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딱딱해진 껍질을 하나둘 벗겨낼 때마다 애벌레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다. 크기는 물론이고, 체형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면모를 보인다. 한 명의 배우가 성장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엔 가능성만 믿고 시작한 연기 지망생이 하나둘 작품을 거치면서 점차 개성 있는 연기자로 자라나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움'을 얻기까지 일정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나비의 성장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 윤성현(25)이란 배우를 처음 만난 건, 2012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일일시트콤(선녀가 필요해)에, 눈에 띄는 신인 연기자가 등장했다고 해 시작된 인터뷰였다. 처음엔 아이돌 지망생인 줄 알았다. 곱상한 외모에 날씬한 체형까지, 모델 뺨치는 비주얼이 인상적이었기 때문.

    실제로 그는 모델 출신이었다. 2008년부터 꾸준하게 런웨이 무대에 서 왔다는 그는 디자이너 박종철이 발굴한 모델 유망주이기도 했다. 무심코 시작한 모델 활동이었지만 타고난 골격과 비주얼 덕분에 윤성현은 금세 패션계가 주목하는 신예 모델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연기'에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 '충주시대'로 연기에 맛을 들인 윤성현은 2011년 2,8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힙합영화 '퍼포머'에 캐스팅 되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개봉은 연기됐고, 윤성현의 첫 주연 데뷔는 다음 기회로 미뤄지게 됐다. 그러던 중 KBS 2TV에서 방영 중이던 시트콤에서 '감초' 역할을 맡을 배우를 급구하면서 윤성현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저 같은 신인이 이런 인기시트콤에 출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자 축복이죠. 매번 감사하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어요. 하늘같은 선배님의 연기를 직접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윤성현은 대사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도 식은땀을 흘리는 '연기 생초보'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근성이 있었다. 인터뷰에서도 그런 각오가 읽혀졌다.

    해보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아직은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무엇이든 열심히 할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는 배우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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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로부터 3년 뒤, 다시 만난 윤성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표정에는 한결 여유가 흘러 넘쳤고, 한없이 맑기만 했던 눈망울엔 나름대로의 깊이가 묻어났다.

    당시 '나의 유감스러운 남자친구'라는 드라마에서 '이중스파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는 "이제서야 깊이가 있는 진중한 연기를 하게 됐다"며 "양념 같은 역할이나 묻어가는 연기가 아닌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희열같은 걸 느꼈다"고 출연 소감을 밝혔다.

    연기 경력도 어느덧 4년째에 접어든 그는 인기드라마 '끝없는 사랑'과 '나의 유감스러운 남자친구'에 연속 캐스팅 된 이후 자신감이 꽤 붙은 모습이었다. 이제는 연기의 기초를 닦는 단계를 넘어서 선배들의 연기를 모방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드라마를 찍을 때 유독 필이 꽂히는 그런 영화가 있는데요. 주로 그런 작품들을 보며 아이디어나 영감을 얻어요. 이번엔 하정우 선배님의 '추격자'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을 했어요. 하지만 흉내를 내더라도 결국엔 저만의 다른 느낌이 나오게 돼요. 기초를 닦는데 있어 무엇보다 모방이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지금에서야 비로소 연기의 재미를 알게 됐다"는 윤성현은 "누구나 사람은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회가 왔을 때 이것을 잘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수년 전 '오기'와 '근성'으로만 똘똘 뭉쳐 있었던 그에게서 어느새 배우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당장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결코 조바심을 내지 않겠다"는 담담한 각오를 들으면서 '이 배우가 곧 빛을 발할 날이 오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현실이 됐다.

  • 윤성현과 다시 마주친 건 지난달 15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였다. 이날은 소자본으로 제작된 '3인 3색 독립단편영화 상영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총 세 편의 영화가 연속 상영되는 시사회의 피날레는 '슬프지 않아서 슬픈'이라는 묘한 제목의 영화가 장식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개그맨 박성광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이유로 진작부터 관심을 모았던 작품이었다. 이 때문에 제법 많은 취재진이 시사회장에 몰렸고, 기자 역시 박성광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극장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실소가 머금어졌다. 화면 속에 너무나 낯이 익은 배우가 등장했기 때문. 극중 택배기사로 나오는 주인공 '철우'는 다름 아닌 윤성현이었다. 소개 책자엔 주인공 이름이 '성현'이라고만 적혀 있어 설마 윤성현이 이 영화에 나올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대기만성형 배우 윤성현의 첫 주연 데뷔. 연기 초보 시절부터 쭉 지켜봐왔던 당사자로서 조금 뭉클한 심정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우 윤성현은 스크린 속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연기를 하고 있었다.

    윤성현이 연기한 철우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이용이 분), 백수인 고모부(최종남 분), 자폐증을 앓고 있는 우승이(서우승 군)와 고모(백현숙 분)를 모두 돌보는 청년가장이다. 우직하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철우의 모습이, 정말이지 '윤성현'이라는 배우와 너무 잘 어울렸다.

    한없이 순수한 눈빛과 온화한 표정, 조용 조용한 말투는 윤성현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캐스팅의 '신의 한수'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이 배우에게 이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배역은 없었다.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철우'의 안쓰러운 모습도 윤성현이 연기하니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다. 택배 배달을 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을 망설이는 모습도 실제와 현실을 분간키 어려웠다.


  • 이쯤되면 당사자로부터 출연 소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며칠 후 약속을 잡고 모 커피숍에서 배우 윤성현과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외모는 예전과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도전적인 눈빛 대신 온화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도사린 '강단'은 더욱 단단해진 듯 했다.

    작년에 '옥중화'를 끝내고 올해 초 오디션을 봤어요. 처음엔 박성광 감독님에 대해 '개그맨'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막상 뵈니 정말 세상 진지하시더라고요. 감독님께서 저를 좋게 봐 주셨던 것 같아요.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었어요.


    드라마 '옥중화'에 합류하는 시기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본의 아니게 일년을 허비하게 된 윤성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올해 초 박성광이 진행한 오디션에 응시했다 단박에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같은 옷을 입어도 어쩔 땐 '동대문 패션'으로 보이다가도 어쩔 땐 '명품'처럼 보이는 묘한 양면성이 엿보였다는 게 박성광이 밝힌 캐스팅 이유다.

    실제로 '철우'라는 캐릭터는 원래 한없이 숙맥 같다가도 정반대의 성격이 툭 튀어나오는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초 '미스터리' 장르로 이 영화를 기획했던 박성광은 시나리오 수정을 거듭하면서 가슴시린 멜로 영화로 탈바꿈시켰다.

    이에 따라 입체적이었던 철우의 캐릭터도 다소 평면적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박성광은 '열린 결말'로 엔딩을 마무리, 주인공 철우에게도 변화의 여지를 남겨 뒀다. 시종 철우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은 이같은 연출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결말이 너무 자주 바뀌었어요. 하하. 영화가 너무 어두우면 안좋다는 주위 반응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가 촬영까지 해 가면서 대폭 손질을 했어요. 원래 시나리오 초고 내용은 절대 비밀이에요.


  • 윤성현은 '연기력이 많이 늘었다'는 기자의 평가에 "이게 다 감독님 덕분"이라며 "촬영 첫날부터 잘하고 있다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고, 틈틈이 연기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셔서 자신감 있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날 촬영이 다 끝나고 박성광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첫 촬영인데 힘들지 않았느냐며, 힘내라고. 솔직히 저도 영화에 첫 주연으로 참여하는 거라 많이 떨리고 긴장했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에게 직접 격려를 받으니 막 힘이 나더라고요.


    윤성현은 "'모니터를 봤는데 배역과 정말 잘 어울리더라'라는 감독님의 말씀이 제일 가슴에 와 닿았다"며 "주위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첫 단추를 잘 꿴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윤성현은 "현장에서 보니 기성 배우들도 다 똑같이 긴장한다는 걸 알게 됐다"며 "베테랑들도 다 긴장을 하는데, 다만 자신만의 내공으로 이를 다스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윤성현은 '슬프지 않아서 슬픈'을 크랭크 업하고 불과 보름 만에 '봄봄'이라는 또 다른 영화를 찍었다. 첫 주연작을 마치고 나니, 그 다음 과정은 한결 순조로웠다. 연기력 면에서도 스스로 한 단계 발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촬영장에서 내가 할 신에만 집중을 하다보니 떨리거나 걱정되는 마음도 자연히 사라지더라고요. 지금껏 선배님들이 말씀해주셨던 여러가지 조언들이 이제서야 실감이 나요.


    "지금부터 제대로 된 필모그래피를 써 내려갈 수 있게 됐다"며 웃음을 지어보인 윤성현은 "초심을 잃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연기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건넸다.

    윤성현과 김용주가 주연으로 분한 '슬프지 않아서 슬픈'은 올 하반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일반 관객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