눈치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자기 생일도 없는 부끄러운 나라, 이러다가 어느 틈에 대한민국이 지워지지않을까 걱정스럽다.
주말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재촉하는 촛불데모를 보면 애국가 소리도 들리지 않고
태극기도 찾아 볼수 없는 지경이라 북한의 촛불 응원가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각설하고, 직선제로 선출한 새로운 헌법의 탄생과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으로써
 ‘부산정치파동 40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4년전 헌법 제정 때부터 시작된 개헌파동을 기어이 ‘대통령 직선제’로 끝내버린
대통령 이승만의 무서운 집념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독재욕심일까.
누가 말했듯이 ‘자기가 대통령 하려고, 종신 집권하려고’? 정말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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