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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외신 기자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의 보상(청구권) 문제를 놓고 논전을 벌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잘 아는대로 강제징용은 한일기본조약에서 해결됐다"는 외신 기자의 주장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양국 간의 합의가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이에 따라, 문제의 '한일기본조약(한일청구권협정)'에서는 어떻게 규정돼 있는지 이목이 쏠린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취임 100일 공식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국내 매체에서 189명의 취재진이 참석한 것 외에도 외신에서도 28명의 취재진이 참석했다. 최근 외교·안보적으로 중대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점을 반영하듯 미국의 CNN·NBC 등에서도 취재진이 참석해 질문을 던지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문제가 된 강제징용 청구권 관련 질문은 일본 NHK 기자의 질문에서 나왔다.
이케하타 슈헤이(池畑修平) NHK 서울지국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광복절 연설에서 대통령은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 보상 등 국제사회의 원칙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며 "대통령도 아는 대로 강제징용은 과거 노무현정부 때 '한일기본조약에서 해결된 문제이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가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를 분리해서 답했다.
위안부 보상 문제에 관해 문재인 대통령은 "한일회담 당시 알지 못했던 문제"라며 "위안부 문제가 알려지고 사회 문제가 된 것은 한일회담 훨씬 이후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회담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문제"라며 "위안부 문제가 한일회담으로 다 해결되었다라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이 설명은 일응 있을 수 있는 설명이라는 지적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예비회담과 본회담이 진행된 1960년대 초에는 '위안부 문제'라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정신대 문제' 등으로 공론화되며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90년대 초, 이 문제가 공론화되며 한일 관계에 쟁점이 되자 다니노 마사히로(谷野雅弘)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91년 8월 "보상 문제는 이미 1965년의 청구권협정으로 완료됐다"고 했다가, 이듬해 2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가 "국가 간의 해결은 끝났지만, 개인 소송의 여지는 남아 있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 당시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협정에서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개인의 청구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맥락이다.
문제는 최근 '군함도' 영화 열풍을 타고 답한 듯한 문재인 대통령의 강제징용자 보상에 관한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 답변에서 "양국 간의 합의가 개개인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양국 간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징용당한 강제징용자 개인이 미쓰비시 등을 비롯한 상대 회사를 상대로 가지는 민사적인 권리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의 판례"라고 주장했다.
이는 한일 간의 국교를 정상화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청구권협정의 문언에 정면 배치되는 주장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은 제2조 1항에서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재산, 권리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했다.
3항에서도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재차 확인했다.
혹시 문재인 대통령이 한 주장이 추후 나올까봐, 조약에서 '개개인과 법인을 포함한 국민 전부의 청구권'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을 거듭 확인해놓은 것이다. "양국 간의 합의가 개개인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는 없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설명과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제사회의 원칙을 지킬 것"이라고 했는데, 조약은 문언에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원칙이고, 빈 협약 제31조 1항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날 NHK 기자가 질문한대로 진보정권을 포함한 역대 정권에서 강제징용자 보상을 일본에 청구하는 방식 대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모색한 것도, 이처럼 국가가 조약을 통해 개개인의 청구권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형태로 처분한 탓에 일본에는 청구할 길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93년 6월 "물적 보상은 우리 정부가 할테니, 일본 정부는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촉구했고, 이에 호응해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 당시 일본 관방상은 "배상 이외의 대응을 모색하겠다"고 표명했다.
진보정권을 이끌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98년 4월 외교통상부를 통해 "배상 요구는 않겠지만 과거 행적을 반성하라" 촉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NHK 기자가 주장했던대로 "보상은 한국 정부가 하는 것"이라고 확인했다.
노무현정권에서 청와대 요직에 있어 NHK 기자가 지적한대로 이를 "잘 알았을" 문재인 대통령이 돌연 새로운 주장을 펼친 이유는 뭘까. 문재인 대통령의 답변은 국내정치적 목적이라면 몰라도 국제사회에서는 통용되기 어려운 주장이라는 관측이다.
전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한 조약의 기본적인 문언을 부인한다면, 이는 조약의 효력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천명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의 발전'이 이러고서도 가능할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그런 과거사 문제가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되겠다"며 "과거사 문제는 과거사 문제대로, 또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한 한일 간의 협력은 협력대로 별개로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