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靑 경내로 이전… YS 시절 괴소문에 휩쓸리기도
  • ▲ 청와대 경내 보안구역에 있는 석불여래좌상. 보호전각은 1980년 불심이 깊은 이순자 여사가 건립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사진DB
    ▲ 청와대 경내 보안구역에 있는 석불여래좌상. 보호전각은 1980년 불심이 깊은 이순자 여사가 건립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사진DB

    일제강점기 지금의 청와대 경내로 옮겨진 석불여래좌상을 원래 있던 자리인 경상북도 경주로 반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시민사회계에서 빗발치고 있어 청와대의 대응이 주목된다.

    문제가 된 석불좌상은 청와대 경내의 보안구역인 침류각 뒷편에 위치해 있다.

    8~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돼 있을 뿐이지만 일반에 공개될 경우 보물 지정 가능성도 거론될 정도로 역사적·문화적·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이 지난 7일 청와대와 국회에 각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이 불상의 반환 문제가 공론화됐다. 혜문스님은 진정서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주에서 약탈해 서울로 옮긴 불상이 지금까지 청와대 경내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지방분권운동 대구경북본부가 22일 석불좌상의 경주 반환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데 이어, 경주문화원과 경북정책연구원이 23일 "원래 경주에 있던 석불좌상이 경주로 반환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시대정신"이라며 "청와대 경내의 석불좌상을 즉각 경주로 반환하는 행정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가세했다.

    시민사회계의 요구를 보면, 불상을 경주로 '반환'해야 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주에서 약탈'했다는 표현도 나온다. 애초에 이 석불좌상은 언제 어떻게 청와대 경내로 옮겨졌던 것일까.

    경주 도동동에 이거사(移車寺)라는 폐사지가 있다. 삼국사기 성덕왕 졸기에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성덕왕릉 북쪽 도동동(옛 경주군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폐사지를 이거사지로 비정하고 있다.

    지금도 이거사지에는 3층석탑의 잔재가 무너진채 남아 있는데, 석불좌상도 본래 이거사에 있었던 것으로 방치돼 있다가, 국권을 일제에 빼앗길 무렵 오히라 료조(小平亮三) 경주금융조합 이사가 사들여 자신의 집 정원에 옮겨놓았다.

    그런데 1912년 11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초대 조선 총독이 도쿄로 출장가는 길에 경주에 들렀다. 소네 아라스케(曾彌荒助) 통감 시절 추진했던 경주 석굴암의 경성 해체·이전 계획이 현실성이 있는지 직접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경주에 들른 데라우치 총독은 오히라 이사의 자택을 찾았다가 석불좌상을 우연히 보게 됐고, 마음에 들었던지 연신 그 자태를 칭찬했다. 그러자 오히라 이사는 총독에게 아부하려는 심산에서, 총독이 도쿄에 가 있던 사이 석불좌상을 남산 왜성대(倭城臺)의 총독공관으로 옮겼다.

    이후 총독공관에 있던 석불좌상은 1939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새로운 총독공관인 경무대(景武臺)가 완성되면서 함께 옮겨졌다.

    불심이 깊어 혜월스님·만공스님 등과도 얽힌 일화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은 불상을 옮기기 전에 그 내력에 대해 조사할 것을 지시해, 이 때 이와 관련한 총독부 문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 대구·경북지역 15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23일 경주시청 브리핑룸에서 청와대 석불좌상의 경주 반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대구·경북지역 15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23일 경주시청 브리핑룸에서 청와대 석불좌상의 경주 반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해방과 건국이 되고, 경무대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는 와중에도 석불좌상은 계속해서 경내에 머물렀다.

    1980년 불심이 깊은 이순자 여사가 영부인으로 청와대에 들어온 뒤, 석불좌상이 경내에서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채 자연풍화를 겪고 있는 것을 안쓰럽게 여겨 보호전각을 건립할 것을 지시해 불상이 전각 밑으로 들어가는 정도의 변화만이 있었다.

    청와대 보안구역 내에 있어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그 존재를 아는 수준이던 석불좌상에 세간의 관심이 쏠린 것은 1993~1994년 연간 김영삼정부 초창기 때였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3월, 구포역에서 경부선 철도노반이 내려앉으면서 무궁화호가 전복되는 대참사가 일어나 78명이 죽고, 198명이 다쳤다.

    그해 7월에는 김포발 목포행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추락해 66명이 사망했고, 10월에는 서해훼리호가 전북 위도 인근에서 침몰하면서 292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잇달았다.

    이듬해인 1994년 10월 21일에는 성수대교가 끊어지면서 32명이 사망했고, 사흘 뒤인 24일에는 충주호 유람선상에서 화재가 일어나 배가 전소되면서 25명이 소사·익사하는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다.

    이렇듯 정권이 바뀌고 기이한 대참사가 잇따르자 시중에는 괴소문이 번졌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경내에 있던 불상을 폐불훼석(廢佛毁釋)해 나라에 재앙이 계속된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이 외신에까지 보도되자, 당시 청와대는 27일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경내의 석불좌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잘 있다고 공개하는 행사를 갖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석불좌상은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한 차례 언론을 상대로 공개 행사를 가진 뒤 10년이 가까워지도록 공개되지 않고 있다. 최근 대구·경북 지역 시민단체와 시민사회계의 반환 요구를 계기로 방송사의 촬영 요청이 있었음에도 청와대는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경북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문화계의 석불좌상 반환 요구에 청와대가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불상이 현재 청와대 경내에 있지만 관리는 문화재청에서 하고 있다"며 "문화재의 안전한 보존을 가장 우선시하면서 문화재청의 의견을 수렴해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