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여론에 기댄 특검...‘In dubio pro reo’ 法諺 의미 되새겨야
  • 올해 4월7일, 이재용 부회장 사건 첫 공판 기일, 법정을 나서는 박영수 특별검사(오른쪽)와 윤석열 당시 수사팀장. ⓒ 사진 뉴시스
    ▲ 올해 4월7일, 이재용 부회장 사건 첫 공판 기일, 법정을 나서는 박영수 특별검사(오른쪽)와 윤석열 당시 수사팀장. ⓒ 사진 뉴시스

    “그룹차원 내부 사건에서 가장 입증이 어려운 부분, 돈을 건넨 사실, 총수 관여. 이 사건 300억 준 사실과 이재용 독대한 사실, 자금지원 지시한 사실 모두 인정하고 있다. 통상의 입증에 가장 어려운 부분에 해당하는 두 가지 사실을 피고인들이 확인했다.

    관련 증거, 독대에서 경영권 승계 논의 등 입증됐다.

    (중략)

    뇌물공여에서 진행된 경영권 승계, 제일모직 합병, 신규순환고리 해소, 엘리엇 대처 방안 마련 등 (청와대가 삼성그룹에) 실제 도움을 준 사실도 입증됐다.”

    - 7일 오후 이재용 부회장 사건 53차 공판, 박영수 특별검사의 구형 이유 중 일부.

    기자가 서초동 중앙지법 법정을 출입하기 시작한 건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 동안 제법 많은 사건을 방청석에서 지켜보고, 때론 본인이 속한 기업을 대리해 소송 당사자로서 원고 혹은 피고석에 앉기도 했다.

    법정 취재를 오래하다 보면, 나름 해당 사건의 흐름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때론 “변호인이 왜 저렇게 변론을 진행할까” “검찰이 이렇게 나갔으면 혐의를 입증하는데 더 수월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가끔은 방청석을 나오면서 ‘아직 정의는 살아 있다’는 혼잣말을 하기도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에 고개를 가로저을 때도 적지 않다.

    7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 구형 공판도 그랬다.

    법정에 직접 출석한 박영수 특검이 읽은 장문의 구형이유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문구는 이랬다.

    ‘이런 구형은 처음 본다.

    박영수 특검은 장문의 구형이유를 읽어 내려가면서 공소사실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보다는, ‘국민의 뜻’을 강조하는데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

    구형이유에 담긴 표현의 상당수가 비법률적 용어라는 사실도 이례적이었다.

    박 특검은 “수사개시 이래 국정농단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법률가로서 품격을 지키고, 편향된 시각을 갖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경계하면서, 공소유지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평했다.

    박 특검은 유독 객관적 시각, 균형 잡힌 시각을 강조했지만, 그가 밝힌 구형이유는 역설적으로 균형감이나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형 이유 곳곳에는 “입증됐다”는 단정적 표현이 자주 등장했지만, ‘무엇으로’ ‘어떻게’ 혐의를 증명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비법률적인 용어를 사용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버린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검의 구형이유에 나온 비법률적 표현은 한 둘이 아니다. 이 사건을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범죄’라고 정의하면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구형한 주된 이유는 놀랍게도 ‘경제민주화’와 ‘국민주권’이었다.

    법률적 표현 대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나 나올법한 정치적인 표현을 빌려, 피고인들을 ‘비난’한 대목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의 뼈아픈 상처’, ‘국민의 힘으로 법치주의와 정의를 바로세울 소중한 기회 등의 문구가 대표적이다.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피고인의 태도를 볼 때, GDP의 18%를 차지하는 1등 기업이, 총수 개인을 위한 기업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는 표현 역시, 구체적인 법리와 증거에 바탕을 둔 구형이유라기 보다는, 취재기자들을 상대로 한 ‘언론용 워딩’이란 인상이 짙다.

    특검의 이런 태도는 수사 당시부터 공판 내내 이어졌다. 피고인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켜 재판을 유리한 분위기로 이끌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설명이 쉽지 않은 대목이다.

    공소사실에 대한 입증은 첫째도 둘째도 실정법, 즉 현행 형사법의 각 조문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검사는 피고인의 행위가 형사법령 어느 조항에 해당하는지, 범죄구성요건이나 위법성 혹은 책임을 조각(阻却)할만한 사유는 없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입증방법은 서증조사를 통해 확인된 물증(신문조서·녹취록 등)이나 증인의 진술이다.

    즉, 피고인에 대한 유죄 입증을 위해 검사가 해야 할 일은 ‘무죄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해도 좋을 만큼 확실한 증명’이다.

    30년 넘게 검찰에 몸담으며 대검 중수부장까지 지낸 박영수 특검이, 이런 기본적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물론 박 특검은 ‘국민주권의 훼손’과 같은 헌법적 가치를 내세우며, 피고인들에 대한 중형 구형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재용 피고인이 300억원을 지급한 사실과,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독대한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에, ‘돈(뇌물)을 건넨 행위’와 ‘총수의 가담 사실’이 입증됐다고도 했다.

    그는 ‘청와대 말씀자료’와 안종범 수첩 기재사항도 증거로 인용했다.

    그러나 박 특검의 이런 논거는 ‘말장난’이다.

    삼성그룹이 전경련의 요구를 받아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기금을 출연한 행위는, 다른 대기업의 그것과 달리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청와대의 요구를 받은 전경련이 각 기업의 매출을 기준으로 할당금액을 정해 통보한 사실, 이에 따라 삼성그룹 각 계열사가 설립기금을 모아 출연한 사실은 이 사건 공판과정을 통해 이미 확인됐다.

    반면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기금 출연을,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 ‘부정한 청탁’의 대가로 볼 수 있다는 증거 혹은 증언은, 이 사건 재판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돈(뇌물)을 건넨 행위를 피고인 측이 시인했다’는 박 특검의 주장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의 3차례 독대과정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50회가 넘는 공판을 통해서도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독대’의 특성상 둘 사이에 오고간 대화내용을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난센스였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은,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3차례에 걸쳐 독대를 했다는 것 뿐이다. 이 밖에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달리 이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다. 이런 사실에서 바로 ‘총수의 가담 사실이 입증됐다’는 박영수 특검의 논리는, 억측을 넘은 궤변이다.

    박 특검이 증거로 내세운 ‘청와대 말씀자료’는 담당 행정관이 인터넷 포털을 검색해 만든 문건으로, 면담을 위한 ‘참고자료’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공판과정에서 드러났다. 다른 증거인 ‘안종범 수첩’은 ‘독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정황증거(간접증거)의 효력만 인정받았을 뿐이다.

    특검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빈약한 증거-청와대 말씀자료와 안종범 수첩-그 어디에도, ‘이재용 혹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지원’이나 ‘정유라 승마지원’이란 문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검의 논거가 ‘옹색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사가 공소사실을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구형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날 박영수 특검의 구형은 김영삼 정부 이전 우리 사법부의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는 ‘공안사건’ 재판을 떠올리게 했다. 1970~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수사당국은 존재하지도 않는 사건을 만들어, ‘시국사범’을 단죄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시 검찰은 사실과 관계없는 ‘가공의 틀’을 만들어, 사건을 꿰맞추는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이 사건 피고인들의 변론을 담당한 송우철 변호사팀은, 특검이 혐의사실을 입증할 만한 서증이나 증언도 없이, ‘가공의 틀’을 만들어 피고인들을 옭아매려 한다고 비판했다.

    변호인단은 7일 최후변론을 통해, 특검이 보인 정치적 행태를 우회적으로 꼬집었다.

    “법률가로서 당연히,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법적논쟁은 외면하면서, 대중에 기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무려 20년 전 에버랜드 사건을 들추면서 이 사건과 연관 짓는 것은 논점이탈이 아닌지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특검은 이 사건 피고인들을 기소하면서, 이들에 대한 혐의 입증에 강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5개월이 지난 지금, 특검이 ‘차고 넘친다’고 했던 증거는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공은 재판부로 넘어갔다.

    유죄를 인정할 직접 증거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서, 간접증거만 난무하고 있는 이 사건 1심 판결을 매듭지어야 하는 재판부의 고충은, 말이 필요 없을 만큼 클 것이다.

    어떤 간접증거를 유죄 혹은 무죄의 근거로 채택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재판부의 자유로운 심증에 달려 있댜.

    다만 당부하고자 하는 법언(legal maxim, 法諺)이 있다면 이것이다.

    “In dubio pro reo”
    (인 두비오 프로 레오 /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