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사람들이 태극기 드는 이유

    민심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사람들은 여론조사, 동창회, 시장, 미장원, 택시 안, 회식 자리, SNS, 세미나 같은 것에서
    민심을 읽는다. 자유당 말기, 유신 말기, 6·29 선언 같은 때엔 압도적이고 보편적인 민심이라 할 만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것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곤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민심은 물론 크게는 둘로 나뉘어 있다.
    촛불 민심과 태극기 민심이 그것이다.
    초기일수록 촛불 광장엔 야당적이거나 진보적인 계열들 외에,
    그런 데 연계되지 않은 독립적인 개인들이 꽤 참여했었을 수 있다.
    어떤 중년의 고등학교 여선생님 사례가 그러했다.
    그는 "나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동료 교사들을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촛불을 그들 53개 단체가 주최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면서 광장엘 두 번 나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개인 참여자들이 다수였는지 소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주최 측 프레임(틀) 속에서 움직여줬다면 결과적으론 이용당한 셈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 시간이 갈수록 광장의 주제는 '의도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사드 배치 반대" "한·미 고위급 협의 중단" "대북 적대정책 폐기" "이석기 석방"
    "한·미·일 미사일방어체계(MD) 중단" 등등.
    그 여선생님은 이 무렵엔 이미 광장에서 빠졌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이를 두고 "촛불이 처음과는 달리 변질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여선생님 같은 개인들의 초심만은 액면대로 인지(認知)해줘야 할 것이다.
    그런 독립적인 개인들을 막후의 '기획자' '조직자' '이념단체 구성원'들과 한 묶음으로 볼 필요는 없을 성싶다. 그렇게 할수록 '기획자'의 영향력 범위만 넓게 봐주는 결과가 될 터이니 말이다.

    18일 오후 서울광장 인근에서 열린 제13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태극기 민심은 어떻게 봐야 하나?
    거기도 나름대로 '본부'는 있다. 그러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태극기 집회와 시위에
    스스로 나서준 독립적 개인들은 지금껏 정치의 정자(字)와도 무관한 채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전문직 종사자로서, 중·장·노년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할머니로서,
    은퇴한 공무원으로서 생업에만 충실해 왔다.
    그러다가 이번만은 평생 처음 정치성 집회와 시위에 동참했다.
    이렇게 마냥 떠내려가다가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까 봐 밤에 잠이 안 오더라는 것이었다.
    소년가장 출신이자 자수성가한 기업인은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요샌 토요일에 동창생들하고 태극기 집회에 나갑니다."
    "여차 했다간 '나의 인생'이 깨질 것 같아 그런다"는 실존(實存)적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그 여선생님 같은 촛불집회 참여 개인들과,
    그 기업인 같은 태극기 집회 참여 개인들은 사실은 그렇게 먼 사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 두 개인에겐 공통점이 있다.
    제 풀에 깨어나 나라 걱정을 한 점이 그것이다.
    이들은 순박한 시민들 속에 파고들어 군중심리를 자극하고 흥분시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모든 일은 "체제가 통째 악(惡)하고 썩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사태를 한도 끝도 없이 증폭시키려는 '변혁 기획자'들과는 다른, 선의의 '걱정하는 개인'들이다. 그리고 이런 '떼'나 '패'에 매이지 않은 독립적 개인들의 애국적 출현은 자유·민주·공화의 자산이다.

    흔히 말한다. "최순실 사태로 보수는 깨졌다"고.
    그 일로 혹시 보수라는 정당들과 정치인들이 폭삭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자유·민주·공화 가치를 견지한 자유주의, 보수주의 개인들은 여전히, 엄연히 있다.
    이들은 한때는 무엇에 뒤통수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했지만,
    그래서 마음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곤혹스러워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젠 우리가 뛰어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태극기 들고 광장엘 나오고 있다.
    다른 무엇도 아닌, 1948년 이래의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자유·보수 시민 개개인이 이렇게 눈을 뜬 건 아마 6·25 후 처음일지 모른다.

    자유·민주·공화·세계시장·한미동맹·자유통일 진영을 되세우는 일은
    그래서 자유한국당이나 바른정당 같은 것들에 자유·보수 시민들이 맞춰주는 식이 아니라,
    보수 정치권이 자유·보수 시민들에게 맞추는 식이 돼야 할 형편이다.

    태극기 진영의 본진(本陣)은 지금 보수 정당들 아닌 재야 자유·보수 시민들에게 있는 까닭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이긴 하다. 그러나 그 책임은 자유·보수 시민들 아닌 보수 정치권이 져야 한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2017.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