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작성목적 불상...2014년 8월 작성했다면, ‘시점 모순’
  •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14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회의 문건과 검토자료 관련 브리핑을 했다. ⓒ 사진 뉴시스
    ▲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14일 오후 춘추관에서 박근혜 정부 민정수석실에서 발견된 회의 문건과 검토자료 관련 브리핑을 했다. ⓒ 사진 뉴시스


    지난 주말 ‘현대판 사초(史草)’인 대통령기록물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14일 청와대는 예정에도 없던 ‘생중계 브리핑’ 소식을 기자단에 전했다.
    이날 오후 청와대는, 지난 정부 민정수석실이 생산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우병우 캐비넷’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청와대가 “발견된 문건의 생산 시점은 2014년 8월로 추정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우병우 전 수석이 재임하던 시기와 겹친다.

    청와대의 브리핑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다. 예정에도 없던 생중계 브리핑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발표 내용이 파격적이었다.

    청와대는 발견된 문건이 300페이지 가량 된다면서, 그 가운데 유독 현재 진행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공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건 및 메모의 발견 사실을 강조했다. 청와대는 한발 더 나아가 메모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청와대가 “삼성 승계 관련 문건 및 메모가 발견됐다”며 그 내용을 발표한 시각, 서울중앙지법 311호 중법정에서는 이재용 부회장 사건 증인신문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이날 증인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교수시절 ‘삼성 저격수’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삼성에 비판적이었던 현직 공정거래위원장이 출석하면서, 언론이 이 사건 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청와대의 발표는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미묘한 시점에 나온 청와대 브리핑은, ‘시점’ 때문이라도 오해를 받기에 충분하다.

    청와대가 300페이지 가까운 내용 중 삼성 관련 사안만을 지나칠 만큼 자세하게 공개한 사실 역시 무심코 넘기기에는 뒷맛이 찜찜하다.

    이날 문건 공개는, 청와대가 이재용 부회장 사건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이뤄졌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청와대는 “이번에 발견된 문건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계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들 자료의 사본을 박영수 특검에 넘겼다. 청와대의 발표는 곧, ‘해당 자료를 현재 진행 중인 공판에서 증거로 사용하라’는 일종의 메시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청와대의 문건 공개 자체가 안고 있는 모순도 있다.

    청와대의 발표 원문은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 의결권 관련 조사’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관련 조항, 찬반 입장, 언론보도, 국민연금기금 의결권 행사 지침, 직접 펜으로 쓴 메모의 원본, 또 다른 메모의 복사본. 청와대 업무용 메일을 출력한 문건 등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지원 방안을 검토한 내역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중 자필 메모로 된 부분은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일부 내용을 공개합니다.

    삼성 경영권 승계 국면→기회로 활용. 경영권 승계 국면에서 삼성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삼성이 국가 경제에 더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방안을 모색.
    삼성의 당면 과제 해결에는 정부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 가능.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대응 금산분리 원칙, 규제완화 지원.
    전경련 부회장 오찬 관련 경제 입법 독소조항 개선 방안.


    위 원문을 기준으로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발견된 문건 가운데는 ‘국민연금 의결권 관련 조사’라는 제목이 붙은 문건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지원방안’을 검토한 내역이 포함돼 있었다. 청와대는 해당 문건에 붙어있는 자필 메모의 내용을 공개한다.”

    청와대의 말대로 삼성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메모’의 작성 시점이 2014년 8월이라면, 역설적으로 해당 메모는 ‘이재용 사건 재판’과는 관계가 없다. 이 시기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논의되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관련 문건과 위 메모의 작성시기가 같다면 모순은 더 극명해진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가 문제된 시점은 삼성물산-모직 합병 직전인 2015년 5월이다.

    따라서 위 문건과 메모의 작성시점이 2014년 8월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약 국민연금 의결권 작성 시점이 2015년 초반이고, 메모의 작성시점은 2014년 8월이라면, 청와대가 왜 두 내용을 묶어서 발표했는지 의문이다.

    현재 진행 중인 형사재판에 직접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문건의 내용을, 생중계까지 하면서 공개한 이유를 청와대는 “국민의 알권리”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종합하면, 위 메모의 작성자는 ‘성명불상’이다. 메모의 작성시점도 명확치 않다. 청와대는 “메모의 작성시점을 2014년 8월로 추정한다”고 밝혔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문건이나 메모의 작성의도도 밝혀진 것이 전혀 없다.

    문건과 메모의 작성자, 작성의도, 작성시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청와대의 발표는, 성급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청와대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문건을 공개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억측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와대는, 검찰이 이들 자료를 이재용 사건에 적극 활용하라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했지만, 이들 자료가 증거능력 혹은 증명력을 확보할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피고인 측이 증거 채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건작성 경위 및 작성자, 작성시점 규명을 위해 지난 정부 민정비서관실 관계자들의 줄소환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이 경우 공판은 올해 말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서울중앙지검은 17일, 박영수특검으로부터 ‘청와대 문건’ 중 일부를 넘겨받았다며, 해당 문건에 대한 수사를 특수1부에 배당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