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한쪽 편 일방적으로 손들어 갈등 매듭… 이런게 국민통합?
  • ▲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식 제창과 국정역사교과서 폐기 업무지시 전자서명을 하기에 앞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식 제창과 국정역사교과서 폐기 업무지시 전자서명을 하기에 앞서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말로는 탕평(蕩平)과 협치(協治)를 내세우면서도, 행동으로는 대선 승자로서의 전리품을 기민하게 챙기는데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2일, 다가오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토록 할 것과, 국정역사교과서를 폐기할 것을 업무지시했다. 불과 취임 사흘 만에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의 최전선에 있는 쟁점을 속전속결로 해치운 것이다.

    이날 청와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오는 18일 치러질 37주년 5·18 기념식의 제창곡으로 지정하도록 국가보훈처에 지시했다. 보훈처로 하여금 "5·18 기념식 당일 행사가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하라"는 지시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정부기념일로 지정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정신이 더 이상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같은날 국정역사교과서 폐기에 대한 업무지시도 이뤄졌다. 교육부에는 2018년부터 적용 예정이던 국·검정 혼용 체제를 즉각 검정체제로 전환하도록 수정고시할 것이 지시됐다.

    이를 놓고 '권력'이 사회 갈등의 영역에 직접 개입해 어느 한 편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은, 사회적 갈등 해결의 방법을 성숙하게 하기는 커녕 '권력 쟁취만이 모든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만 부추길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5·18 기념곡 지정 여부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지난 시기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의 최전선에 있었다. 좌파 성향 교육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박근혜정권의 방침에 극렬 반발하는 가운데, 보수우파 성향의 국민들은 다시 이에 반박하는 등 국론분열의 대명사처럼 됐다.

    이러한 민감한 사안을 '현재권력'이 된 세력이 국민들 중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 일거에 매듭지어버린 모양새다.

    대선에서 승리한 '권력'이 선거 과정에서 공약했던 내용을 전리품 챙기듯 처리한 것 자체야 뭐라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국론분열을 종식하는 방법이 폭넓은 여론을 수렴하는 국민통합이 아니라, 일방통행식 상의하달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승자독식형 권력체계에 의해 이념 대립이 일방적으로 한 편의 승리와 다른 편의 패배에 가까운 방식으로 결론났다는 점에서, '패배했다'라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측이 승복할지 미지수다. 앞으로 각종 선거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사생결단식 극단 대결만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문재인정권의 인사 원칙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날 박승춘 전 보훈처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장·차관급 정무직 고위공직자 40여 명이 일괄 사표를 제출한 상황에서, 황교안 전 국무총리 외에 유일하게 사표가 수리돼 의아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그 사표 수리의 이유가 다음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도록 업무지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게 밝혀진 셈이다. 문재인정권의 인사 원칙이라는 게 속전속결식으로 전리품을 챙기려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을 마치 '전봇대 뽑듯이' 치워버리는 것이라면 문제가 크다는 지적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기관장의 사표를 수리한 다음날, 바로 해당 기관을 향해 종래의 정책 추진 방향을 180도 뒤엎으라는 외풍(外風)을 불어넣는 것은 바람직한 행태가 아니다"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12일) 검찰총장의 사표를 수리했던데, 당장 내일은 검찰을 향해 어떤 칼바람을 불어 조직을 갈아엎으려 할지 걱정"이라고 꼬집었다.

    이러한 속전속결의 전리품 챙기기식 업무지시에는 다른 정치적 배경에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식에서 제창하느냐 여부는 호남, 특히 광주에서만 정서적으로 민감한 문제일 뿐, 국토의 다른 권역에서는 '운동권' 물 좀 먹어봤다는 사람 말고는 큰 관심이 없는 사안이다. 결국 호남의 정치 지형을 인위적으로 개편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냐는 분석이다.

    지난해 5·18 기념식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예년에 비해서도 행사 자체가 전례없이 소략하게 끝났다. 행사에 앞서 보훈처장의 입장을 저지했던 광주시민들은 갑작스럽게 행사 종료가 선언되자 분개해, 참석했던 호남 권역 정치인들에게 "뭘했느냐"고 따지는 등 아수라장이 연출됐다.

    기념식을 불과 엿새 앞두고 전격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지시한 것은, 이낙연 국무총리후보자의 지명 등 문재인정권의 서진(西進)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 굳이 "당일 행사가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지난해 기념식을 연상시켜 국민의당 소속인 호남 중진의원들을 향한 압박을 가속화하려 한다는 관측이다.

    국정역사교과서의 폐기는 자신의 '흑역사(黑歷史)'에 해당하는 당대표 시절의 결정적인 정치적 패배를 잊기 위한 '한풀이'식 업무지시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2015년 2·8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가 됐던 문재인 대통령은 그해 4·29 재·보궐선거의 참패와 조국 민정수석 등이 참여했던 혁신위의 '내부총질' 실패한 혁신으로 격심하게 흔들렸다. 그러던 중 국정역사교과서 추진안이 나오자, 당운을 걸고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국정역사교과서 추진은 국회의 입법이 필요한 사항이 아니다보니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마땅히 저지할 수단이 없었고, 거당적인 저지운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되레 민생·경제를 외면한 '발목잡기' 이미지만 남겨 10·28 재·보궐선거 참패까지 유발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당시 국정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은 문재인 대통령의 당대표 시절 한없이 미흡했던 리더십과 정치력을 보여줬던 일종의 흑역사"라며 "대통령이 되자마자 국정역사교과서 폐기 지시부터 내린 것은 자신의 참담했던 시절을 잊기 위한 '한풀이'에 가까워보인다"고 관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