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박세일 빈소서 "한국이 우뚝 설 수 있도록 한 노력에 경의"문재인, 신영복 추도식서 "촛불들과 세상 꼭 바꾸고 보고드리겠다"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5일 오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세일 전 의원의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바치며 고인의 타계를 애도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5일 오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세일 전 의원의 빈소를 찾아 국화 한 송이를 바치며 고인의 타계를 애도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세계화(Globalization)냐, '우리 민족끼리'냐.

    범(汎)보수 진영과 범좌파 진영에서 각각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지향하는 가치가 '조문정치' '추도정치'를 통해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반기문 전 총장은 15일 오후 박세일 전 의원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신촌세브란스병원을 찾아 고인의 타계를 애도했다.

    고 박세일 전 의원은 김영삼정부 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발탁돼, '세계화'를 구체적인 정책 목표로 승화시켰다. 역시 같은 김영삼정부 때 청와대 의전수석과 외교안보수석으로 일한 반기문 전 총장과는 인연이 깊다.

    또, 반기문 전 총장이 결국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유엔사무총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을 감안하면 '세계화'를 정책 목표로 옮긴 박세일 전 의원의 선견지명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관계를 반영하듯 이날 반기문 전 총장이 남긴 글은 빈소 방명록에 작성하는 글로써는 이례적으로 길었다. 반기문 전 총장은 "21세기 한반도에서 한국이 우뚝 설 수 있도록 노력한 고인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며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한국사회의 대통합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반기문 전 총장을 수행한 박진 전 의원은 "반기문 총장은 귀국 후 박세일 전 의원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귀국한지 사흘 만에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며 "'구현(求賢)과 선청(善聽)이 정치 리더십의 요체라는 박세일 전 의원의 글을 읽고 전화를 했지만 이미 병원에 있었는지 통화할 수가 없었다더라"고 전했다.

    이날 빈소에서는 반기문 전 총장과 바른정당 강길부 의원과의 만남과 짧은 대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바른정당 정병국 중앙당창당준비위원장은 박세일 전 의원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사회복지수석을 지내고 반기문 전 총장이 의전수석·외교안보수석일 때, 제2부속실장으로 청와대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은 박세일 전 의원이 정책기획수석일 때 민정수석을 지냈다.

    바른정당은 전날 장제원 대변인 명의로 "고 박세일 교수는 학자로서 한반도 선진화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대표적 이론가였고, 정치인으로서 개혁적 보수의 이념을 실천한 강단 있는 정치인이었다"며 "고 박세일 교수의 명복을 빈다"는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원내교섭단체 4당 중 가장 강경한 자세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관철하려 하고 있고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른정당은, '세계화'를 주창한 박세일 전 의원 및 이날 평택2함대 방문에서 사드 배치의 필요성을 역설한 반기문 전 총장과 연결고리가 풍부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박진 전 의원은 반기문 전 총장과 강길부 의원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15일 오후 서울 구로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 열린 신영복 전 교수의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한 뒤, 자리로 돌아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15일 오후 서울 구로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 열린 신영복 전 교수의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한 뒤, 자리로 돌아와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한편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같은날 오후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 열린 신영복 사망 1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영복 전 교수의 1주기를 추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영복 전 교수의 추도사를 낭독한 문재인 전 대표는 이후 학내에 마련된 '신영복 추모공원'으로 이동해 추모공원 조성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고 신영복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의 핵심간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1960년 4·19 혁명이 대한민국의 공산화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를, 혁명을 지도할 지하당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1964년 연두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3대 혁명역량 강화방침'을 의결했다.

    이는 한반도 내의 '민주기지'인 북한의 역량을 강화해서 대한민국은 무력 침공으로 무너뜨린다는 종래의 방침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자체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도록 혁명역량 강화를 조장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1964년 3월 지하당으로 조직된 것이 통일혁명당이다. 통일혁명당 기관지인 〈혁명전선〉은 3월 15일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식을 자세히 보도했다.

    〈혁명전선〉은 "1964년 3월 15일 역사적인 날, 김질락·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고,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훨씬 고조됐다"며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 교시한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어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보게 됐다"고 전했다.

    김종태·김질락·이문규와 함께 신영복 전 교수를 핵심간부로 하는 통일혁명당은 지하기관지 〈혁명전선〉과 대중지로 위장한 〈청맥〉을 함께 발간했다. 주요 대학가에서는 학사주점을 운영하며 공산혁명역량 강화를 모색했다.

    실체가 드러난 것은 1968년 8월이었다. 통혁당에 지령을 하달하러 오던 북한공작선이 나포된 것이다. 이에 따라 통혁당의 당수 김종태가 4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면담하며 통혁당을 조직하고 이끌었다는 게 간파됐다.

    당시 신영복 전 교수 등 158명의 연루자가 검거됐으나, 북한의 직접 지령을 받는 가장 광범위한 지하당 조직이었던만큼 일망타진이 되지는 못했다. 실제로 이후로도 통혁당 재건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1979년에도 통혁당 강원도당 재건위원회가 적발되기도 했다.

    일부는 비밀리에 월북했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1969년 김종태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자, 북한은 즉시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평양에서 대규모 추도집회를 거행했다. 평양전동차공장은 '김종태전기기관차공장'으로, 해주사대는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됐다.

    1970년 6월부터는 〈통일혁명당의 소리〉라는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구국의 소리〉로 이어진 대남방송의 시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이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될 때, 이대용 공사 등 주베트남대사관 공관원 3명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억류됐다.

    중립국인 인도 뉴델리에서 대한민국과 공산베트남, 북한이 참여하는 '억류 공관원 석방을 위한 3자 회담'이 개시됐는데, 이 때 북한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 전 교수와 억류 공관원의 교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교섭은 1979년 중공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공의 종속국인 북한과 공산베트남과의 관계도 악화됨에 따라 중단되고, 베트남은 1980년 아무 조건 없이 우리 공관원 3명을 석방했다.

    신영복 전 교수는 1988년 서울올림픽과 동서 해빙, 냉전 종식의 분위기를 틈타 가석방됐지만, 이후 2003년 〈황해문화〉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민족의 내부결속과 단결을 통해 주체성을 강화했다"고 평가한 반면 "남한은 개방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종속화됐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1995년 〈통일, 그 바램에서 현실로〉에 게재된 글에서도 "북한 체제에 대해 살펴보면, 민족자주·자력갱생의 기초 위에서 사회정치적인 안정과 전후의 경제적 회생을 이룩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이같은 인물의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눈물을 흘린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전 대표는 추도사에서 "(신영복) 선생님이 '사람이 먼저다'를 글씨로 써서 보내줘서 지난 번 대선 내내 사용을 했는데 결국 패배해, 선생님을 뵈었을 때 너무 송구하고 죄송스러워했다"며 "그 때 선생님은 '이긴 것이나 진배 없다'며 '다음에는 꼭 이길 것'이라고 말해줬다"고, 고 신영복 전 교수와의 각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뜻대로 많은 촛불들과 함께 더불어 정권교체하고 세상을 꼭 바꾸겠다"며 "내년 2주기 추도식 때는 선생님이 뜻하셨던 '더불어숲' 이제 이뤄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