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의 절망과 보수의 희망-기본을 튼튼히 세워야 

     영혼이라는 말은 철학적인 뉘앙스를 넘어 종교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정치경륜이나 정치운동을 이야기 할 때도 영혼이란 단어는 곧잘 등장한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리퍼블릭’에서 ‘좋은 나라(도시국가)’란 어떤 나라인가를 논하면서
    ‘좋은 나라’는 곧 ‘정의로운 나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의로움’이란 어떤 것이냐를 구명하기 위해
    인간 영혼의 3가지 측면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 만큼 정치와 국가를 논할 때는 단순한 정책적 기술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궁극적인 철학, 나아가선 영혼의 문제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한다는 함의(含意)일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영적 힘(force of soul)'이란 말까지 썼다.
    식민주의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에너지로 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저변에는 그런 영적인 능력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의 미국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나 남아연방의 백인 분리주의자들에게 저항했던
    넬슨 만델라의 경우도, 단순한 정치 운동가이기 전에 정신, 영혼, 철학, 윤리적-미학적 에너지의 담지자(擔持者)이자 구현(具顯者)였다. 우리의 안중근 의사도 운동가이기 전에
    정신적 에너지의 체현(體現)자였다. 김유신, 이순신 장군에게서도 그런 풍모를 읽을 수 있다.

  •  왜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내는가?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말하던 보수 일각의 ‘중도실용주의자’들에겐
    이건 순 케케묵은 이야기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즘의 보수 궤멸현상과 보수 재건론을 돌아볼 때는
    이런 이야기를 새삼 띄워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보수는 철학과 가치와 미학과 윤리학과 영혼을 잃거나 방기했기 때문에
    해체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위해 내 한 몸 불사르겠다는 투철한 신념과 헌신과 열정이 없었기 때문에
    보수는 졌다.

     상대방은 반면에 일정한 철학과 사관(史觀)과 신념 그리고 자기희생의 계율을 내면화한
    직업적 전사(戰士)들이었다. 그건 물론 진취적 민주화 운동의 초발심(初發心)으로부터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전체주의적 변혁론’으로 일탈했지만,
    그래서 갈수록 투박하고 조악(粗惡)한 반(反)지성으로 굳어졌지만,
    어쨌든 전투의 측면에서는 나태하고 신념 없는 보수 정치업자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보수는 이래서 폭망(폭삭 망한)한 것이고,
    보수의 재건 운운은 이에 대한 뼈저린 성찰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보수 현실은 이미 철저하게 실패한 직업정치업자들이
    어떻게 신장개업을 할 것이냐의 도장술(塗裝術)로 개선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20대~30대~40대~50대 중반이 통 째 등을 돌리고, 전국적으로 고루 유권자들의 버림을 받았고, 강남 3구에서 모두 나가떨어진 보수였다. 이쯤 됐으면 이젠 미봉책으론 안 된다.
    요행수로도 안 된고 공짜도 없고 얼렁뚱땅도 어림없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지함밖엔 보여줄 게 없다고 절감해야 한다.
    흰 소리 하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우리가 정치를 너무 아무렇게나 쉽게 하려고 했다가 이 지경이 됐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영혼은 고사하고, 정신은 고사하고, 이념은 고사하고, 역사관은 고사하고
    서푼 짜리 이론 하나 제대로 가진 게 없었다는 걸 진지하게 자성해야 한다.

     상대방의 ‘정신’은 기실은 사이비다.
    구닥다리다. 미혹(迷惑)이다. 살벌함이다. 아름답지 못하다. 고품격이 아니다.
    이걸 이기려면 진정성, 시대정신에 대한 민감성, 온유함, 아름다움,
    고품격의 영혼-정신-미학-윤리로 무장한 지성적인 개인들이 출현해야 한다.
    그러나 이건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보수는 그래서 상당기간을 더 침잠(沈潛)하고, 고민하고, 자괴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할 것 같다. 기본이 없으면 그 위에 지은 집은 모래성이다.
    지금부터라도 차세대에게 ‘무얼 안다는 것’의 기본부터 다시 가르치는
    고적(孤寂)한 교사가 필요할 성싶다.

    그가 세속에 있었을 때 필자와 대학 동기였던 활성(活性) 스님의 말 그대로,
    이제는 정치사상, 정치운동에서도 8정도(正道)를 행해야 할 일이다.
    정견(定見) 정념(正念)에서 시작해 정정(正定)에 이르는 바른 정진(精進)의 길 말이다.
    이런 진지하고 정직한 수행(修行)의 자세 없이는 보수의 재활은 어렵게 돼버렸다.
    절망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다.
    희망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7/6/28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c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