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투쟁 당시 일본 7개 중앙지는 공동사설… 의회주의 수습 강조
  • 1960년 안보투쟁 당시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있는 일본 시위대의 모습. ⓒ위키피디아 DB
    ▲ 1960년 안보투쟁 당시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있는 일본 시위대의 모습. ⓒ위키피디아 DB

    지난 2015년 미국과 일본에서 공동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일본국민의 59%는 신문을 신뢰한다고 밝혔다. 일본국민의 신문에 대한 신뢰도는 내각총리대신(29%)이나 정부(25%)·국회(17%)는 물론 검찰(43%)이나 법원(57%)조차 앞선 수치다.

    일본의 언론이 이토록 국민의 두터운 신뢰를 얻게 된 비결은 뭘까. 우리나라의 현 국면에 버금가는 위기였던 1960년 '안보 투쟁' 당시 일본 언론이 취했던 자세를 살펴보면 해답이 보인다.

    1960년 5월, 일본의 집권여당인 자민당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안보조약 비준안을 중의원에서 강행 처리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야당인 사회당과 민사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훼손된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국민들 사이에서 번지자, 이 틈을 타고 총평(우리나라의 민노총에 해당)·전학련(우리나라의 한총련에 해당)과 같은 좌파 단체들이 시위를 선동하고 나섰다.

    6월에는 국회를 포위한 시위대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전학련 소속인 간바 미치코(樺美智子) 도쿄대 문학부생이 압사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의 잘못이 없진 않았지만, 이대로 좌파의 시위를 방치한다면 일본의 헌정이 전복될 위기였다. 공산당이 합법화돼 있고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일본에서, 미일안전보장조약 비준은 궁극적으로 결국 가야만 할 길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식자층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헌정 전복의 위기가 점증되던 이 시점, 일본의 7개 중앙지는 17일자 조간에서 "폭력을 배격하고 의회주의를 지켜라"는 제하의 공동 사설을 냈다. 보수 성향인 요미우리신문·산케이신문·니혼게이자이신문과 중도 성향의 마이니치신문,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이 모두 동참한 공동 사설이었다.

    공동 사설은 "오늘처럼 일본의 장래를 깊이 우려한 적이 없었다"며 "이러한 사회 풍조가 만연한다면 민주주의는 멸망하고 국가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울러 "사회·민사 양당도 주도권을 잡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국회에 복귀해 상황 통제에 협력하기를 희망한다"며 "여야가 국민의 열망에 부응해 의회주의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한 7개 중앙지 공동 사설의 반향은 컸다. 이튿날에는 48개 지방지가 이 공동 사설을 동반 게재했다. 자제를 당부하는 언론의 호소에 시위는 수그러들고, 사태는 국회에서 헌정 절차에 따른 수습 국면을 밟기 시작했다.

    미증유의 국가 위기 속에서 매체의 자존심과 성향을 굽히고, 나라의 안정을 먼저 생각한 일본 7개 중앙지 공동사설 게재가 우리 언론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그간 우리 언론은 지난해 10월말부터 4개월 이상 계속되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오히려 위기의 증폭을 조장하는 '나몰라라形', 일단 의혹 제기부터 던지고 보는 '아니면말고形',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세력의 목소리를 되레 키우는 '이적形' 보도로 일관해 왔다.

  • 1960년 6월 17일, 이 날짜 일본의 7개 주요 중앙지 1면에 일제히 게재된 공동사설. 일체의 폭력을 배격하고 의회주의를 지켜낼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 ⓒ위키피디아 DB
    ▲ 1960년 6월 17일, 이 날짜 일본의 7개 주요 중앙지 1면에 일제히 게재된 공동사설. 일체의 폭력을 배격하고 의회주의를 지켜낼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 ⓒ위키피디아 DB

    편향된 주장만 반복하고 일방의 목소리를 증폭하는 언론을 보다 못해 '침묵하는 다수'가 들고 일어났다. 광장에서 국민들 사이에 세(勢) 대결이 벌어지게끔 만든 데에는 언론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여야 정치인들에게 광장의 외침보다는 의회에서 사태를 수습하라고 당부한 언론도 없었다. 되레 언론이 광장으로 몰려나온 야당 정치인들을 경쟁하듯 조명해주면서, 이른바 '대권주자'들 사이의 과격성 경쟁만 부추겼다.

    다행히도 며칠 전부터 일부 언론에서 간헐적으로 사설을 통해 "헌재 결정에 무조건 승복할 것"을 정치권에 당부하기 시작했다.

    〈세계일보〉는 8일자 조간 사설에서 "여야 정치인들이 헌재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리기는커녕 집회에 나가 일방적인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며 "대선주자들을 포함한 정치인들은 헌재의 결정에 승복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문화일보〉도 같은날 석간 사설에서 "정치권은 장외 선동을 중단해야 한다"며 "헌재의 심리가 막바지에 진입한 지금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어떤 결론에도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국회의장과 4당 원내대표도 지난 13일 회동해, 헌재 결정에 승복하기로 구두 합의했다. 삼권분립의 민주국가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을 언론이 새삼 주문하고, 정치권이 거창하게 회동까지 해가며 합의하는 것이 만시지탄의 감은 있지만 다행스럽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미증유의 국가 불안을 초래하는데 큰 책임이 있는 우리 언론이 일부라도 그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공동사설 게재를 고려해야 한다.

    이대로 우리 언론이 경마식 중계에만 골몰하고 있는 가운데, 헌재 결정이 내려지고 그 결과에 불복하는 세력들로 인해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면 우리 언론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셈이 된다.

    공동사설은 요미우리·산케이부터 마이니치·아사히까지 성향에 관계없이 주요 중앙지가 함께 했던 일본의 전례를 따라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부터 〈국민일보〉〈서울신문〉〈세계일보〉, 그리고 〈한국일보〉〈경향신문〉〈한겨레〉 등이 모두 함께 동참한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언론에는 "헌재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는 당연한 호소조차 주저할 이적(利敵)성 매체가 엄존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주요 중앙지가 모두 함께 공동사설을 게재하는 게 곤란하다면, 가장 발행부수가 많고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권위가 있는 〈조선일보〉〈동아일보〉 양대 일간지가 1면 공동사설을 게재하는 것도 검토해볼만한 일이다.

    헌재 결정이 혼란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돼서는 안 된다. 미증유의 국가 혼란을 초래하는데 책임이 있는 우리 언론이 "헌재 결정에 무조건 승복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해, 혼란의 수습 국면에서만이라도 일익을 담당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