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옥 건국이념보급회 이사 "6.25-월남전, 공산주의와의 체제전쟁…그러나 완벽히 다른 결과"
  • ▲ 18일 오후 2시 30분경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4회 우남 이승만 포럼이 열렸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8일 오후 2시 30분경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74회 우남 이승만 포럼이 열렸다.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사드배치를 놓고 '중국·북한의 이익 대변이냐', '대한민국 수호인가'라는 엇갈린 견해가 국내 여론을 양분하고 있는 이때, '남북분단국들의 공산주의와의 체제전쟁'이었던 6.25전쟁과 월남전쟁이 '유능한 지도자의 유무'로 극명히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18일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 74회 '이승만(李承晩) 포럼'에 발표자로 참석한 남정옥 건국이념보급회 이사는 '국제전략가 이승만의 통일전쟁(월남전과의 비교)'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남 이사는 ▲대한민국과 월남이 공산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았다는 점과 ▲북한-월맹을 도운 국가가 중국과 소련이었다는 점, ▲남한과 월남을 미국과 국제사회가 도왔다는 점에서 대한민국과 월남은 상당히 유사한 처지였으나, 결국 '전시 국가지도자의 역할'로 인해 두 국가의 운명이 나뉘었다고 주장했다.

    ▶ 엄청난 물자와 병력에도 불구… '북진통일 목표'없던 월남의 패망

    남정옥 이사는 "월남은 6.25전쟁의 2배에 달하는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음에도, 통일론 없이 체제안정에만 매달린 결과 지구상에서 없어져버렸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월남에 투입한 병력이 63만명, 전쟁비용이 6,5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도저히 질 수 없는 전쟁을 어이없이 참패하고 말았다는 얘기다.

    남 이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6.25 발발 당시 38선 이북으로의 '북진통일' 목표를 설정했던 것에 반해, 월남은 17선 이남의 월남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만 베트콩 소탕작전을 수행하는 등 소극적 전쟁으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남 이사가 준비한 자료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6.25 발발 당시 주한미국대사 무초에게 '지금이 한국의 통일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며 미국과 유엔을 향해 정치적 공세를 펼쳤고, 그 결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통일론'은 미국과 유엔의 전쟁 정책으로 채택된 것으로 전해졌다.

    남 이사는 "미국의 휴전정책에 모든 국민이 죽기살기로 휴전을 반대하며 거리로 쏟아질 정도로 북진통일은 한국정부와 국군의 전쟁목표이자 군사목표가 됐다"며 "전쟁목표와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할 '국가적 비전'의 부재가 결국 월남을 패망으로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 '서울' 혹은 '사이공' 수도 함락 앞에서의 최후의 항전

    남 이사는 "수도가 함락되고 5%만 남은 희망없는 낙동강 전선 앞에서 망명정부를 권하던 미 대사를 향해 권총을 뽑아든 이승만 대통령의 단호한 의지를 월남 지도자들은 지니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월남 수도 사이공이 월맹으로부터 공격받자 당시 티우 대통령은 곧바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길에 올랐고 지도자들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도망을 쳤다"며 "그 결과, 프락치만 남아있던 월남은 월맹 앞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고 말했다.

    ▶ 작전통제권의 신속한 이양 유무, 승리 작전계획 갈랐다

    남 이사는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 문제 역시 월남 패망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월남전에서 월남은 63만의 병력과 무기를 지원한 주월 미군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을 위임하지 않았다"며 "미국과 한국군이 월남군과 독립적 관계에서 각자의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며 전쟁에 임한 결과, 대규모 반격작전은 시행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소규모 전투에 지친 미군이 월남 반전여론에 밀려 철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작전계획 통일조차 되지 않은 상황에서 17선 이북으로의 공격작전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체제안정'만 생각한 결과 전쟁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정옥 이사는 "이에 반해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던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지체없이 이양했고, 국가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전투에 승리할 수 있는 부대를 선정해 작전에 투입시켰다"고 강조했다.

    남 이사는 "미군 속의 한국군 '카투사'가 바로 이런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의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는 지금도 한미동맹의 주요 요소로 남아있다"고 밝혔다.

    ▶ 국익에 관한 양보는 없어야…휴전협상의 대가는?

    남정옥 이사는 '휴전협상에 대한 한국과 월남의 차이'를 예로 들며 "국익에 관한 양보는 있어선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월남은 1973년, 월남 내에 미군을 비롯한 월남의 자유우방국을 철수시키고 미국이 국내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평화협정'에 조인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남 이사는 "당시 월남 합참의장이었던 비엔 장군은 협정상황을 두고 '맹수사냥을 위해 정글로 갔는데 이젠 그 맹수들을 안고 잠자게 됐다'고 꼬집었었다"며 "뻔히 알고도 평화협정에 승인한 국가지도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남 이사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6.25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휴전협상 제안에 '휴전은 한국민에 대한 모욕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라고 거세게 반발, 반공포로 석방카드로 미국을 압박했었다"며 "결국 휴전협정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남 이사는 "최선의 성과였던 북진통일은 비록 중공군 개입으로 이루지 못했지만 차선책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며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 번영을 이뤄냈다는 점이 이승만 대통령과 월남 지도자들의 가장 큰 차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남 이사는 "이승만과 월남은 모두 자국에서의 전쟁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았지만, 전쟁본질 파악의 차이점으로 인해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낳았다"며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국가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 사례를 통해 상기하고 그러한 지도자를 또 만나게 되기를 기원한다"고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