⓸독일-한반도 통일의 차이점, 국민과 백성의 차이

거대한 벽, 동독 ‘국민’과 북한 ‘백성’의 실생활

동독, 통일 전부터 국민들에게 이동·공연·사생활 자유 부여…북한 김씨 왕조는 ‘불가’

전경웅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7.07.25 05: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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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데일리 통일·외교부장입니다. 통일부,외교부,북한,국제 분야를 담당합니다.

    저의 주된 관심은 '국익보호'입니다. 국익보호와 관련된 이슈는 국제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국내의 어두운 세력들이 더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기자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자가 알려주는 정보가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동독과 북한은 냉전 시절 가장 중요한 국제관계요소였던 안보에서만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동독은 ‘국민(인민)’이 있었던 반면 북한은 ‘백성’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정치 체제와 개방성이었다. 

동독, 공산당 독재·강력한 감시 속의 소소한 자유

동독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처럼 일당 독재 체제였다. 동독 공산당은 ‘민주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사회주의 통일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형식상의 선거를 위해 ‘기독교 민주연합’ ‘자유민주당’ ‘국가민주당’ ‘민주농민당’ 같은 가짜 정당도 만들어 놓았다.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은 공산국가 특유의 선전선동과 엄중한 감시 체제를 통해 국민들의 여론을 통제했다. 동독 국민들이 얼마나 엄중하게 통제를 받았는지는 1951년과 1954년, 1968년의 국민 투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세 차례의 투표에서 ‘사회주의 통일당’의 주장은 국민들로부터 각각 95.98%, 93.46%, 96.4%의 지지를 얻었다.

동독은 국민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경찰보다는 정치공작기관 ‘슈타지(Stasi)’를 활용했다. 1990년 동독이 해체되기 직전 ‘슈타지’는 9만 5,000여 명의 요원, 18만 명의 유급 협력자, 1개 사단 규모의 별도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 동독 인구가 1,610만 명이었으므로 주민 60명 당 ‘슈타지’ 관련자 1명이었다. 2015년 말 기준 한국 경찰 수가 국민 462명 당 1명, 실제로 일선에서 활동하는 순경부터 경사는 국민 594.5명 당 1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치밀한 감시망이었다.

여기다 38만 8,000여 명의 소련군, 16만 명의 소련군 군속이 근무하고 있는 동독의 공산 독재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이런 감시 체제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동독은 1960년대부터는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자유를 허용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록 밴드를 결성한다거나 공연하고, 서방 국가의 음반이나 영상을 입수해 감상한다거나 하는 일들도 암묵적으로 허용했다고 한다. 또한 개인의 사생활에 속하는 성생활이나 문화생활, 취미활동,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견 표현도 공산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만 아니면 허용될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공산독재체제의 문제점까지 비판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불법 구금과 신체적 고문, 학대 같은 경우에도 1960년대부터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정신적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동독 사회의 분위기는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 서방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후와 비슷할 정도로 비교적 자유로웠는데, 실은 동유럽 국가 대부분이 비슷했다고 한다.

베를린 통해 밀려든 서구 문화 못 막은 동독

1970년대 동독은 서독과의 교류를 허용한다. 1969년 9월 집권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과 조건부 자금지원을 받아들인 동독은 1971년부터 서독 TV방송 시청을 허용한다.

당시 동독 정부는 “음성적으로 시청하는 서독 TV 방송을 강제로 막아 범죄자를 양산하기 보다는 차라리 서독 TV 시청을 대범하게 허용하고, 이를 통해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자”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2번의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동독과의 협의를 이어나갔다. 1972년 12월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 동·서독 민간 교류의 폭을 크게 넓혀놓는다. 이 중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서독 방송의 동독 특파원 파견 허용과 단기 취재여행 허용이다.

1971년부터 서독 TV 방송 시청을 허용한 동독은 “까짓 거 서독 방송이 들어온다고 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2년 동안 서독 TV의 뉴스를 보면서 동독의 선전용 방송을 불신하게 된 동독 국민들은 서독 TV 뉴스의 동독 특파원 파견에 상당한 기대를 갖는다. 1973년부터는 상호 간 언론인 파견이 허용됨에 따라 서독 언론들은 동독에 기자들을 보낸다. 1976년에만 680여 명의 서독 기자들이 동독을 찾았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해인 1988년 당시 동독 내 서독 특파원은 19명, 서독 내 동독 특파원은 6명이나 됐다고 한다.

동·서독 간의 교류는 곧 우편·통신 교류, 환경·보건 교류 등으로 이어졌다. 1976년 3월 동·서독 간 우편·통신협정이 체결된 뒤 매년 2억 통의 편지와 3,600만 건의 소포가 베를린 장벽을 넘나들었다. 전화 회선은 1,529개가 유지됐다. 1974년 동·서독 간 보건 협정이 체결된 이후로는 전염병 치료, 중독성 약품 오·남용, 장애인 재활 등에 관한 정보 교류가 활발해졌고, 양측 간의 의료지원도 가능해졌다. 다만 서독 의약품의 동독 반입은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학술·과학기술·문화 교류는 상대적으로 늦었다. 1973년부터 시작된 동·서독 간 학술·과학기술·문화 교류는 1986년 5월과 1987년 9월 각각 협정을 맺으면서 상호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문화 교류는 1973년 11월부터 협정 협상을 시작했지만 1986년에야 체결됐다. 하지만 체결 이후에는 서방 문화가 물밀 듯이 동독으로 퍼졌다. 연극, 콘서트, 전시회의 교환 개최를 비롯해 학생과 학자, 문화예술인 상호 방문, 서적 교류, 자료 대출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동독 사회는 서방 문화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동독, 공산 체제 붕괴 불가능 확신…그 후

동독이 서독과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공산체제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2014년 6월 4일 염동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이 ‘데일리NK’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1980년대 중반부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에서는 국민들의 개혁·개방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하지만 동독에서는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19년째 장기 집권 중이었고, 소규모 시위가 있기는 해도 조직적인 반체제 시위나 세력도 없었다고 한다. 시위대의 요구 또한 여행자유 확대, 인권, 환경보호 등이었다고 한다.

또한 1989년 5월 치른 동독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도 ‘사회주의 통일당(동독 공산당)’과 위성 정당들의 지지율이 98.85%에 달했고,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 이후 서독에 침투시킨 간첩 또한 3만 명에 달해 언제든지 서독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상태여서 동독의 공산체제가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동독 정보기관 겸 비밀경찰 ‘슈타지’와 동독 주둔 소련군 또한 호네커 서기장과 사회주의 통일당이 동독의 붕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본 근거가 됐다. 하지만 이들은 동독 국민들도 ‘사람’이고 감정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서독 TV뉴스를 통해 반정부 시위 현장을 보는 동독 국민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독 시위대의 정치 구호가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옷과 거리에 가득 찬 멋진 차들, 가게, 고층 빌딩이었다. 서독 TV가 보도하는 사회비판 뉴스에서도 서독 국민들이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곳에 눈길이 쏠렸다.

서독의 TV방송도 보고 문화생활도 즐기는 등 다른 공산독재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동독 국민들은 서독의 일상생활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을 갖는다. 

동구권에서는 ‘넘버 2’라고 자부하던 동독 국민들은 서방 문화와 해외 소식을 들으며, 동독에서의 생활과 서방국가에서의 생활을 비교하는 상상을 한다. 노인이나 어린이 등 비교적 서독 여행이 자유로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동독 국민들의 상상력과 감정을 자극했다.


동독 국민들은 서독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시작으로 차츰 공산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회의감은 앞뒤 꽉 막힌 동독의 현실을 보며 환멸로 변해간다. 이것이 나중에 베를린 장벽 붕괴를 불러온 ‘여행 자유화 100만 시위’의 원동력이 된다.

국민 없는 북한: 김씨 왕조의 백성들

한편 북한은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이 끝난 뒤부터 이상하게 변해간다. 조선 노동당(공산당) 중심의 일당 독재체제를 펼치는 듯했지만,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피의 숙청이 이어지며 ‘김씨 왕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김일성은 6.25전쟁 중이던 1950년대 초반 중공 지도부와 함께 공산당 활동을 했던 연안파 지도자 ‘무정’을 숙청한다. 김일성은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 12월에는 통일 실패의 책임을 물어 남조선 노동당 1인자이자 북한 2인자인 박헌영과 그의 측근 이승엽 등을 숙청한다.

김일성은 1956년 8월 동유럽에 다녀온 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연안파와 소련파를 ‘종파 분자’로 몰아 모두 숙청한다. 1967년에는 자신과 함께 ‘항일 투쟁’을 벌였던 갑산파 동료들을 숙청한다. 김일성은 1969년 북한 인민군 수뇌부 중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숙청하며 일인 독재체제를 완성한다. 

김일성은 자신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들었던 동료들을 모두 숙청하는 동시에 아들 김정일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자신과 가족을 우상화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북한 주민들을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킨다. 1955년 12월 발표한, 주체사상의 시원으로 알려진 ‘사상사업에서의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글도 이맘 때 나왔다.


김일성의 행동은 조선과 일제를 거치는 과정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을 겪지 못했던 북한 주민들을 ‘왕조 국가의 백성들’로 만들기 위한 조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김일성이 북한에 등장했을 때나 6.25전쟁 직후에는 조선 말기와 일제 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아직 생존하던 시기였고, 소련과 중공 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어 북한에 김씨 왕조가 세워진다고 해도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다만 외부 세계의 정보가 유입되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김일성의 예상은 적중했다. 일제 때 활동했거나 남한 출신인 지식인, 정치인들을 제거하고 외부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자 북한 주민들은 그저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김일성의 주민 통제는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2년 12월 헌법에 주체사상을 명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 중반에는 5가구 당 1명의 선전요원을 배치하고 주민들을 감시하는 ‘5호 담당제’를 시행한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은 뒤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주민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강화한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으면서 배급경제체제가 무너지고, 주민들 가운데 탈북자가 크게 늘어났지만, 평양과 각 도 소재지 등 주요 거점의 감시는 매우 강화됐다.

탈북한 주민들에 대한 처벌도 심해졌다. 탈북자의 가족은 물론 친인척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감금하는가 하면 탈북하려다 붙잡혀 온 사람을 공개처형하기도 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과 이후 시행한 ‘햇볕정책’,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등을 거치면서 남북 간의 민간교류가 확대되는 듯 했지만, 실상은 북한 당국이 지정한 곳에서 허용한 행동만 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동·서독과 같은 민간 교류는 불가능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은 뒤 권력을 세습한 김정은은 주민들에 대한 감시를 느슨하게 할까 기대를 모았지만, 그는 오히려 부친보다 더욱 강력히 주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데일리NK’ 등 북한전문매체에 따르면, 김정은은 후계자 시절이던 2010년 11월에 “5호 담당제를 3호 담당제로 바꾸라”며 주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특히 외부세계의 정보가 북한 주민들에게 흘러드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외부 정보에 노출된 ‘북한 백성들’은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과 다른 한반도 통일에 필요한 전제 조건 ‘외부정보 유입’

이처럼 독일과 한반도의 상황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동독은 서독과 통일하기 전부터 공산당 지도부가 국민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다. 반면 북한은 주민들을 ‘국민’으로 보기 보다는 왕조의 소유물인 ‘백성’으로 취급했다.

동독은 국민들의 여행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하고, 서독의 TV방송과 우편물 자유 교류, 언론 교류 등을 승인한 반면, 북한은 한국을 비롯해 외부 문화 콘텐츠가 유입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주민들이 동맹인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조차 이동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다.


동독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국민들의 개혁 요구를 받아들여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물러나기도 했지만, 북한에서는 그런 요구 자체가 없었다. 주민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데다 지도부 교체 요구는 ‘체제 전복 및 반역죄’로 취급돼 3족이 멸하는 화를 입기 때문이다. 북한이 왕조국가나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를 통해 북한 내부 상황이 알려진 뒤 지금까지도 세계 인권단체들은 북한 민주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 세계 인권단체들은 북한 주민들을 위해 외부세계 정보를 가감 없이 들여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 영국, EU, 일본, 호주 등 각국 정부도 이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반도 통일은 둘째 치고 북한 주민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국민’이 되어야 하는데 그 전제조건이 바로 외부 세상과 자신들의 현실을 비교할 수 있는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라고 봐서다. 탈북자 사회 또한 북한 주민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면, 독일 통일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반도 통일 또한 크게 앞당겨질 수 있다는 생각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즉 한반도 통일의 전제조건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 국민’으로 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⓹통일의 실패 사례: 남예멘-북예멘’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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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데일리 통일·외교부장입니다. 통일부,외교부,북한,국제 분야를 담당합니다.

    저의 주된 관심은 '국익보호'입니다. 국익보호와 관련된 이슈는 국제관계에서만 발생하지 않습니다. 국내의 어두운 세력들이 더 큰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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