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5회 이승만 포럼]2017. 5. 16(목) 오후2:30~4:30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강의실 220호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지활동

              오 영 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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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머리말

      1919년 3ㆍ1운동 직후 이승만(1875∼1965)은 민족의 여망에 따라 국내외 각지에 선포ㆍ수립된 여러 임시정부에서 수반급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것은 그가 3ㆍ1운동 이전에 이미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로부터 지도급 인사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를 배경으로 그는 1919년 9월 한성ㆍ상해ㆍ노령 지역의 임시정부를 망라하여 상해에 수립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임시대통령에 올랐다. 이후 그는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물러날 때까지 약 5년 반 가량 임정 대통령으로서 한국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따라서 1920년대 전반기에 이승만은 임정의 대통령으로서 한민족을 대표하는 최고통치자인 동시에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19년 9월 통합 임정 출범 이후 이승만은 상해임정 내 반대파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임정 소재지인 상해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임정 출범 이전 상해로 가겠다던 종래의 입장을 바꾸어 미주와 원동 간의 역할분담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11월 19일 그는 국무총리 이동휘를 비롯한 정부 각원들의 취임을 감축한다는 축하전보를 보내면서 자신의 특유한 역할분담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遠東의 일은 총리가 주장하여 하고 중대한 事만 余와 문의하여 하며, 구미 事는 余의게 임시로 全任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미주에서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외교독립운동에 전념하며 전보와 서신을 통하여 임정을 원격 통치해나갔다. 

      이승만은 임정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단 한 차례 상해를 방문하여 약 6개월간(1920.12.5-1921.5.28) 머물렀다. 그런데 일견 무의미한 장기체류 여행처럼 보이는 이승만의 상해 방문 기간 동안에 한국독립운동의 지형과 방향을 뒤흔든 중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 기간에 임정내 이른바 文治派와 武斷派의 노선투쟁이 깊어졌고, 반임정ㆍ반이승만 세력의 임정 개조ㆍ타도 운동과 위임통치청원 비판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이승만과 임정지지 세력의 임정유지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다. 따라서 이승만의 상해 체류 기간은 이승만과 임정의 길항관계, 임정 내외 반임정ㆍ반이승만 세력의 활동상, 이승만의 임정 개선책 및 유지활동 등의 여러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 이승만의 상해 체류 활동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즉, 이승만이 대정략과 대자금을 준비하지 않고 상해에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임정의 난맥상을 해소하지 못했으며, 임정 내외에서 임정 개조운동을 비롯한 반임정ㆍ반이승만 운동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반대세력을 포용하지 못하였고, 적대세력이 테러위협을 가하자 워싱턴회의 참가를 핑계로 밤중에 몰래 미국 기선에 올라 도망치다시피 상해를 떠나 하와이로 돌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임정의 분란과 분열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임정의 분란과 침체의 모든 책임은 결국 임정의 최고지도자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상해 체류 활동에 대한 기왕의 평가는 다소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임정의 침체 및 분열 원인을 분석함에 있어 임정의 태생적ㆍ고질적 약점으로 알려진 재정곤란ㆍ노선차이ㆍ지방열ㆍ조직의 비효율성 등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이승만 개인의 지도력 부재 문제만을 추궁하는 문제점을 남겼다.
    둘째, 이승만이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정 유지를 위해 또 독립운동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그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주목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만 파악하려는 문제점을 남겼다.
    셋째, 1920년대 전반 임정 유지 활동을 벌인 일부 인사들은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동시기에 같은 활동을 벌인 이승만은 비판하는 평가 기준의 형평성 문제를 남겼다. 
     

     Ⅱ. 암중모색과 외교독립노선의 표명
      
      During my stay in Shanghai, December 12, 1920 to May 19, 1921, there were many interesting developments in the political activitie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but during all these changes I maintained a rather passive attitude because I saw no possibility of accomplishing anything there due to the mental attitude of the various groups represented in Shanghai at the time. One evening soon after my arrival in the Crofoot residence Hon. Kim Ka Chin, former Minister of the treasury in the old Korean regime in Seoul, who was a refugee in Shanghai at the time, came at night with his son to call on me.…Then Kim Ka Chin quietly advised me, "You must know how to deal with these people here. My sincere advice to you is that must not try to accomplish much here; keep quiet and observe things. Indeed I kept quite and observed, instead of attempting to achieve anything.

      Ⅲ. 통치체제 변개 논란과 독립노선의 갈등

      1921년 1월 5일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뒤늦게 부임한 이승만이 처음 주재하는 국무회의로서 과거의 착오를 바로잡고 새로운 행정방침을 세우려는 기대가 많았던 회의였다. 각부 각원들의 시정보고를 거쳐 이승만이 구미에서의 활동상황, 국제정세 상황 등을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이동휘가 임정의 제도개혁 문제를 제안하였다. 사실 이승만은 1920년 초부터 이동휘의 제도개혁 구상이나 위임통치청원 비판 발언 등을 비밀 통신원들로부터 계속 보고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휘의 갑작스런 제안을 사전에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첫 번째 회의에서 이동휘는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고창되던 때에 나온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과 정한경의 자치론은 외교상 실패이며,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현혹시킨 행동으로서 사회의 비난이 정부로 밀려들고 있으니 대책을 강구하자고 하였다. 이는 국무총리 취임 이래 누차 공사석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강하게 비난했던 자신의 이전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위임통치청원은 고의로 한 것은 아니며, 당시 정세를 고려하여 한국문제를 선전하자는 것이며, 그것은 독립을 부인한 위임통치가 아닐 뿐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이고, 따라서 지금 국제정세에 현혹되는 일이 없다고 응대하였다.
    이에 각원들은 위임통치청원의 동기가 고의로 독립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며 국제정세에 현혹됨이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동포의 의혹을 풀게 하자고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성명서 발포를 거부함으로써 국무회의가 결렬되었다.

      두 번째 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이 상해로 와서 집무하지 못할 때에는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고 국무총리는 매월에 한 번씩 대통령에게 정무를 보고하게 하자고 의론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워싱턴의 외교사업이 중요하여 그곳을 떠날 수 없으며, 행정결재권도 위임할 필요가 없은즉,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되 중요 사건은 반드시 워싱턴의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후에 실행하라고 하였다.


      세 번째 회의에서 이동휘는 국무총리 제도를 변경하여 국무위원 제도를 채용하고 국무위원회의 공결로 행정을 처리하자는 의안을 제출하였다. 그는 미국에 있는 대통령이 중국 상해에 있는 임정의 행정을 이해하지 못해도 거리상 관계로 의사소통이 늦어져 행정처리가 지체되거나 실패한 사례가 많다며 과거의 경험을 거울로 삼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에 이승만은 위원제는 한성정부의 정신이 아니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상에서 살펴본 1921년 1월 상순 3차례의 국무회의는 이승만의 상해 체류 기간에 이승만과 반임정ㆍ반이승만 세력 간에 벌어진 격렬한 대립ㆍ갈등 양상의 압축판이다.
    첫 번째 회의에서 위임통치청원은 외교상 실패이며 그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밀려들고 있으니 대책을 강구하자는 이동휘의 주장은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논쟁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신의 신념인 외교독립운동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 또 임정의 주도권을 사회주의세력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회의에서 국무총리에게 행정결재권을 행사하게 하자거나, 국무총리제를 국무위원제로 변개하여 국무위원회의 공결로 행정을 처리하자는 주장은, 이승만의 대통령 권한행사를 무력화시키고 국무총리에게 대통령 권한을 주자는 것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대통령직 사퇴를 거부하자 차후책으로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당식 집단지도체제를 경계했기 때문에 쏘련식 위원제를 찬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국체는 민주국체”를 채용한다는 한성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이동휘의 공산주의적 위원제 채용 주장을 일축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국내 인민들이 민주공화정체의 수장 자격을 자신에게 안겨준 집정관총재라는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독립전쟁론자의 주장>
         1. 의병단을 만주에서 조직할 것. 이 무력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한국에 進侵시켜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켜 일본총독부를 불안상태에 몰아넣게 할 것.
         2. 쏘련과 연락하여 그들의 힘을 빌려 독립운동을 강화할 것.
         3. 중국안에 있는 排日정당과 제휴하여 무력원조를 얻어 공동전선을 펼 것.
         4. 중국과 한국에 있는 일본 관헌에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관청을 폭파하고 고위관리를 암살할 것.

         <이승만의 주장>
         1. 의병단 조직이나 게릴라작전은 일리가 있으나 만약 이것이 행동화되면 국내동포는 일본으로부터 더 한층 탄압을 받게 되고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2.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사상이다. 동양에서 표본적 민주주의 문명국가를 구현시키려는 우리 이념에 합치될 수 없는 이론이다. 공산주의사회는 노예생활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국제외교를 통하여 각국의 동정을 얻어 독립하는 방안이 최선의 길이다.
         4. 공산당의 원조로써 우리의 독립을 성취시킨다는 것은 천만부당하며, 그것은 조국을 다시 공산주의국가의 노예로 만들자는 주장이다.
     
      1921년 1월 상순 국무회의에서 벌어진 임정의 통치구조 변개논쟁의 여파는 이승만의 상해 활동을 제약할 가능성이 높았다. 1920년 가을부터 경신참변의 발생으로 인해 재중 한국독립운동의 흐름은 이전보다 무쟁투쟁론을 더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이동휘세력의 레닌자금 확보 소식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독립운동진영의 변화를 갈구하던 상해 인사들의 이합집산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변화는 개인적 신념에 입각하여 미국지향적인 외교독립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이승만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임정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무단파와 사상논쟁과 제도변경논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한편, 임정 유지를 위한 재정곤란을 타개하기 위한 6가지의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1921년 1월 28일 공포된 대통령 교서에 실린 시정방침과 흡사한 것으로서 주로 재정적인 측면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그 제안은 ① 임정 각원과 직원의 수를 최소화하고, ② 임정 직원에게 매월 급여를 지급하고, ③ 정부의 연간 예산안을 편성하기 위해 지출을 최소화하고, ④ 기본금을 모으기 위해 공동 노력하고, ⑤ 장래 독립전쟁에 대비해 군사적 준비를 해야 하며, ⑥ 비밀 연락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중 국내외 한국민에게 매년 1불을 받아서 이를 외국 은행에 적치하고 그 이자를 받아서 임정 유지와 독립운동에 사용하자는 ④의 주장은 특이할만하다.


     Ⅳ. 상해임정 유지방침과 개선방안

      “僭稱 상해임시정부에서 앞서부터 개최되어 온 국무원 회의는 현재의 대통령제를 폐하고 의원제를 행하고자 하는 李東輝 일파와 종래의 대통령제를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李承晩 安昌浩 등의 고집으로 서로 논쟁한 결과 드디어 李東輝는 사직하고 西比利亞로 떠나게 되었다. … 상해의 不逞鮮人은 그들이 假政府에 있든 재야에 있든가를 불문하고 그 암투의 치열함이 혼연하여 亂麻와 같다. 그래서 이승만의 인물로서도 도저히 억지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특히 누차 보고한 바와 같이 재정의 궁핍은 이러한 분쟁의 添因이다. 이승만이 상해에 歸來하자 재정의 곤란은 자기가 구제할 것이라 聲明하여 그 사이 역시 다대한 희망을 걸었으나 그후 하등 기대에 맞는 바가 없었을 뿐 아니라 반재파인 金立이 오히려 西比利亞 방면에서 3만원의 금액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현하의 정세는 이승만 등이 민의에 의거하여 議員制를 승인하더라도 결국 同人 및 安昌浩의 퇴직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이승만이 안창호를 국무총리로 임명함에 있어 처음에 주저하고 반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안창호는 임정 유지를 전제로 제도개혁 논의를 주관했는데, 이는 이승만의 의도와 부합하였다. 그러나 안창호의 난국 타개방법은 이승만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그는 “모스크바에 요원을 파견하여 레닌정부와 연대하고, 한ㆍ중ㆍ러 3국이 연대할 주의를 세우고, 이를 기초로 노령의 한인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면, 북경ㆍ상해 등지의 반임정 세력이 활동근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국무원에서 외교위원회 설치를 제청했을 때, “독립운동의 주안을 세우고 외교책은 그 후에 정하자”고 하였다. 이처럼 공산주의세력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거나, 외교독립운동에 가중치를 두지 않는 태도는 친미외교노선을 견지하는 이승만으로서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동휘 사직 후 임정 개혁 방향은 임정의 체제와 골격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진행해나가는 임정유지책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 이들의 개혁논의는 상해 및 북경 일대의 반임정 인사들을 중심으로 ‘國民大會’가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한 것이며, 동시에 더 이상 임정의 난맥상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임정에 정부제도 변경안을 제출한 인사들은 안창호ㆍ김규식ㆍ신규식ㆍ남형우ㆍ안병찬 등인데, 이들은 임정의 방만한 조직과 과도한 경상비를 대폭 감축하여 임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임정의 위상을 되찾자고 주장했다. 사실 이전에 이미 이승만과 이동휘도 이들과 거의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여러 인사들의 정부제도 개혁안 가운데 안창호는 정부 각 기관을 극단으로 축소하여 인원을 감축하고 일개 소규모 사무소로 만들며, 부속 각 기관 중 불필요한 것은 철폐하고 구미위원부ㆍ파리위원부도 축소하자는 이른바 연합사무제를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 이하 각부 총장ㆍ총판의 명칭은 그대로 두고, 사무 간편과 인원 축소를 위해 각 部局을 연합하고, 위원 약간 명과 위원장 1인을 두어 사무를 집행하게 하자고 하였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俄領과 타협한 후에 군사와 외교 행동을 적극으로 진행하고, 상해에는 정부의 명의만 유지하고, 교육․실업․단결 3방면으로 전력하였으면 좋겠다고 하고, 또 우리의 토대가 아무 것도 없어 이와 같이 동요 되니 정치적 단결을 발기하면 좋을 듯하다. 그 단결의 주의는 國民 皆納․皆兵․皆業 三事를 실시하게 함이라”라고 하였다.      


     Ⅴ. 친위단체 협성회 결성과 반대세력에 대한 대응

      상해에 있는 不逞鮮人의 內訌에 관해서는 누차 보고한 대로이다. 임시정부 옹호파는 黃中顯ㆍ趙琓九ㆍ尹琦燮을 중심으로 하여 약간의 동지가 결속하여 協誠會라 부르는 단체를 설치하여 반대당에 대항하고 있다. (이들은) 3월 중순 이래 드디어 활동의 기치를 올리고 “현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각원을 배척하나 후계자 구인난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물며 내부의 화합이 결여되어 적으로 하여금 틈을 타게 하는 어리석음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하다”라는 취지에 따라 혹은 연설회를 열고 혹은 인쇄물을 배부하여 인심 집결에 힘쓰고 있다. 동시에 임시정부 간부의 초대연을 열어 自黨의 성의를 밝히는 등 획책이 이르지 않음이 없다. 최근에는 1) 임시정부를 절대로 옹호할 것, 2) 광복의 정신과 協進主義를 고취ㆍ장려할 것, 3) 국세의 납입을 힘쓸 것, 4) 군사의 服習을 督進할 것 등 4개항을 강령으로 한 선언서를 발표하여 自黨의 임무 수행을 기하려고 하였다. 거기에 민간에서는 협성회의 내용을 이승만의 사주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유력자로 이에 찬동하는 자가 극히 적고, 실제로 위 선언서에 서명한 129명 중 다소 유력하다고 인정되는 자는 겨우 7∼8명뿐이다. 기타는 대개 3류 이하의 잡배를 나열한데 불과하여 도리어 반대파의 비웃음을 초래한 결과가 되어 도저히 일반 민심의 추향을 좌우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Ⅵ. 예산 절감 노력과 기호파 중심 신내각 구성

     Ⅶ. 맺음말

      이승만이 부임했을 당시 임정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즉, 임정은 극도의 재정곤란 외에도 구성원 간에 독립노선의 차이, 정치체제의 지향 차이, 지방 파쟁 등의 문제로 독립운동 중심기관으로서의 위상에 큰 손상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임정 인사들의 기대와 달리 대정략과 대자금을 지니지 못한 채 상해에 왔기 때문에 임정의 갈등과 분란은 해소될 수 없었다. 당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가져온 상당한 자금을 자파 세력을 관리하는데 사용하고 이를 임정에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정의 재정곤란은 해소되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상해 도착 직후 임정의 상황을 조용히 지켜볼 것을 권하는 김가진의 곡진한 충고에 따라 임정의 현안에 대해 적극 대처보다는 현상 유지를 추구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임정의 현황을 관찰한 결과 여러 세력들의 노선차이로 인해 대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고 임정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기로 하였다. 그는 반임정ㆍ반이승만 세력의 임정 개조 및 창조 운동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며 임정의 현상을 유지하는 정책을 힘써 행하였다.
      이승만이 상해에서 추진한 임정의 현상유지정책은 여러 방향으로 펼쳐졌다. 이러한 정책은 임정 내외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요구한 임정을 개조하거나 창조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기호파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정부옹호파의 후원을 등에 업고 임정유지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추진한 임정유지정책은 임정의 제도와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독립운동을 진행해 나가자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이승만은 임정의 통치체제 개조 논쟁에서 현행의 대통령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위임통치청원 문제에 책임을 지라며 은연중에 대통령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하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제안을 民意가 아니라며 일축하였다. 아울러 그는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자는 이동휘의 주장에 대해 행정결재권을 위임할 필요가 없고 이전처럼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후 실행하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국무총리 제도를 변경하여 국무위원 제도를 채용하고 국무위원회의 공결로 행정을 처리하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대해 국무위원제는 공산당식 위원제라며 극력 반대하였다.
      둘째, 이승만은 공사석에서 이동휘의 독립전쟁론이나 김약산의 의열투쟁론 등 외교독립운동과 대척관계인 급진적 독립노선을 되풀이하여 질타하였다. 그는 임정 내에 러시아 과격파의 원조를 빌리려 하는 자가 있다며 임정의 노선을 독립전쟁론으로 유도해가는 이동휘 국무총리를 강하게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은 미국의 성의 있는 원조를 믿어야 한다며 친미적인 외교론을 공공연히 제기하였다. 또한 그는 대통령의 교서와 포고를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강포하고 무도한 일제를 치는데 있으니 개인이나 단체가 일제 인민에 대해 비인도적 행동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처럼 독립전쟁론과 의열투쟁론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자신의 외교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자신이 미주에서 추진하고 있는 외교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이승만은 임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려 하였다. 임정은 출범 이래 조직과 인원과 예산의 방만함으로 인해 운영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임정내 유력자들도 임정의 조직을 축소하여 예산과 인원을 절감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지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임정의 기구와 인원을 축소하여 인건비와 경상비를 절감함으로써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고 임정을 유지해나간다는 시정개선 방침을 수립하였다. 비록 정부 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개혁안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지만, 임정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절약 예산을 편성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로써 임정이 극도의 재정 곤란 속에서도 근근이 유지해 나가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넷째, 이승만은 자신을 지지하는 기호파와 일부 인사들로 하여금 친위단체를 조직하여 임정 옹호 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그는 임정 내외에서 반임정ㆍ반이승만 운동이 거세질 조짐을 보이자 지지자들에게 협성회란 단체를 조직하여 임정 및 대통령 옹위 활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이 단체는 “현행의 임시정부를 후원한다” “임시정부를 절대로 옹호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임정ㆍ반이승만 세력이 주관하고 있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항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는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가져온 자금을 적치하여 사용하였고, 이승만이 도미한 후에는 미주의 송금으로 운영되며 친이승만ㆍ친임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승만이 반대세력의 비판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짜여진 임정을 유지하려 애썼던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선 자신이 한성정부 집정관총재를 거쳐 임정의 대통령에 올랐고, 임정이 미국식의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고 자신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거쳐 최초로 임정의 대통령에 오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임정의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구미 열강과 국제회의를 상대로 자신이 원하는 외교독립운동을 원활히 추진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대통령 직함을 유지해야만 미주동포들에게 독립자금을 쉽게 수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