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통역문제는 의외로 쉽사리 해결이 되었다. 내가 데릴러 가지도 않았는데, 몽골 통역이 제 발로 우리에게로 왔던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통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얼마 되지 않아서.

    "오르그뜨를 괴롭히면 안 돼요."
    "누가 누구를 괴롭힌단 말입니까."

    내가 말했다.

    "오르그뜨는 내 조카 성규의 아내고, 남편이 집 나간 아내를 찾으러 왔는데 이게 순리지 잘못이란 말입니까."
    "그렇더라도 공연 중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무대 위에 쫓아나오질 않나. 하마터면 공연이 펑크 날 뻔하지 않았냔 말예요."
    "그야 우리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소. 오르그뜨가 우리를 보고 갑자기 도망가는 바람에 쫓아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게 공교롭게도 무대 위가 됐을 뿐이지. 그렇더라도 결과적으로 나쁘게 끝난 건 아니지 않소. 청중들 반응도 괜찮았던 것 같고."

    지만이가 응수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통역이나 해 봐요. 오르그뜨가 성규의 말을 잘 못 알아 듣는 것 같으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게요."
    "무슨 말은 무슨 말이야. 이제 그만 속 썩이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거지."

    몽골 통역은 좀 맹추 같았다. 한국말도 잘하고 해서 똑똑한 줄 알았더니, 영 사람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아니면, 못 알아듣는 척 하는 거든가.

    몽골 통역은 우리로부터, 더 구체적으로는 성규로부터 오르그뜨를 떼어놓는 게 오르그뜨를 보호하는 거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성규는 오르그뜨의 남편인데, 그런 성규를 오르그뜨로부터 떼어놓는 게 오르그뜨를 보호하는 거라고 믿다니. 옹졸한 여자였다. 나는 단언하건대 이 여자, 몽골 통역은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랑이란 걸 못해봤거나, 아직 미혼이거나 한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왜 집을 나갔었는지 물어봐줘요. 남자가 있었던 건지. 말하자면 몽골 남자가. 아니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집을 나간 건지....말입니다."

    성규였다.

    몽골 통역이 성규의 말을 몽골어로 오르그뜨에게 전했다. 그제서야 오르그뜨가 얼굴을 들었고, 짙게 화장한 얼굴이 눈물에 얼룩져 다소 어지럽고 산만하게 변질돼 있었다. 오르그뜨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르그뜨가 흐르는 눈물을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닦아내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

    몽골어였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성규는 좀 알아들었을지 모르겠다.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몇 몇 단어 정도는. 그래도 명색이 몽골 여자를 아내로 둔 남편이었는데.

    오르그뜨의 얘기는 상당히 길었다. 몽골 통역이 저렇게 긴 얘기를 잘 알아듣고 우리에게 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다 될 정도였다. 그러나 기우였다.

    오르그뜨가 말을 마치자 몽골 통역이 한국말로 오르그뜨의 얘기를 우리에게 전했다. 얘기의 대강은 이랬다.

    "오르그뜨에게 다른 남자는 없었어요. 몽골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고요. 아시겠지만, 오르그뜨는 처녀였었잖아요. 안 그런가요?"
    "그럼 왜 집을 나갔답니까." "그건 아무래도 저희 예술단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
    "사실 오르그뜨는 한국에 오기 전에 저희 예술단 모집 시험을 쳤었고, 합격을 했었어요. 그것 때문에 오르그뜨는 한국에 오기 전 깊은 고민을 했던 거예요. 당신과 결혼해서 한국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몽골에 남아 예술단원 생활을 할지. 솔직히 저희 예술단원 수입은 얼마 되지 않아요. 몽골의 대부분의 직장이 다 그렇지요, 한국과는 많이 달라요. 하여튼 오르그뜨는 굉장히 많이 고민을 했고, 그 결과, 당신이 별로 싫지 않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해서 한국행을 택한 거예요."

    여기서 몽골 통역이 잠깐 말을 쉬었다.

    "문제는 한국에 들어와서 생긴 거예요. 오르그뜨가 꿈꿔온 한국생활 그리고 결혼생활과 많이 달랐었데요. 그래서 갈등이 생겼었데요. 두고온 가족과 몽골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싹터 오고. 그 때 저희 예술단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래요. 그 소식을 듣고는 앞 뒤 생각없이 무작정 집을 나와 저희 예술단을 찾아 온 거라고 해요. 저희 예술단 신입단원 모집에 합격했었던 오르그뜨였으니까요."
    "그럼 우리가 처음 여기에 찾아왔을 때 그 때도 오르그뜨가 여기에 있었단 말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랬을 거예요. 아마."
    "아마라니, 확실하게 대답해요."
    "예, 그랬어요."

    몽골 통역의 말을 듣고 나는 좀 화가 나고 말았다. 우리가 처음 여길 찾았을 때 그 때 이미 오르그뜨가 여기 와 있는 상태였었는데도, 몽골 통역이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다고 하였다는 게 몽골 통역의 입에서 밝혀진 까닭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거짓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능란하게 할 수 있느냔 거였다. 몽골 통역은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똑똑한 게 아니라 약아빠진 여자라는 생각이었다.

    몽골 통역이 우리에게 진실을 숨기는 바람에 그동안 우리가 입은 물적 정신적 피해는 실로 심각한 것이었었다. 꽃뱀에게 걸려 거덜이 났고, 그 바람에 성규는 트럭을 잃기까지 했고, 차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케이사모라는 별 미친 놈에게 걸려 직싸리 얻어터지고 차까지 빼앗겼었다. 그건 실로 엄청난 피해였고 우리가 입은 물적 정신적 피해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숫자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 두 푼 가지고는 택도 없을 일임에 틀림없었다. 이 보상을 어디서 받아야 한단 말인가. 몽골 통역이 해 줄 거란 말인가. 나는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어지기까지 했다.

    "이보쇼 통역 아가씨. 당신이 진실을 숨기는 바람에 우리가 입은 물적, 정신적 피해가 얼마나 막대한 지 알기나 하쇼."

    나는 화가 나서 좀 시비조가 되어 물었다. 

    몽골 통역은 대답이 없었다. 몽골 통역이 대답이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 턱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싫어서, 내가 잘못해서, 나 때문에 나간 건 아니란 말이지요?"

    성규였다. 성규는 몽골 통역이 진실을 숨기는 바람에 우리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도망간 아내를 찾았으니 그럴 만한 일이겠지만, 그렇다면 나와 지만이는 뭐란 말인가. 성규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더욱, 몽골 통역이 괘씸해지는 것이었다.

    몽골 통역이 성규의 말을 몽골어로 오르그뜨에게 전했고, 그 말을 듣고 다시 오르그뜨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오르그뜨는 짧게 말했다. 오르그뜨의 짧은 말을 몽골 통역이 다시 성규에게 전했다.

    "당신을 싫어한 게 아니랍니다. 당신은 잘못이 없답니다. 모든 게 그리움 때문이었을 뿐이랍니다. 몽골에 대한 그리움이요."

    몽골 통역이 이 말, 아니, 몽골 통역이 전한 오르그뜨의 말에 성규는 깊이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성규의 얼굴이 환해지는 게 옆에서도 다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성규의 밝은 얼굴이었다. 아내가 도망갔다고 하면서 나를 찾아온 이후 늘상 어둡기만 한 성규의 얼굴이었는데....아무래도 성규는 그의 몽골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면 어떠냐고 전해주십시오. 부모님도 기다리고 계시고, 무엇보다도 제 생활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제 생활을 좀 바로잡아 달라고 얘기해 주십쇼."

    몽골 통역이 성규의 말을 오르그뜨에게 전했다. 오르그뜨는 금세 답하지 않았다. 꽤 오랜시간 동안 묵묵부답이었는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쉽게 작정이 안 서는 것 같았다. 오르그뜨가 뜸을 들이는 바람에 우리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성규가 그랬을 거였다.

    오르그뜨가 쉽게 답변하지 않는 게 오르그뜨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졌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오래 뜸을 들일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성규에게 아무 문제가 없고 단지 고향에 대한 향수병 때문에 집을 나와 예술단을 찾아온 거라면 집에 다시 못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면 아직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미치도록 사무친단 말인가. 그래서 예술단을 따라 다시 몽골로라도 돌아갈 작정이란 말인가.

    꽤 오랜 뜸들임 후에 오르그뜨의 입이 떨어졌다. 오르그뜨는 아주 짤막하게 애기했는데, 몽골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우리는 모두 몽골 통역의 입을 주시했다. 결국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오르그뜨의 말을 바꾸어 전해줄 사람은 몽골 통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가 오르그뜨와 얘기하고 있는 건지 몽골 통역과 얘기하고 있는 건지, 잠시 헷깔렸다.

    "지금 당장 가타부타를 말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아직 공연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공연이 끝나면 그 때 차분하게 얘기하겠답니다."
    "왜 지금 당장 확답을 줄 수 없다는 거지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얘기인가요?"

    내가 조금 열이 나서 되물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얘기가 아니고요, 아직 공연이 안 끝났으니까 공연이 끝나면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서 얘기하겠다는 것이에요."
    "아니, 당신이 뭐 아는 것처럼 대변하지 말고 오르그뜨한테 물어보란 말예요. 왜 지금은 아니고 공연이 끝난 후인지."

    내가 다소 쪼는 듯이 말하자 몽골 통역이 기분이 좀 상한 것 같았다. 얼굴이 조금 새침해지는 게 내 눈에 잡혔다. 그러나 나는 몽골 통역이 좀 주제넘다는 생각이었다. 통역이 통역만 하면 됐지, 왜 남의 생각까지 대변하느냐 하는 거였다. 그래가지고는 통역을 신뢰할 수 없고, 정보가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오르그뜨의 생각을 듣고 싶은 거지 몽골 통역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몽골 통역이 나한테 쫑코를 당하고 나서 내 의구심을 오르르뜨에게 전했고, 오르그뜨는 뜸 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다음 차례가 다시 오르그뜨라고 합니다. 이제 곧 다시 무대로 나가야 하는데 흐트러진 화장과 머리도 손을 봐야 하고, 정신이 없을 것 같답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이렇게 신의없이 집을 나와버렸는데, 쉽사리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고요."
    "알았습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해주십시오. 부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기를 바라겠다고도요."

    몽골 통역은 성규의 이 말은 미처 오르그뜨에게 전하지 못했다. 무대 위 공연이 끝나고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들려오고, 다음 순서 진행을 위해 급히 무대 위로 나가야 한 탓이었다. 그러나 몽골 통역이 기다리겠다는 성규의 말을 오르그뜨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오르그뜨 자신이 성규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은 듯한 눈치였으니까.

    급히 눈물로 얼룩진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만지고, 오르그뜨가 다시 무대 위로 나갔다. 그 때의 시각이 오후 세 시 사 십 오 분쯤이었다. 공연은 네 시 십 오 분쯤에 끝난다고 하니, 공연이 마치려면 삼 십 분쯤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삼 십 분이란 객관적인 시간의 길이로 보아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때로는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그랬다. 특별히 성규는 더 그랬을 거였다. 삼 십 분이란 시간이 나와 지만이에게도 충분히 길었다면, 성규에게는 너무 길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삼 십 분 동안 우리는 바짝 긴장된 상태로 있어야 했다. 오르그뜨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심히 불안해서였다.

    성규가 싫어서 나온 게 아니고 단지 향수병 때문에 집을 나온 거라면, 오르그뜨의 결정은 당연히 남편인 성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일 것 같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럴 거라는 생각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속이란 모르는 일이었다. 성규가 싫어서 집을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규를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엉뚱한 소리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르그뜨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거였다.

    만일 오르그뜨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렇게 나온다면, 오르그뜨가 숨기고 있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합당할 거였다. 향수병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 말이다. 다른 이유라면, 뭘까. 오르그뜨가 숨기고 말하지 않은 다른 이유라면....
     
    "좋아요. 당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오르그뜨가 몽골 통역의 입을 통해 한 말이었다.

    "조건이라니, 무슨 조건?"
    "당신이 결혼 전 몽골에서 사랑의 정표로 사 준 진주목걸이가 있잖아요. 그걸 찾아서 내게 갖다주세요. 그럼, 당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진주목걸이라면 오르그뜨 당신이 가지고 있을 거 아냐. 내가 사 준 건데....당신이 가지고 있는 걸 나 보고 찾아오라고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
    "아니요. 난 갖고 있지 않아요. 그 행방을 아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에요."
    "?...."

    오르그뜨는 우리가 기대한 마음의 결정을 했다. 그러나 일백 프로 우리가 기대한 마음의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성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는 하면서도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건을 다는 것은 좀, 얄궂었다.

    그러나 오르그뜨가 한 가지 조건을 다는 것은 이런 뜻으로도 좋게 해석될 여지도 있는 일이긴 했다. 미안해서 한 번 뻗댕겨 보는 거라는 것이었다. 집을 나온 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인데, 성규가 찾아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슬그머니 성규를 따라 돌아가기에는 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극히 여자다운 발상이었고, 자기 잘못을 성규의 애정을 통해 넘어서버리겠다는 조금은 이기적인 발상이기도 했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오르그뜨가 제시한 조건이란 게 아주 쉬운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는 일이지만, 그건 결코 해결하기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다시말해, 성규가 애정의 표시로 몽골에서 오르그뜨에게 준 진주목걸이를 찾아 가져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알았어. 그러니까 몽골에서 내가 당신에게 선물했던 진주목걸이를 찾아서 가져오면 된다는 거지. 그럼 내 말에 군말없이 따르겠다는 거지."
    "그래요. 당신이 그 진주목걸이를 가져오면 모든 걸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그 진주목걸이를 못 찾아오면 난 당신을 따라가지 않을 거고, 당신과 나와의 결혼언약도 무효가 되는 거예요. 난 예술단을 따라 몽골로 돌아갈 거고요."
    "알겠어....당신은, 당신이 한 약속을 명심해야만 해."
    "그럼요. 난 늘 내가 한 약속을 명심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