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5자 구도'에 국민도 전례없는 '아래로부터 단일화'로 응답하나
  • ▲ 대선후보들이 후보자 TV토론에 앞서 각자의 기호를 손으로 표시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대선후보들이 후보자 TV토론에 앞서 각자의 기호를 손으로 표시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미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격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애송시 '가지 않은 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몸이 하나이니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 그러다가 하나의 길을 택했다."

    '대세론' 후보의 지지율이 40% 초반대에 못박힌 채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아들의 특혜취업 의혹 등 여러 문제가 제기돼 있다. 여기에 그의 집권만은 용인할 수 없다는 세 후보가 서로 간에도 물고뜯는 초유의 '5자 구도' 속에서, 지난 5~6일 이틀간 대선의 사전투표가 실시됐다.

    사전투표율은 무려 26.06%를 기록했다. 전체 유권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107만 표가 이미 투표함 속으로 들어갔다.

    사전투표제가 대선에 도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총선과 각종 재·보궐선거에 도입될 때부터 제기됐던 문제가 그대로 나타났다. 가뜩이나 우리나라는 선거운동기간이 짧은데, 선거운동기간 도중에 사전투표를 진행하니, 실질적으로 후보자를 검증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대선이니 지난달 17일 공식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된 이래 2주 정도 선거운동이 진행되기라도 했다. 앞서 치러진 4·12 재선거는 가관이었다.

    3월 30일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된지 고작 일주일 뒤인 7~8일에 사전투표를 해버렸다. 심지어 후보자들 간의 두 번째 TV토론회는 이미 사전투표가 끝나버린 뒤인 11일에 방송됐다.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지역구에서 2위를 한 무소속 후보는 첫 번째 토론회에 초청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토론회가 유일한 출연 기회였는데, 사전투표를 한 유권자는 그가 TV토론을 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표를 던진 셈이 됐다. 이런 것도 선거인가.

    이러다보니 1위를 달리는 후보는 더욱 짧아진 선거운동기간만 믿고, 제기된 온갖 의혹을 뭉개며 그저 사전투표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전투표제가 도입됐는데도 선거운동기간은 그대로인 탓이다.

    의원들이 3년 뒤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짧은 선거운동기간을 악용해 수월하게 재선(再選)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선거운동기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국회에서 입법적 해결을 해야 한다.

    이대로라면 이미 사전투표가 이뤄진 1107만 표 뿐만 아니라, 오는 9일 선거일에 투표될 표조차 상당수가 사표(死票)로 전락하는 신세를 피하지 못할 전망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요행 과반수 미만의 표가 사표가 되는데 그쳤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50% 이상의 표가 사표가 될 것이 확실시된다.

    특정 대선후보가 강하게 주장했던 프랑스식 대선 결선투표제를 도입했더라면 이러한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극좌 장뤼크 멜랑숑과 극우 마린 르펜이 발호하는 가운데, 중도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과 극우 르펜 후보가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이후 중도진보부터 보수까지 폭넓은 사회계층이 중도 후보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어, 중도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도 지금까지 건국과 산업화·민주화를 이끌어왔던 합리적 보수와 중도보수 세력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극좌급진주의 세력과 극우모험주의 세력이 양 극단에서 대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식 결선투표는 우리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만, 현행 헌법 제67조 2항에 배치되기 때문에 개헌(改憲)이 아니고서는 도입하기 어렵다.

    시스템적으로 결선투표도 없고, 정치권에서의 '큰 그림'조차 물 건너갔다. 몇몇 정치인들이 대승적인 차원에서의 조정력을 발휘해주기를 바랐지만 "이번 선거는 연대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다"는 현자(賢者)들의 외침은 후보를 움직이지 못한 모양이다.

  • ▲ 조선일보가 칸타퍼플릭에 의뢰해 여론조사 공표금지기간 전인 지난 1~2일 설문해 4일자로 보도한 여론조사에서 각각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로 가상 3자 대결을 상정한 결과. ⓒ뉴데일리 그래픽DB
    ▲ 조선일보가 칸타퍼플릭에 의뢰해 여론조사 공표금지기간 전인 지난 1~2일 설문해 4일자로 보도한 여론조사에서 각각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로 가상 3자 대결을 상정한 결과. ⓒ뉴데일리 그래픽DB

    '가지 않은 길'처럼 이제 유권자들은 아쉬움이 남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자유한국당이, 또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아니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가, 한편으로 김무성 의원이 이 시점에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더 빨리 저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여러 생각들이 남지만 이제는 다 부질없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됐다.

    '위로부터의 단일화'가 무산됐다면, 이제 국민이 자발적으로 '아래로부터의 단일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말하자면 '국민에 의한 결선투표'다.

    1위 후보는 어떠한 의혹에도 꿈쩍 않는 극성 지지층이 있으니 결선투표에는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9일의 투표를 결선투표라 여겨 1위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잠재력 있는 후보에게 '전략적 투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분명 전례가 없는 일이지만, 따지고보면 조기 대선이나 지금의 '5자 구도' 모두가 다 전례 없는 일들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자발적 결선투표'의 조짐이 실제로도 눈에 띄고 있다. 5~6일 실시된 사전투표의 권역별 투표율을 보면, 광역단체로는 대구광역시가 22.28%로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기초단체 단위로 봐도 부산광역시 사상구가 20.11%로 투표율 최저였다.

    이 지역들은 대체로 보수나 중도보수 성향의 유권자가 많은 곳으로 여겨진다. 특히 부산 사상은 특정 대선후보가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그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지역구를 물려준 후보가 지난해 4·13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에게 패하는 등 그 후보에 대한 반감이 강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이미 투표함에 표를 넣은 유권자들은 앞으로 지지 후보를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들로, 대체로 친문(친문재인) 성향이 많을 것으로 보는 게 정치권 안팎의 관측이다. 반면 대구나 부산 사상의 투표율이 보여주듯 반문 성향의 유권자들은 아직 선뜻 투표를 하지 못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이길 수 있는 후보인가'를 고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막판에는 결국 승리가능성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선거는 지난 3일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면서 '깜깜이 국면'에 돌입했다. 유권자들이 여러모로 답답한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조선일보가 칸타퍼블릭에 의뢰해 지난 1~2일 양일간 설문하고 4일자에서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들에게는 낙관적이지 않다.

    3일 이후 설문한 여론조사는 공표 자체를 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설문한 조사라면 시점을 밝히고 보도할 수 있는데, 이 조사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로 단일화됐을 경우에는 민주당 문재인 후보 47.8%, 한국당 홍준표 후보 22.8%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로 단일화됐을 때에는 문재인 후보 40.3%, 안철수 후보 29.0%로 격차는 비록 10%p 남짓으로 줄어들지만 여전히 대선 결과는 바뀌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여론조사와 관련해 기타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를 참조하면 된다.

    희망적인 조짐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투표는 해야 할 것이다. 고뇌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것처럼 거대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가지 않은 길'은 이렇게 끝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하리라.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고 ……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