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 기각했다고 법관 가족 신상까지 터는 세상...민주주의는 이미 끝났다
  • 민변 권영국 변호사 페이스북. ⓒ 화면 캡처
    ▲ 민변 권영국 변호사 페이스북. ⓒ 화면 캡처


    “삼성장학생 추정 조의연 판사 전화번호. 전화 5통씩만.”
    “삼성장학생 조의연을 구속하라.”
    “삼성장학생이 아니라 부역자다.”

    -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영장을 기각한 담당 판사를 비난하며, 판사실 전화번호를 올려 놓은 트윗.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영장 기각은, 이미 예상된 엄혹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구속=유죄, 불구속=무죄’라는 영장제도에 대한 몰이해가 뿌리 깊은 우리사회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 기각은 법원, 특히 영장심사 전담 판사에 대한 ‘테러’ 수준의 사이버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예견돼 왔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이 부회장에 대한 영장기각 소식이 전해진 19일부터 지금까지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해당 법관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욕설이 넘쳐나고 있다. 법원이 공식적으로 나서 ‘사실무근’이란 해명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해당 법관이 ‘삼성장학생 출신’이라거나 ‘아들이 삼성에 입사했다’는 식의 근거 없는 루머가 퍼지고 있다.

    인터넷 안에서의 폭력은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 영장기각을 비난하는 누리꾼 가운데 일부는, 인터넷에 해당 법관의 판사실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법원의 영장계 전화번호까지 올려놓고 비난 및 항의전화를 선동하고 있다.

    실제 서울중앙지법에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영장 기각 이후 항의·비난 전화가 폭주해,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면서 진화하고 있는 비난 여론은,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탈을 뒤집어 쓴 채 인민재판을 주도하고 있다.

    법관이 영장을 기각했다는 이유로, 그와 그의 가족이 인격살인 수준의 비난과 위협을 받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미 이 나라는 헌법 제1조가 천명한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실체를 잃었다.

    ‘민중’과 ‘민주주의’라는 완장을 찬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폭력성을 더해가고 있다. 그 폭력성은 속칭 진보진영 사람들이 신(神)처럼 떠 받드는 ‘광장의 촛불’과 만나 더 잔인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 이성과 균형감을 상실한 언론사 기자와 일단의 변호사, 여의도 정치권이 힘을 보태면서, 마침내 폭력이 정당성을 얻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민변 권영국 변호사 페이스북. ⓒ 화면 캡처
    ▲ 민변 권영국 변호사 페이스북. ⓒ 화면 캡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권영국 변호사는 “이재용 부회장 영장기각에 분노해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노숙농성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민변 노동위원장 출신의 그는 “법기술을 동원한 판사의 말장난으로 특권을 옹호하는 현실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며, 법위에 군림하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사법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노숙농성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는 “뇌물죄의 핵심 주범을 구속시키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살리려면 국민이 다시 나서야 한다”며, “삼성재벌 총수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 달라. 광화문 광장에서 힘껏 외치자”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의 주장은 그의 직업 혹은 신분이 변호사라는 사실을 의심케 한다. ‘법치’에 대한 터럭만큼의 존경심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법관이 고심 끝에 내놓은 ‘법리’를 “법기술을 동원한 말장난”이라고 비하하면서, 우리 헌법이 정한 영장제도의 대원칙을 대놓고 무시했다.

    경악할만한 사실은 그가 “삼성재벌 총수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 달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이 주장은 反헌법을 넘어 우리 헌법의 기본핵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법치’를 사실상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인에 대한 구속과 처벌을 위해서는 국민의 힘이 필요하고, 국민들이 광장에 나와야 한다면, 법령도, 법령을 적용할 사법부도, 질서와 치안을 담당할 정부도 필요 없다. 결국 그가 법원에 요구하는 것은 인민재판이나 다름이 없다.

    그가 조금이라도 ‘법치’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이런 식으로 법원을 욕보일 수는 없다.

    이런 사람의 입에서 ‘사법정의’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서글픈 코미디다. ‘법치’를 무시하면서 민주주의와 사법정의를 외치는 행태야말로 궤변이며 말장난이다.

    ‘민중’이 요구만 하면 그것이 ‘절대 善’이고 정의가 되는 세상은, 우리 헌법이 그린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표지.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표지.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구속제도는 형사재판절차가 끝날 때까지 실체적 진실발견을 위해 부득이한 경우,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 그를 일정한 장소에 유치하기 위한 제도다. 즉 당사자를 일정한 장소에 구금하지 않으면, 그가 사건 관계자들과 입을 맞추거나 증거를 인멸하거나 혹은 도주를 할 우려가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당사자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일정기간 제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는 형벌이 아니며, 특정한 사정이 있다면 결정을 취소하거나 집행을 정지시키거나 보석을 허용할 수도 있다.

    물론 구속 여부는 범죄 성립의 여부와 무관하다. 유무죄 판단과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구속은 언제나 제한적이어야만 한다.

    범죄 성립 여부를 두고 검찰과 피의자 사이에 다툼이 있고, 학계나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면,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구속을 하지 않는 것이 영장제도의 기본원칙이다.

    검찰이 피의자에게 적용한 뇌물죄의 구성요건인 ‘대가관계’에 대한 소명이 부족했다면, 영장 청구는 처음부터 무리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뇌물공여자에 대한 구속비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현실까지 고려하면, 법원의 영장 기각 판단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 대상은 법원이 아니라 무리하게 법리를 적용한 박영수 특검이다.

    현재 벌어지는 해당 법관에 대한 무자비한 비난과 협박은, 익명에 의지한 비겁한 집단적 폭력이며, 민중의 이름을 빌린 ‘떼’의 횡포일 뿐 민주주의 수호나 사법정의 실현과는 관계가 없다.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이런 폭력적 현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폭력은 재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폭력적 행위에는 엄정한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재용 부회장 영장 기각을 계기로 확인된 군중의 잔인한 폭력성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법관의 독립성도, 판결의 독립성도 지킬 수 없다.

    2015년 5월1일 서울 안국역 사거리에서 벌어진 세월호 폭력사태 당시, 경찰은 시위현장에서 경찰버스를 부수고, 경찰관들에게 주먹을 휘두른 극렬 시위 가담자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이 가운데 2명에게만 영장을 발부하고 나머지 1명에 대해서는 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한 금속노조 조합원 이모(35)씨는 현장에서 경찰방패를 뺏고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검거됐다. 그는 과거 화염병 투척 전과까지 있는 ‘전문시위꾼’이었으나, 당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범죄혐의 소명 정도와 수사진행 경과에 비춰볼 때, 구속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반면 경찰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한 이모(55)씨에 대한 영장 심사를 맡은 다른 전담판사는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영장 발부 여부에 대한 판단은 한명 한명이 독립된 사법기관인, 법관이 내리는 고도의 재판행위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으며, 정치가 개입될 여지는 더더욱 없다.

    광장의 촛불이건 태극기건, 영장 발부 여부에 대한 법관의 판단은 언제나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법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