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할 때 업히고, 힘빠지면 등짝 걷어차는 정치는 안하겠다"보수 진영의 호남 편견 걷어내기 위해 '죽는 길' 자처한 결단
  • ▲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11월 22일 당사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11월 22일 당사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된 이후 친박 지도부 총사퇴를 놓고 새누리당이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던 두어 달 전 무렵이었다.

    이정현 의원이 단식 농성을 하다가 입원했을 때 비밀리에 병문안을 갔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인 야당의 호남 중진의원은 "이 대표, 내려놔야 된다"고 설득했다. "지금 (대표직을) 내려놓아야 이 대표가 산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또다른 호남권의 중진의원은 "이 대표는 끝까지 대통령 저버리지 말라"며 "'전라도놈'이 뒤통수 때린다는 말 나오지 않게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2일 새누리당 탈당을 선언한 이정현 의원은 구용상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구용상 전 의원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전남 담양·곡성·화순에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민한당 고재청 전 의원에 이어 2위로 당선됐다. 당시에는 한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실시되고 있던 덕분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8년 공선법이 바뀌면서 소선거구제가 실시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평민당 홍기훈 전 의원에 밀려 꼼짝없이 낙선했다. 구용상 전 의원은 관례적으로 원외(院外)에서 맡는 제2사무부총장으로 이동했다. 이 때 갈 곳을 잃은 자신의 비서관 이정현 의원을 당직자로 밀어넣었다.

    반발이 거셌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공화당을 창당했을 때 "정치판은 반칙이 난무하는 곳이라, 당직자를 아무렇게나 뽑다보면 다들 자기 사람을 심느라고 당이 망한다"며 "공채 외에는 절대로 당 사무처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없도록 하라"고 엄명했다.

    이후 공화당을 연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은 당직자 공채를 원칙으로 하는 문화를 지켜왔다. 지금도 새누리당 당직자들은 서로 공채 기수를 묻고 답하는 문화다. 구용상 제2사무부총장의 우격다짐으로 간사병(丙)으로 들어앉게 된 이정현 의원이 겪었을 눈총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새누리당 핵심당직자는 "당 안에 호남 출신 당직자 모임인 '남도회'가 있는데, 그 '남도회'에서조차 이정현 의원은 공채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동안 끼워주지조차 않았다"며 "이회창 총재, 서청원 대표 시절 3쪽짜리 정세분석 보고서로 유명할 때에도, 보고서는 다투어 복사해갈지언정 평판조회를 하면 '호남이다' '공채 출신도 아니다'는 폄하부터 나왔다"고 회고했다.

    천하(天下)에 뜻을 두고 있던 한명회는 나이 마흔에야 비로소 음서(蔭敍)로 8품 경덕궁직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경덕궁(敬德宮)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개성에 살던 사저(私邸)인데 이를 관리하는, 능참봉이나 다를 바 없는 미관말직이다.

    한양 출신으로 개성에서 근무하는 벼슬아치들이 '송도계'라는 모임을 만들자, 한명회도 끼워달라고 했는데 이들은 "음서가 어딜 같이 끼려고 하느냐. 경덕궁직도 벼슬이냐"고 모욕하며 내쳤다. 이렇듯 한명회가 겪던 설움을 똑같이 겪던 이정현 의원은 스스로 이 시절을 "등 뒤에서 모두가 나를 비웃던 시절"이라고 토로했다.

    이회창 총재 시절이었던 2000년대 초반, 당직자 한 명이 공석이 된 당협의 위원장직을 얻어 나가게 됐다. 환송회에 참석한 이정현 의원은 연신 "참말로 부럽다"며 "나는 언제쯤 이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증언했다.

    도저히 당협위원장을 얻을 가망이 없자 이정현 의원은 2004년 광주 출마를 단행했다. 광주는 지금도 험지(險地) 중의 험지인데, 하물며 전국이 탄핵 광풍에 휩쓸려 있던 당시에는 그야말로 가망이 전혀 없는 출마였다. 당시 광주 7개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공천 후보는 그 혼자였다.

    천막당사를 치고 총선을 이끌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런 그를 눈여겨봤다. 총선이 끝난 뒤 낙선자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이정현 의원은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달라"고 호소했다. "어쩌면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냐"고 답한 박근혜 위원장이 그를 단숨에 요직인 수석부대변인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뒤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을 거쳐 2014년 7·30 전남 순천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이정현 의원은 올해 4·13 총선에서 어려움을 뚫고 3선 고지에 올랐다. 8·9 전당대회에서는 마침내 집권여당의 당대표가 되면서 '자기정치'를 할 기반을 마련했다.

    10월말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됐을 때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자연스레 홀로 서는 것이, 호남 중진의원이 설득한대로 그 자신의 '사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는 길'을 택하지 않고 일부러 '죽는 길'을 걸었다. 모두가 사퇴하라고 성화인데도 대표직을 붙들고 있다가, 마침내 2일에는 '인적 쇄신'의 대상으로 떠밀리듯 탈당하기에 이르렀다. 대체 왜일까.

  • ▲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11월 22일 당사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대표 시절이던 지난 11월 22일 당사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이와 관련해 당 내홍이 한창이던 지난 11월 22일, 당사 기자간담회에서 이정현 의원이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다른 질문에는 다 거침없이 비판하고 목소리 높여 반박하던 이정현 의원은 지역구인 순천에서 의원직 사퇴 촉구가 나왔다는 질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상황이 좀 달라졌다고 하루 아침에 표변을 해서 자신을 업어줬던 그 등짝에 발길질을 하는 정치는 하기 싫다"며 "그게 잘못됐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감내하겠다"고 답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의지했던 뭔가가 힘이 빠지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고 해서, 필요할 때는 업어달라고 하고, 상대방의 힘이 빠졌을 때는 등짝을 발로 걷어차서 내쫓는 비정의 정치, 배신의 정치…… 나는 그런 얄팍한 수와 계산의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전라도놈'이 뒤통수 친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라"고 했다는, 또다른 호남 중진의원의 당부가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이정현 의원의 당무 생활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그가 호남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공채가 아닌 특채로 당직자로 들어간 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라 그렇다 쳐도,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 호남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당직자로 들어온 이후,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서 그가 몸담은 당은 '호남의 영웅'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호남 출신으로서 중용되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을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호남 출신으로 검찰을 거쳐 정계에 입문한 야당의 중진의원은 '검찰총장' 감이라는 평을 들었다. 실력으로 보면 중앙에서 요긴히 활약해야 맞는데도, DJ가 대선에 출마할 때만 되면 난데없이 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검찰도 그러한데 '싸움의 당사자' 격인 정당은 오죽했을까. 자신의 약점은 숨기고 상대의 약점은 찔러야 하는, 비밀이 많은 정치판이다. 평소 실력은 높이 평가받다가도 막상 당직자가 날개를 펼쳐야 할 큰 선거만 다가오면 핵심 비밀에 접근하기 어려운 한직으로 돌 수밖에 없는 숙명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정현 의원은 '3쪽 정세보고서'로 유명하던 이회창 총재 시절에도, 서청원 대표 시절에도 막상 눈에 띄는 핵심 보직은 맡지 못했다. 그 운명의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게끔 업어준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편한 지역구에서 어렵잖게 다선(多選)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관료나 판사 출신으로, 또는 '부잣집 도련님'이나 '2세 정치인'으로 레드카펫을 깔고 국회로 입성한 사람들은 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등을 돌릴 수 있어도, 이정현 의원이 등을 돌리면 "역시 호남 사람이라 어려울 때 배신한다"는 둥 "뒤통수를 친다"는 둥 별별 말이 다 나왔을 것이다. 여권을 지지하는 보수계층 사이에서 호남에 대한 편견은 한층 짙어졌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죽는 길'을 향한 그의 선택은 단순히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봉건적 충성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서 보수 진영이 갖고 있는 호남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보수 진영에 몸담고 있는 호남의 후배들을 살리는 길을 택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정현 의원의 숭고한 결단이 한 줌도 안 되는 세력의 사리사욕(私利私慾) 탓에 빛이 바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국회의장은 틀린 것 같으니, 9선이라도 해서 역사에 내 이름 한 줄을 남겨야겠다'거나 '경제부총리까지 하고 이제 대권 도전 좀 해보려는데, 차라리 죽이면 죽었지 내가 스스로 자진(自盡)할 수는 없다'고 반발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정현 의원은 호남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박근혜 대통령을 구하고, 보수를 살리기 위해 한몸을 던졌다. '친박 핵심' 몇몇을 살려보려고 얕은 수를 쓴 게 아니다.

    전직 당대표의 숭고한 결단까지 자기자신의 무가치한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사석(死石)으로 여기면서, 어떻게 정치공학적으로 이것을 끝까지 활용해볼까 하는 궁리를 갖고 있다면 당장 그러한 생각을 버리고, 이제는 결자해지의 결단으로 뒤를 이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