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⓷ 동독과 북한, 냉전 시절 받았던 대우 차이

동유럽 ‘넘버2’ 동독 vs ‘박쥐’로 왕따당한 북한

동독에 막강한 병력·핵무기 배치했던 소련, 북한 핵무기 배치·개발은 외면

전경웅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7.07.21 05:00:02
  • 메일
  • 프린트
  • 작게
  • 크게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구글플러스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
  • 네이버블로그 공유
  • 전경웅 기자
  • enoch2051@hanmail.net
  • 뉴데일리 통일·외교부장입니다. 통일부,외교부,북한,국제 분야를 담당합니다.

    저의 주된 관심은 '국익보호'입니다. 국익보호와 관련된 이슈는 국제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국내의 어두운 세력들이 더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기자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자가 알려주는 정보가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통일 당시 독일과 현재 분단된 한반도는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이 몇 가지 있다. 국제관계 측면에서 보면, 동독은 소련으로부터 북한을 월등히 뛰어넘는 대접을 받았다. 반면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게 ‘개밥의 도토리’ 취급을 받았다.

◈ 바르샤바 조약기구內 동독, 소련 이은 ‘넘버 2’ 

독일이 분단된 이후 소련을 동독을 동구권 핵심 국가로 대접한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맞서기 위해 만든 집단 방어체제 ‘바르샤바 조약기구’ 내에서 동독은 최전선이자 핵심 거점으로 여겼다.

분단 이후 동독에는 42만 명이 넘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병력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탱크, 전투기, 폭격기, 야포 등 주요 화력장비들도 있었다. 소련이 동독에 이처럼 많은 병력과 장비를 주둔시킨 것은 서방과의 냉전에 있어 동독이 최전선이자 서유럽 침공의 핵심 역할을 맡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는 안보 연구가들도 인정한다.

1988년 ‘말콤 찰머스’와 ‘루츠 운터제어’, ‘스티븐 잘로가’라는 연구가들은 ‘국제안보(International Security)’라는 학술지를 통해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이 맺은 집단안보체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강력한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논쟁 가운데서도 모두 공감하는 부분은 “동독군과 동독 주둔 소련군은 ‘카테고리 1’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운데 최정예 병력”이라는 점이었다. 서유럽의 NATO와 전쟁이 났을 때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 가운데 동독군 6개 사단과 동독 주둔 소련군이 초기 대응을 하고 예비 전력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군을 열흘 이내에 동원해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카테고리 2’로 명명된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는 동원에 한 달이나 걸렸다.

해외 군사연구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독에서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병력 7만여 명, 1979년부터 1980년까지는 병력 2만여 명을 탱크, 야포, 전투기 등과 함께 철수시켰다.


그럼에도 1991년 독일 통일 직후까지 남아 있던 소련군은 병력 33만 8,000여 명, 3개 야전군에 24개 사단, 4,200여 대의 탱크, 8,200여 대의 장갑차와 보병수송차, 3,600문의 야포, 180문의 방사포, 10만 6,000대의 군용차량, 1개 공군 야전군에 전술기 690대, 헬리콥터 680대 등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동독 내 소련군의 가족만 해도 20만 8,000여 명이나 됐다.

이처럼 거대한 소련군과 동독군 전력 때문에 냉전 당시 서독은 49만 5,000여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징병제를 실시했다. 부족한 美육군 병력을 대신해 육상과 공중에서는 직접 방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서독은 모두 전술 핵무기를 탑재한 탄도미사일 배치를 허용했다.

1981년 미국이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MGM-52 랜스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배치하자 소련은 OTR-21 토치카(일명 SS-21) 지대지 탄도미사일을 동독 등에 배치했다. 둘 다 전술 핵무기였다. 미국과 소련이 서독과 동독에 배치한 핵무기는 둘 다 사거리 120km에 수십 킬로톤 위력의 핵탄두를 장착하고 있었다. 미·소는 이를 수백여 기 배치해놓고 서로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 시각에서 핵무기 배치는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상호확증파괴(MAD)’ 개념 때문에 핵무기가 많이 배치된 곳이 오히려 안전하고, 국제적 영향력이 강하다는 역설이 어느 정도 통했다. 소련이 동독에 수백 기의 핵무기를 배치했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 소련과 중공 사이에서 ‘줄타기’ 하다 떨어진 북한

반면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도, 중공으로부터도 외면당하다시피 푸대접을 받았다. 북한이 푸대접을 받은 것은 김일성의 판단 때문이었다.


소련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동독과 협의 아래 전술 핵무기를 배치했다. 반면 북한에는 냉전 시절 공식적으로 어떤 핵무기도 배치된 적이 없다. 김일성이 1950년대부터 소련과 중공을 기웃거리며 “핵무기 기술을 공유하자”고 했던 것이 부른 패착이었다.

1957년 6월 미국은 “한국 국경 외부로부터 군사용 항공기, 차량, 무기, 탄약의 반입을 금지한다”는 유엔 정전협정의 일부 조항을 없앤다. 소련과의 냉전이 심해지면서, 한반도를 방어하는 것이 동아시아 전체 방어에 중요하다고 판단,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미군의 전술 핵무기는 1958년 1월부터 한국에 배치됐다.

이를 알게 된 김일성은 1963년 소련으로 달려가 핵무기 배치를 호소하지만 거절당한다. 소련은 대신 1965년 평화적 연구에 쓸 수 있게 북한 영변에 소형 원자로를 지어주고, 과학자들을 교육시켜 준다.

소련에 불만을 품은 김일성은 1964년 10월 중공이 첫 핵실험에 성공하자 베이징을 찾아가 마오쩌둥을 만난다. 김일성은 “항미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혈맹끼리 핵무기의 비밀을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그 작은 나라에 무슨 핵무기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김일성이 이처럼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외면 받은 것은 역시 소련과 중공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 하는 대외전략을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련과 중공은 1953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뒤부터 사이가 벌어진다. 스탈린을 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시쵸프는 1956년부터 ‘스탈린 우상화 철폐’를 시작한다. 이를 지켜보던 ‘종신집권 독재자’ 마오쩌둥은 소련에 대해 탐탁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다.

같은 해 폴란드에서는 반소 민중봉기가 발생,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가 무력 진압한다. 마오쩌둥은 이를 보고 “소련은 더 이상 세계 공산당의 종주국이 아니다”는 생각을 갖는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흐루시쵸프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평화공존을 외치자 중공은 소련을 맹비난하며 이런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오쩌둥의 불만은 결국 1969년 3월 우수리 강 충돌이 시발점이 된 중·소 국경분쟁으로 폭발한다. 김일성은 두 나라 사이에서 ‘박쥐’처럼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외교정책을 펼친다. 중·소 국경분쟁은 핵전쟁으로 번지기 직전 미국이 개입하면서 마무리됐다. 흥분이 가라앉은 뒤 소련과 중공은 북한의 태도를 되돌아 본다. 그 결과 북한은 소련으로부터도, 중공으로부터도 외면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냉전이 끝날 때까지 북한은 소련은 물론 중공으로부터도 “전략적 요충지라기보다는 서방을 막으며 세력을 소진해야 할 완충지대”라는 소리를 들으며 외면 받는다. 북한은 소련이 황해도 해주 지역에 ‘FAPSI’라는 감청 정보기관 기지를 둔 것과 일부 항구를 극동함대가 사용하기로 한 것 외에는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별다른 군사적 지원도 받지 못했다. 

◈ 냉전 종식 후 통일된 독일, 여전히 남은 북한

1991년 12월 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사임과 함께 연방 해체를 선언하면서 냉전은 끝났다. 같은 해 8월 소련 해체에 반대하는 공산당 강경파가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불과 사흘 만에 실패하고, 실질적인 권력이 보리스 옐친에게 넘어간다. 

냉전의 중심이었던 유럽에서 동독이 무너지자, 연이어 동구권 공산당 독재 정권이 무너진 것도 소련 해체의 원인이 됐다. 소련은 해체되고 난 뒤 한동안 ‘독립국가연합(CIS)’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스와 함께 연방을 이뤘지만,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스는 이후 독립국이 된다.

같은 시기 냉전 때에는 위성국가라는 이유로 소련에게서 천연가스와 석유, 각종 경공업 상품을 제공받던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다.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 연방은 에너지 자원과 무기 제공을 요구하는 북한에게 “그럼 돈을 내라”고 반박했다.

강대했던 소련이 무너지고 주변 위성국가들이 차례대로 민주화 되어가는 모습을 본 중국 공산당은 자기네 또한 일당 독재 체제가 붕괴될까 크게 우려했다.

1989년 4월 15일 인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던 개혁파 후야오방 前공산당 총서기가 급사하고, 이를 계기로 베이징大 학생을 비롯해 전국에서 몰려든 대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인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는 ‘공산당 일당독재 철폐’와 ‘민주적 선거 실시’를 외친다. 대학생들은 후야오방의 뒤를 이은 자오쯔앙 당시 공산당 총서기마저 민주화 시위를 지지한 점을 듣고 크게 고무된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中공산당 상무위원회는 천안문 사태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中공산당 상무위원회는 천안문 사태를 유혈진압한 뒤 인민들에게 경제적 자유는 주되 정치적 자유는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동시에 북한을 ‘위성국가化’해 ‘민주화 물결’이 북쪽에서 들이닥치는 것을 막기로 한다. 소련으로부터 지원이 끊어진 북한에게 지하 송유관을 통해 공짜에 가까운 돈을 받고 석유를 제공하고, 무역을 늘려 상품을 제공했다.

같은 시기 북한은 동구권 붕괴를 보며 중공과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그리고 체제 유지를 위해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북한은 1991년 12월 한국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했지만 이는 한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키려는 속셈이었다. 1993년 3월 국제원자력에너지기구(IAEA)의 영변 핵시설 사찰을 거부하며 유엔 핵무기 비확산 조약(NPT)에서 탈퇴한 것, 이후 한미 연합과의 극단적 대치, 1994년 10월 한국, 미국, 일본, EU와의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를 통해 경수로 건설과 매년 석유 50만 톤을 지원받기로 해놓고서 이를 파기한 데서도 북한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

이후로 북한은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아랑곳 않고 ‘체제 유지’를 내세워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계속 개발했다. 중공은 자국의 ‘안보와 국익’을 이유로 북한을 압박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보듯 동독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와 일종의 정치 이념적 공동체로 국가안보에서도 함께 움직이는 파트너였다. 반면 북한은 김씨 왕조의 세습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차용하고, 원칙과 이념도 없이 이리저리 붙기를 반복한 탓에 동구권 강대국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했다.

북한이 동독과 근본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었냐는 점은 동독이 ‘인민들’에 의해 다스려졌다면, 북한에는 ‘백성들’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비교해볼 수 있다.


[시리즈] ‘⓸독일-한반도 통일의 차이점, 국민과 백성의 차이’로 이어집니다.

  • 전경웅 기자
  • enoch2051@hanmail.net
  • 뉴데일리 통일·외교부장입니다. 통일부,외교부,북한,국제 분야를 담당합니다.

    저의 주된 관심은 '국익보호'입니다. 국익보호와 관련된 이슈는 국제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국내의 어두운 세력들이 더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기자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자가 알려주는 정보가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관련 키워드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press@newdaily.co.kr
[자유민주·시장경제의 파수꾼 - 뉴데일리/newdaily.co.kr]
Copyrights ⓒ 2005 뉴데일리뉴스 - 무단전재, 재배포 금지
※ 청소년에 유해한 댓글 과 광고/반복게재 된 댓글은 작성을 금지합니다. 위반된 게시물은 통보없이 삭제됩니다.
주간 핫 클릭
정치
사회
연예
글로벌
북한
주소 : (100-120)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5가 120 단암빌딩 3층 뉴데일리(주) | 등록번호: 서울 아00115 | 등록일: 2005년 11월 9일 | 발행인: 인보길 · 편집인: 이진광
대표전화: 02-6919-7000 | 팩스: 02-702-2079 | 편집국: 02-6919-7053,7030 | 광고국: 02-6919-7008
Copyright ⓒ Newdai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