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 인권 모를리 없는 특검, ‘언론용 발언’ 자제해야
  • ▲ 2010년 3월31일 한겨레 기사. ⓒ 화면 캡처
    ▲ 2010년 3월31일 한겨레 기사. ⓒ 화면 캡처



    1. 장면 하나.

    2010년 3월3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7부 공판.

    뇌물수수 등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재판 시작과 거의 동시에 “검찰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한다”며,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 전 총리 옆에는 참여정부 법무부장관을 지낸 강금실 변호사가 자리했다.

    한 전 총리는 검찰이 피고인 신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갑자기 발언권을 청했다.

    “재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검찰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검찰의 피고인 신문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한 전 총리는 미리 준비한 ‘검찰 신문 거부 이유서’를 읽어내려갔고, 방청객들은 예상 밖의 상황에 웅성거렸다.

    한 전 총리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자, 검찰은 “검사는 피고인에게 공소사실과 관련된 사항을 신문할 수 있다”는 형소법 조항을 제시하면서, 즉각 반박했다.

    한 전 총리와 검찰 간 공방이 가열되자 재판장이 중재에 나섰다.

    재판장은 “(피고인이) 대답도 하지 않는데 (검사의 신문을) 들으라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한 전 총리 측의 진술거부권 행사를 사실상 인용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공판은 문재인 변호사,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복지부장관 등 친노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2. 장면 둘.

    2017년 7월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공판.

    박근혜 전 대통령-최서원(최순실)-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뇌물 등 혐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발언권을 청했다.

    “재판장님, 저는 오늘 이 법정에서 진실규명을 위해 모든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 드리고 싶은 게 본심입니다만, 변호인들의 강력한 조언에 따라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재판 운영에 도움을 못 드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사님 질문에 제가 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재판장(김세윤 부장판사) :
    “대답을 해서 형사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면 ‘증언을 거부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되고, 아니면 답변을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재용 부회장 :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이 부회장이 답변 거부의사를 분명하게 밝혔지만, 박영수 특검은 신문을 강행했다. 특검은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의 독대 당일 SK 최태원 회장과 통화한 내역을 제시하면서, 그 내용을 캐물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거듭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날 공판은 증인으로 나온 이 부회장이 증언을 거부하면서, 10여분 만에 끝났다.

    이 부회장이 증언을 거부할 것이란 전망은 공판 시작 전부터 기자들 사이에 널리 펴져 있었다. 앞서 이 사건 증인으로 나온 박상진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도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뒤를 이어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장충기 미전실 차장(사장)도 증언을 거부했다.

    한명숙 전 총리와 이재용 부회장의 진술(증언)거부권 행사는 표현만 다를 뿐, 그 취지는 똑같다.

    ‘누구든지 자기 혹은 친족관계에 있는 자가 형사소추 또는 공소제기를 당하거나, 유죄판결을 받을 사실이 드러날 우려가 있다면’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148조).

    두 사람이 행사한 권리는 우리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 중 하나다.

    헌법은 12조2항 후단에서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해, 진술거부권의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다. 위 형소법의 규정은 헌법상 기본권 중 하나인 진술(증언)거부권을 실정법으로 구체화한 것이다.

    한명숙 전 총리와 이재용 부회장이 행사한 진술(증언)거부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 人權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이 각각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권리를 행사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점도 존재한다.

    한명숙 전 총리 공판 당시, 진보언론과 정치권은 암묵적으로, 그녀의 진술거부권 행사를 지지 혹은 응원했다. 이들은 한 전 총리의 진술거부권 행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오히려 검찰의 행태를 문제삼았다.

    모순은 여기서 발생한다.

    박영수 특검은, 증언을 거부한 이 부회장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심지어 특검은 최지성 전 부회장, 장충기 전 사장에게 ‘이재용 부회장의 지시를 받아 단체로 증언을 거부하는 것 아니냐’는, 다소 수준 이하의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특검 :
    “그룹 부회장이자 사실상 총수인 이 부회장의 지시 또는 승인 아래 단체로 증언거부권을 행사하는 것 아닌가.”

    박영수 특검은, “국정농단 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한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집단적으로 증언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진실 규명을 바라는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특검의 비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날 특검의 법정 발언은, 법리에 대한 해석이나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정치적 내용’이 주를 이뤘다.

    “삼성그룹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나 영향력에 비춰 볼 때, 과연 그러한 모습(증언 거부)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다하는 것인지, (아니면) 위증을 피하기 위해 급급한 모습인지 의심스럽다.”

    앞서 특검은, 같은 사건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상진 전 사장이 형사소송법 상의 규정을 근거로 증언을 거부하자, “삼성은 법위에 있느냐”, “박 전 사장의 증언거부권 행사에 이 부회장의 의사가 결정적으로 반영됐다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는 등의 주장을 펴면서, 언론을 의식한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친여 성향 혹은 진보를 자처하는 누리꾼들은 특검의 발언을 SNS에 퍼트리면서, 삼성 때리기에 나섰다. 한 순간에 이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전현직 임원들의 증언거부는, ‘몰염치하고 양심 없는 갑의 전횡’으로 둔갑했다.

    이런 상황은 7년 전 한명숙 전 총리의 진술거부 당시와 판이하게 다르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박영수 특검의 태도다.

    여론이나 언론의 논조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와 함께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속성을 지니지만, 법리나 법원(法源)은 다르다.

    진술(증언)거부권은 앞서 말했듯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헌법핵(憲法核)을 지키기 위한 방어 장치다.

    진술거부권의 역사는 1,7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 서구 민주주의의 탄생과 함께 태동한 기본적 인권개념으로, ‘자기부죄(自己負罪 / self- incrimination) 거부의 특권’을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국 연방수정헌법 제5조
    “누구든지 형사사건에 있어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지 아니한다.”

    미국은 위 조항을 근거로, 자기부죄 거부의 특권, 즉 진술(증언)거부권을 형사사법절차 상 기본 원칙으로 천명했다. 우리 헌법 역시 영미법의 기본권 보장 요소를 일부 받아들여 12조2항에 같은 내용을 담았다.

    증언거부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행사할 수 있는 기본적 인권이다.

    전직 국무총리든, 현직 삼성전자 부회장이든, 문맹의 촌부이든 누구나 공평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다.

    따라서 이 권리의 행사를 ‘부도덕한 재벌기업의 횡포’로 몰아세우는 특검의 태도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한명숙 전 총리의 진술거부권 행사가, 헌법이 피고인에게 부여한 정당한 권리의 행사였다면, 이재용 부회장의 증언거부를 이와 다르게 바라볼 이유가 전혀 없다.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 인권을 대기업 오너 일가의 갑질로 치부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특검의 인식은, 매우 우려스럽다.

    화려한 법조 경력을 자랑하는 특검이 이런 기본적인 내용을 모를 리 없다. 특검이 방청석에 앉은 취재기자들을 대상으로,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울 서초동 로펌의 한 파트너변호사는 “특검의 발언은 시류에 따른 것으로 보이지만, 형사소송법이 인정한 당연한 권리를 행사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자기부죄 거부의 특권은 헌법상의 권리”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