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3.15부정 선거 공모 한 적 없어… 대통령 눈·귀 가린 관료의 배신이 문제"
  • 4.19라는 폭발적인 힘을 가진 학생 데모, 이승만을 눈엣 가시처럼 여겼던 미국의 노골적인 압력, 믿었던 관료 집단들의 배신이 한국의 위대한 정치가 이승만을 몰락시켰다며, 4.19혁명과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박석흥 대한언론인회 주필은 21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사)건국이념보급회 주최로 열린 제72회 이승만포럼의 발표자로 참석해 "한국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4.19 재조명과 함께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고 밝혔다. 

    박석흥 주필은 <4.19 재조명과 4.19 전야 잃어버린 3년을 찾아서 –제1 공화국 국무회의록이 증언하는 1958~1960년 이승만>이란 주제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오해들을 풀어갔다.


    ▶많아도 너무 많았던 이승만의 적들 

    박 주필은 이승만 대통령의 ‘통일’에 대한 열망, ‘부정부패’에 있어서 단 하나의 타협도 없었던 완고함이 주변인들을 적으로 돌려세웠다고 주장했다. 

    박 주필은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을 위해서는 강대국 미국 일본과도 타협하지 않았고 자유민주주의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파적 집단 이익을 위해 뭉친 기득권 세력의 정치 논리와 그들의 경제 논리를 단호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비타협자, 옹고집, 독재자로 비난받게 됐다”고 말했다.

    박 주필은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을 걸림돌로 여겼던 미국이 4.19 혁명을 틈타 이 대통령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들을 쏟아냈으며, 한국 학계가 미국의 평가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며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왜곡됐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박 주필은 4.19 직전 이기붕을 추종했던 관료들의 배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957년 6월부터 1960년 9월까지 국무원 사무국장이었던 신두영 전 감사원장이 작성한 국무회의록을 근거로 내세웠다.


    ▶이승만 그만 몰랐던 ‘부정 선거’ 

  • 박 주필은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긴 했지만, 정작 이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를 공모한 적이 없었다는 학계 주장에 무게를 뒀다.

    신두영 전 감사원장의 국무회의록과 매카너기 주한 미국 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이승만 대통령은 4.19 혁명이 있고 나서야 부정선거의 진상을 알게 된 것으로 확인됐다.

    박 주필은 “제1공화국 1958년 1월부터 1960년 7월까지 315회 국무회의록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비방을 잠재우는 실증적인 사료”라고 강조했다. 

    박 주필이 참고한 신두영 전 감사원장의 국무회의록은, 국무회의를 직접 기록해 경무대에 보고하고 부본으로 보관했던 문서다. 이 국무회의록은 4.19 30주년이 되는 1990년 4월 19일 경향신문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었다.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12일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선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세 번이나 하지만, 내무장관과 관료들은 부정선거 사실을 숨기고 공산계열의 책동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했다.

    당시 이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실체 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 되는 부분이다. 

    국무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이 대통령은 집요하게 부정선거의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내무장관, 국방장관, 문교장관 등 관교들 모두 부정선거를 은폐하며 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다. 

    이날 장관들이 국무회의 주요 안건으로 올린 것 또한 세계 보건일 행사, 사방공사 추진 상황, 진주 소싸움 등이었다. 

    박 주필은 “신두영 당시 국무원 사무국장은 나에게 국무회의록 복사본을 넘기며 4.19는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선거 부정에 대한 대통령의 국무회의 추궁, 자유당 해체, 재선거, 헌법 개정 등이 제기돼 수습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이기붕을 추종하는 장관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제 1공화국이 막을 내렸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국내 언론의 ‘이승만 죽이기’ 

  • 박 주필은 엎친데 덮친격으로 대통령 교체를 원했던 미국과 반(反)이승만 세력이었던 언론들이 합세해 이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며 이 대통령이 설자리를 잃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이 당시 반이승만 정책을 적극적으로 이행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한다고 강조했다. 휴전을 서두르고자 했던 미국과 북진 통일을 고집했던 이승만 정부의 의지가 충돌했다는 해석이다. 

    즉 이승만을 미국 국익에 걸림돌이라고 인식했던 미국 사회과학계의 집요한 비판의식이 한국 사회 전반에도 투영됐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6.25전쟁 휴전 과정에서 반공 포로 석방 문제를 두고 이승만과 극한 대립을 했던 테일러 8군 사령관의 아들 존 M. 테일러가 4.19 직후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꼽았다. 

    존 테일러의 책에는 “이승만은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시대와 거의 동일한 폭력을 사용한 독재자” “40년을 미국에서 보냈으면서도 큰 세계관을 갖추지 못했다” 같은 이승만에 대한 비방이 수두룩하다. 문제는 한국학계가 존 테일러의 책을 이승만 비방의 기초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승만 다시보기


  • 박 주필은 이승만을 평가하기 위해 학계의 사료가 재정리 돼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자국 이익, 당파 이익에 따라 작성된 이승만에 대한 혹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된다는 뼈있는 조언이었다. 

    박 주필은 오히려 오랫동안 이승만의 자문 홍보를 맡았던 올리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는 이 대통령이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형안, 투지 , 종교적 초월성 등 자질 면에서 당대 어느 정치가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올리버 교수는 ‘신화의 가려진 인물 이승만’에서 ▲신생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이승만, ▲6.25 전쟁 중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고 미국 정부를 설득해 강력한 군대를 육성한 이승만,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전시에도 학교를 열었던 이승만, ▲자주적 외교를 통해 세계가 한국을 주권국가로 대접하게 만든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박 주필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감정적으로 비판한 정파 신문과 친북좌파 지식인, 이승만을 폄훼한 미국 학계의 수정주의 사관의 맹폭격으로 4.19전야 3년은 한국현대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이 됐다”고 한탄했다.

    박 주필은 “한미군사 동맹으로 안보를 튼튼히 한 이승만 대통령은 4.19전야 3년간 산업화 기초 작업과 대미, 대일관계 정립 등 자주적인 근대 국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헌신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4.19가 있기 전 3년 동안 산림녹화 사방사업, 농어촌 고리채 정리, 아파트 건설, 수출 장려 등 근대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가 이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