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청와대서 한솥밥 먹었던 반기문·김무성·정병국 등 조문 잇따를 듯
  • 13일 향년 69세로 타계한 박세일 전 의원. ⓒ뉴데일리 사진DB
    ▲ 13일 향년 69세로 타계한 박세일 전 의원. ⓒ뉴데일리 사진DB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수많은 화두 또는 아젠다가 있다. 그 중에 몇 개를 꼽아보면 이렇다. 산업화·민주화·정보화·세계화…

    이러한 화두 중 「세계화」란 개념을 정책 목표로 구체화한 선구자, 박세일 전 의원이 13일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향년 69세.

    대한민국이 건국한 1948년 서울특별시에서 출생한 박세일 전 의원은 서울고와 서울대 법대를 거쳐 일본 도쿄대(동경대) 대학원과 미국 코넬대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산업은행 조사부,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연구원을 거쳐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를 맡았다.

    상아탑에서 정치권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발탁 때문이었다.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세일 전 의원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전격 발탁했다. 이후 사회복지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김영삼정부의 5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내내 청와대에서 일하며 깊은 신임을 받았다.

    YS의 대표적 구호였던 '세계화'를 구체적인 정책 목표로 승화시킨 것은 이 때 있었던 일이다.

    김대중정부 시절 정치와 거리를 둔 채 학문에 열중하던 박세일 전 의원은 2002년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생의 파탄이 심화되자 다시 정치권에 복귀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을 받아 당선됐다. 이후 초선 의원인데도 정책위의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미 좀 봤다"고 털어놓은 망국적 수도분할을 앞장서서 반대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 충청표를 의식한 한나라당 박근혜 당시 대표와 충돌을 빚었다. 논란 끝에 행정중복도시특별법이 국회에서 의결되자, 전격적으로 탈당을 선언했다. 비례대표로서 탈당했기 때문에 의원직은 이 때 당연 상실했다.

    이후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창립해 이사장을 지내며, 보수의 개혁과 혁신에 대한 지속적인 화두를 제시했다.

    2014년 7·14 전당대회를 통해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의 자리에 오른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은 삼고초려를 통해 박세일 전 의원을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장으로 영입하려 했다.

    김무성 의원의 거듭된 간청에 박세일 전 의원도 생각을 바꿔 수락했으나, 새누리당 내부의 고질적인 계파 갈등과 패권주의가 문제였다. 박세일 전 의원의 여의도연구원장 임명의 건은 서청원 당시 최고위원을 필두로 하는 친박계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뤄지지 못했다.

    박세일 전 의원은 범(汎)보수 진영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인연이 있다. 박세일 전 의원이 YS 청와대에서 사회복지수석비서관을 지내고 있을 때, 반기문 전 총장은 의전수석비서관과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같은 시기 청와대 제2부속실장이던 바른정당 정병국 중앙당창당준비위원장과도 깊은 인연이다.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은 이에 앞서 박세일 전 의원이 정책기획수석일 때, 민정수석과 내무차관을 지냈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말도 흘러간 옛말이 될 정도로 '백세시대'가 도래한 요즈음에, 박세일 전 의원이 향년 69세로 타계한 것은 너무 이르다는 한탄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보수정당으로 바른정당이 태동하고, 반기문 전 총장이 10년 만에 귀국해 '정치의 교체'를 모색하는 시기라 박세일 전 의원이 모처럼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섰다. 평소 한반도선진화재단을 통해 부르짖은대로 '깨끗한 보수, 따뜻한 보수'라는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 상황에서, 박세일 전 의원의 타계는 너무나 안타깝다는 지적이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오는 17일 오전 7시에 엄수된다.

    박세일 전 의원은 독실한 불교도로, 법명은 청담스님으로부터 받은 영성(領星)이다. 서울대 법대에 재학하던 시절에는 삼보장학금을 받으며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으며, 방학 중에는 봉은사에 마련된 대학생수도원에서 생활하며 주지 광덕스님 밑에서 조석예불과 독경, 참선 등을 했다.

    생전 3000배를 올려야 만나주던 성철스님을 직접 만나 수행하기 위해 3000배를 올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후 법정스님을 지도법사로 삼아 불교를 공부했으며,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박세일 전 의원의 생전 유지에 따라 장례는 불교식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장지는 바른정당 김학용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 안성에 소재한 도피안사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