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 말고 비켜!" 미국의 '코리아 패싱' 그때 그들은...<새 연재: 한미동맹>

트루먼의 협박 편지...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무시...이승만의 반전 카드
거제도 포로 폭동 미장군 납치 모두 판문점 북한대표 남일의 작전이었다

인보길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7.09.07 18: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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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⑧ 새 상대 "아이크" 등장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포럼 대표


▶ 트루먼 "휴전 거부하면 가장 심각한 결과 초래" 협박 편지

워싱턴에서 트루먼이 친서를 보내왔다. 부산정치파동 두달 전 3월의 일이다.

“더 이상 휴전협상을 반대하면 곤란하다.
만일 한국정부가 유엔군 측의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한국전쟁 해결 노력을 계속 거부한다면
‘가장 심각한 결과만(only the most serious conseqences) 초래될 수 있다.”
휴전 성립을 지지해달라면서 이젠 당부 아닌 협박조 통첩장을 던지고 있다.

편지를 응시하는 이승만은 큰 소리로 한마디 던진다. “편지 자알 썼구먼”
이 말은 마음에 안드는 편지를 보았을 때 툭하면 나오는 이승만의 버릇이다.

미국도 트루먼도 그렇게 겪어보고서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도!

3년전 건국 직후 미군철수를 서두르는 미국에게 국군 무장과 한국방위 선언, 아니면 나토와 같은 태평양동맹체 결성을 해달라고 간청하였을 때 국무성이 가로막고 몽땅 거부했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군은 탄약조차 2일분 밖에 없으니 탄약이라도 보내달라’고 애원하자 돌아온 대답은 “감당 못할 군사력 욕심보다 경제걱정이나 하라”였다.

“그냥 떠나면 전쟁난다”고 애걸복걸 했건만, 도망치듯 떠나간 미군이 지금 다시 돌아와
전장에서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다. 이승만은 또 트루먼에게  편지를 썼다. “38선은 적들이
제발로 없앴으니 행여 원상회복하려는 시도는 생각지도 말고 이번 기회에 한반도 통일을 완성해야 미국의 앞날에도 좋다.”고, 트루먼도 호응하는 듯 하더니 중공군 참전 후에 허둥지둥 영국의
압력을 받자 맥아더 목 자르고 일방적으로 휴전을 결정, 3년 전처럼 떠나지 못해 안달이다.

강대국이란 늘 이런 것, 이승만은 마음을 다잡고 긴 답장을 쓴다.


“휴전보다 통일에 목숨을 건 한국민이 미국 말을 들으려면 방법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한미간에 ‘상호안보조약(mutual security pact)’을 체결한다면 내가 국민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만, 안보조약이 없다면 미국이 또 한국을 포기할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에 떨 것이므로
안보동맹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리고 미국정부 일각에서 한국은 일본의 도움없이 방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데 자꾸 그러면 반공적인 한국인들도 일본보다는 차라리 공산주의를 더
좋아하게 될지 모르며, 미국은 한국군을 신속히 증강시켜 줘야만 휴전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편지에도 워싱턴의 대답은 “NO”였다. 국무장관 애치슨이 앞장 서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트루먼 정부는 작년 1951년 5월 채택한 NSC 48/5 (아시아정책)에서 이미 ‘한국 배제’를 확정해두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 필리핀과 개별적인 상호방위조약을 맺기로 정하면서 ‘한국은 일본권’이므로 조약대상국에서 빼버렸던 것이다. 이 정보를 놓지지 않은 이승만은 더더욱 미국의 일본편중을 시급히 깨기 위해서라도 한미안보조약은 반드시 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국가독립문제로 그 긴요성이 이승만을 달군 것이었다.


▶ 거제도 포로수용소 잇따라 폭동...북한 휴전대표 남일이 배후조종

“한국 전쟁에는 전선(戰線)이 3개다. 전방전투, 판문점 휴전협상, 그리고 포로수용소”
 이것은 휴전협상을 맡아 마무리 지은 클라크 유엔사령관의 뼈저린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처럼 당시 남쪽의 포로수용소들에서는 날마다 ‘포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초의 이념전쟁인 한국전쟁의 또 하나 특징은 단기간내 포로숫자가 폭증한 일이다.

불과 4개월간 한반도 남단에서 북단까지 전진후퇴를 거듭한 결과, 공방의 빠른 속도만큼 생겨난 것은 거대한 포로집단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독안에 갇힌 북한군 포로가 엄청났고, 중공의
인해전술로 중공군 포로도 많았다. 이들을 어디에 수용할 것인가.

일본과 오키나와까지 검토하던 맥아더는 결국 부산 거제도에 17만여명을 수용하게 된다.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뒤범벅된 수용소는 인원이 늘면서 갈등도 늘다가
1951년 7월 휴전협상 개시후 상상도 못한 상황으로 급변한다.
공산군 포로들이 비공산 포로들을 끌어내어 인민재판을 벌인 뒤 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이 깐나새끼. 자본계급 반동놈 예수쟁이...” 온갖 핑계로 몰매치고 찌르고 죽였다.

‘해방동맹’이란 붉은 조직이 등장한다. 주동자 이학구(李學九)는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위장투항’한 자이며, 진짜 실력자는 뒤에 합류한 박사현(朴士賢)으로 북한군 총좌(대령급) 황해도당 책임자, 역시 미군에 위장투항하여 거제도로 이송되었는데, 후에 밝혀진 그의 직함은
 ‘조선로동당 지하당 중앙조직위원회 거제도수용소 당위원회 위원장’이다.

1차 폭동은 51년 7월 하복(夏服)사건, 수만명의 여름옷을 마련하기 힘든 실정에서 탈출방지용  
원색표시 광목 옷을 트집 잡아 공산포로들이 들고일어났다. 진압과정에서 사상자가 나오자
판문점에선 “유엔군이 포로들을 집단학살한다”는 선전전으로 협상이 중단되고 유엔측은 기가 죽었다. 북한대표 남일(南日)의 협상전술, 그가 바로 ‘포로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다.

수용소에서는 북한 인공깃발이 날리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고 담요를 뜯어 만든 옷에
북한 계급장을 단 포로들이 ‘반공반동’으로 분류한 포로들을 끌어내 밤마다 인민재판에서
돌멩이 몽둥이 집단폭행 학살 암매장을 계속, 또 하나의 전장으로 변해버렸다. 

공포에 질린 반공포로들은 자위책으로 ‘반공청년단’을 어렵사리 편성한다.

2차 폭동은 9월, ‘해방동맹’은 본격적인 전면폭동을 준비했다. 반공포로들을 일시에 살육하고
수용소를 탈출, 미군 무기고 습격, 무기 탈취후 거제도 장악, 지리산 빨치산과 합류한다는
목표아래 밤마다 드럼통을 잘라 칼을 만들고 천막 지주로 창을 만드는 소리에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9월17일 밤, 드넓은 수용소 막사들에서 사제무기로 무장한 공산포로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반공포로 천막들을 습격, 꽹과리 치면서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곤장 수백대씩 치면 눈알이 튀어나오고 내장이 쏟아져 나오고 나흘동안 500여명이 시체로 변하였다.
미군은 만행을 보면서도 꼼짝 못하고 탈출만 겨우 막는 형편인데, 용감하게 막사에 쳐들어갔던
국군과 미군 병사 5명은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거제도는 인민공화국 해방구, 철조망엔 ‘반역자 이승만 죽여라’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만세‘등 담요와 의복으로 만든 플래카드가 수용소와 철조망을 뒤덮었다. 검붉은 글씨는 살해한 반공포로들의 피였다. 이 사건으로 공산포로 사상자가 생기자 판문점 남일은 또 “미군은 학살자”라며
길길이 뛰었고 공산권 언론들이 합세하였음은 물론이다.

3차 폭동은 이듬해 2월, 판문점에서 ‘장제송환-자유송환’ 포로 송환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했을 때 남일이 벌떡 일어났다. “유엔측이 자유송환을 고집하는데 그렇다면 실제로 희망자가 얼마나 되는지 숫자를 내놔라”며 고집을 부렸다. 그에 따라 유엔측은 뒤늦게 ‘심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일의 함정, 거제도 해방동맹에 ‘심사거부 투쟁’을 지령해놓은 다음이다.

심사반이 미군 헌병을 앞세워 천막에 들어가려 했을 때 무장포로들이 일제히 공격해왔다.

갖가지 사제 무기를 든 1천 5백여명의 공격에 응사, 포로 77명이 죽고 미군 1명도 죽었다.

남일은 ‘미국 학살자’ 선전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유엔측은 수용소장 피체럴드 대령을 강등시키고 후임에 프랜시스 도드(Francis T. Dodd)준장을 임명했다.

3월 1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태극기 물결과 함성소리에 덮였다.
반공청년단 포로들이 대대적인 반공 궐기대회를 연 것이다.
공산포로들이 행진하는 반공청년대에 투석전을 벌였다. 미군이 총을 쏘아 막아야했다.
반공포로들은 외쳤다.
“좌익 수용소들을 폐쇄하라. 우익동지들을 지옥에서 살려내라.”

“우리는 포로가 아니라 귀순병이다. 즉각 석방시켜 달라”

“우리는 대한의 반공투사들이다. 실지회복 북진대열에 참여시켜 달라”

“우리는 대한의 반공투사, 남북통일 없는 휴전은 결사 반대한다.”

반공포로들의 시위에 힘을 얻은 유엔측은 우익포로들부터 심사를 완료하였다.

송환희망자는 북한포로 11만1천 360명중 6만4천명, 중공군 2만 720명중 5천1백명.

북한에도 중국에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반공포로들이 두 배나 많았다.

이에 반발한 공산포로들이 기습해왔다. 진압하던 국군4명과 포로등 30여명이 또 죽었다.

★ 포로수용소장 도드 준장 납치...미군이 ‘항복문서’를 쓰다

4월 중순 판문점 남일이 새로운 지령을 내렸다. “고위 장교를 납치하라”

‘해방동맹‘ 박사현은 신임소장으로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는 도드 준장을 점찍었다. 

D-데이는 5월7일, 과격한 연좌데모를 벌여 돗드 소장이 오게 만들어 면담을 시작, 온갖 무리한
요구를 들이대며 시간을 끌었다. 수용소 밖에 나갔던 똥통 청소팀 20명이 돌아오면서 돗드를
뒤에서 덮쳤다. 전쟁사상 초유의 사태, 미군장군을 납치하고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총살하겠다.” 요구사항은 남일이 휴전 협상에 이용할 항목을 알려준대로다.

즉 야만적 행위, 모욕 고문 감금 대량학살, 기총사격 즉각 중지, 독가스와 세균무기, 원자탄 실험에 포로를 이용하지 말 것, 불법적인 강제송환 포기하고 전원 북한 송환할 것, 노예화하려는 심사 철회, 포로대표들의 자유활동 보장 등이다. 하나같이 거짓말들, 그리고 “총 쏘면 돗드 죽인다”며 인질극을 벌이는 공산포로들은 대규모 반란군이었다.

협상에 나선 사령관 콜슨 준장은 돗드의 구명 애원을 듣자 “모두 들어주자” 결심하고
포로들의 요구대로 각서를 작성해준다. 이것이 전세계의 조롱꺼리가 된 ‘항복문서’이다.

돗드 준장은 78시간 만에 석방되지만 미국은 유엔과 함께 치욕의 나락에 떨어진다.

공산국들은 일제히 포문을 열어 세균전, 독가스등 허무맹랑한 허위선전으로 미국을 규탄하고
소련의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거제도! 또 다시 히틀러의 학살수용소가 나타났다. 미국은
나치보다 비인간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남일은 판문점 협상의 모든 책임을 미국에 뒤집어 씌우고 과감한 양보를 하라고 궁지에 몰아세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용소 지붕에는 ‘승리 축하’ 깃발과 중공기 인공기들이 날리고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 초상화도 걸렸으며 공산포로들은 개선군처럼 승리행진을 날마다 계속하였다.

유럽의 나토 사령관으로 전임된 리지웨이 후임 클라크 사령관은 오자마자 그 뒤처리부터 해야 했다. 돗드를 도쿄로 소환하여 콜슨과 함께 강등 퇴역시켰고 “포로들의 강요로 만든 답변서면은
원천무효이며 휴전협상에 악용하려는 외부와 사전 계획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새 수용소장 보트너는 ‘황소’라는 별명답게 엉망진창된 수용소를 완전히 일신시켰다.

“인공기 계양자는 사살하라” 명령한뒤 그래도 인공기 거는 포로를 사살했고, ‘해방동맹’ 본부
76 수용소를 공병대를 동원하여 뒤집어 버렸다. 어마어마한 증거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사제 무기들과 1천여개의 수류탄, 그리고 암매장 시체들이 줄줄이 드러났으며, 특히 6월20일엔 전체포로들을 집단탈출시키며 전면봉기를 일으킨다는 작전 계획서들에 모두가 경악하였다. 수용소들 사이엔 지하통로가 뚫려있고 외부로 통하는 땅굴도 드러났다. 포로병원에서 외부밀통 통신문들이 발견되자 간호사들이 도망치고, 악질 포로들은 도주하는 동료포로들을 쫓아가 등뒤에서 찔러 죽이기도 했다. 

보트너는 친공-반공 포로들의 분리 수용작업을 진행하여 6월19일 완료하고 수용소 주변 2천여채 민가들도 이주시켰다.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대원들의 소굴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남일이 조직하여 다용도로 활용한 거제도 포로 폭동작전은 이렇게 끝났다.
반공포로들은 ‘자유송환’을 요구하는 혈서를 쓰고 ‘분단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클라크, 분노의 복수...맥아더도 못한 수풍발전소 완파, 평양 초토화

클라크 유엔사령관은 그야말로 뿔이 났다. 북한에 대대적인 공습명령을 내렸다.
치욕적인 항복문서로 땅에 떨어진 미군의 명예를 일으켜 세우고 벽에 부딪친 휴전협상을 뚫고나갈 돌파구는 교착상태의 지상전보다 역시 우월한 공군력에 있다.

그는 맥아더조차 주저하던 압록강 수풍발전소와 남아있던 공장지대를 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전폭기 485대를 출격시켜 평양 남쪽 공업지대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고 6월 23일 중폭격기 500대를 출격, 장진호 부전호 발전소와 수풍발전소까지 폭격하고, B-29 편대를 계속 북상시켜
대규모 공습을 거듭하였다. 하루 최고 1,400회나 출격하는 융단폭격 세례를 받은 평양 일대는
글자 그대로 초토화되어버렸다.

“우리는 북한지역 발전소의 반수이상을 파괴하였다”고 클라크는 발표하였다.

수풍발전소가 파괴되자 중공을 의식한 영국은 사전협의 없는 공격이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클라크는 이듬해 봄까지 북한 요지들을 파괴하는 ‘분노의 출격’을 멈추지 않았다.


▶ 김일성 “살려 달라” 휴전 애걸...스탈린 “나 죽을 때까지 안돼” 장기전 고집

급기야 김일성이 두 손을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B-29의 공습으로 지하에서 떨던 그는
평양이 잿더미로 변하자 마오와 스탈린에게 긴급 구원요청을 보낸다.

3년전 남침을 허락해달라며 스탈린을 졸랐던 김일성이 이제는 “전쟁 그만하자”고 매달린 것이다. 감히 스탈린에게 “포로문제를 양보해서라도 정전협정을 서둘러 달라”고 눈물로 애걸할 만큼

김일성에게 포로문제는 문제가 아니었다. 북한의 병력충원이 바닥 난 판인지라 그동안 국군포로들을 잡히는대로 총알받이로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던 것. 따라서 휴전협상에서 ‘포로 일괄송환’이 결정된다면 제네바 협정 위반이 들통나는 것이 더 걱정스런 형편이다.
전쟁만 끝난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다 양보하고 싶은 참혹한 지경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8월20일 모스크바, 스탈린을 찾아간 중공2인자 저우언라이는 조심스레 김일성의 말을 전한다. 

“북조선은 하루 인명피해가 포로숫자보다 많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마오 주석은 전쟁을 지속시켜야 미국이 지쳐서 새 전쟁을 못하도록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마오쩌뚱 역시 스탈린처럼 전쟁의 장기화를 꾀하여 왔던 것이다.

“마오쩌뚱 동지 말이 맞다”면서 스탈린은 거침없이 장기전 주장을 편다.
“북조선은 전쟁에서 크게 잃을 것이 없다. 지금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포로송환문제 협상에서 절대로 양보해선 안된다”라며 “내가 죽는 순간까지 양보를 허락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에 발맞추듯 11월 2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6.25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소베이트의 이득”이라면서 “조선의 전쟁은 오래 할수록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에 도움이 된다”는 결정문까지

채택하였다.

스탈린과 마오의 오월동주(吳越同舟)라고 해야할 ‘조선전쟁의 장기화’ 전략은
그들 나름대로 이유와 목적이 있다. 중공의 마오가 소련의 경제-군사원조 강화를 노린 반면에
스탈린은 마오의 소련 의존도를 높여 ‘티토화(유고슬라비아 티토의 독자노선)’를 막으면서
미국을 극동에 붙잡아둠으로써 유럽의 위성권 강화와 핵규형을 맞추는 시간을 벌려 하였다.

“미국은 장사꾼이다. 보라, 조그만 조선조차 패배시키지 못하잖느냐.
미국을 단호하게 다뤄야 한다. 중국은 잘하면 타이완을 되찾을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스탈린은 ‘조선전쟁’을 통하여 긴 국경을 맞댄 대국 중공을 얼르고 구슬려 지배하려는 예속화 전략을 초지일관 늦추지 않았다.
죽음의 구렁텅이에 매몰된 김일성은 클라크의 폭탄세례를 견디며 살아날 구멍이 열리기를
다음해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 했다.


▶ 우리 동포를 ‘강제이민’ 보내라고? 반공포로의 ‘3국 이관’ 반대

“북한 동포도 우리 겨레, 외국인 취급은 절대 할 수 없다” (조선일보 9.13일자)

12일 변영태 외무장관은 유엔가맹국인 모국(某國)이 귀환을 거부하는 공산포로를
’제3국에 이관’하는 안을 유엔에 제출하여 추진시키리라고 외전이 보도하고 있는데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현재 유엔군의 관리하에서 귀환할 것을 거절하는 공산포로들을 일시적 이민으로 인수할만한 보호국 선정안을 추진시키고 있다하는데 본 정부의 입장으로서는 이러한 어떤 제안에도 응할 수 없는 것이다. 본시 우리는 우리의 본의에 반하는 양분(兩分)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북한의 땅도 우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강토임에는 조금도 남한과 틀림이 없는 것이다.

북한 동포는 무도잔학한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학대를 받고 있으나 어서 빨리 해방되어야할 우리의 동족이다. 귀환을 거절하여 우리와 함께 싸우고자 원하는 그들은 공산도배의 멍에로부터 속히 해방시켜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을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취급하여 버린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절대로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북한을 중공에다 넘겨주는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이북에 잇는 우리의 모든 동포들을 외국사람으로 간주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러한 패륜의 사태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주권과 독립이 침식되고 말 것이며 유엔의 집단방위 전쟁도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 담화에서 ‘모국(某國)’이란 인도(印度)를 가리킨다. 

6.25발발 초기부터 소위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영국은 공산국들과 가까운 인도의 네루 수상을
앞세워 줄기차게 휴전을 추진하였고, 사회주의 노선의 네루는 스탈린, 마오와 휴전협상을 조정하는 해결사로 자임하고 나섰던 것이다. 

처음부터 공산측의 ‘강제일괄송환’과 유엔측의 ‘자유송환’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끝없는 입씨름만 거듭하자 네루는 ‘송환거부 포로들의 제3국 이관’이란 절충설을 내놓는다. 이에 가장 분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대통령, 변영태 외무장관을 불러 사전에 쐐기를 박는 ‘강력반대’ 담화를 발표케 하였다. 

한국 정부의 인도에 대한 경계심은 갈수록 적대감으로 변하였다.
유엔에서 ‘휴전몰이 압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통일 반대자’로 한국민들로부터 낙인찍힌 인도는 오랜기간 증오의 대상이었다.


휴전협상 무기 휴업...인도의 포로송환 절충안 유엔서 통과

 판문점 휴전 협상은 드디어 파탄을 맞고 말았다.
유엔측이 9월28일 제안한 ‘자유송환 3가지 선택지’를 공산측이 즉각 거부하고 10일간 휴회를
주장하자 유엔측 대표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이 “이 이상 회의는 무용지물이다. 내 제안을 당신들이 알아듣게 하는 방법은 이 자리를 떠나는 것 뿐”이라며 무기한 휴회를 선언했다.
클라크 사령관도 짤막하고도 강력한 성명을 낸다. “공산군 측의 모욕적이고 선전적인 장광설을
듣기 위해 유엔군이 다시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10월8일 판문점이 문을 닫자 즉각 전투의 불길이 격화되었다. 공산군은 휴전기간 준비했다는 듯이 매일 4만~5만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클라크의 유엔군도 고지마다 육해공의 입체공격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이런 전투는 이듬해 4월25일 회담이 재개될 때까지 6개월 반동안 절정을 이루었는데 특히 철원의 281고지, 백마고지, 금성지구의 수도고지, 지형능선, 금화지구의 저격능선 등은 격전지중의 격전지로 한국군 전사에 빛나는 전공이 수두록하다. 이때 전사한 국군이 전체 전사자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한편 판문점을 ‘무기휴업’시킨 미국은 유엔에서 10월22일 영국등 20개국과 함께 ‘포로 자유송환’ 원칙으로 휴전안을 제출하였으나 이를 거부한 소련은 11월 10일 ‘강제송환 원칙’의 다른 안을 냈다. 그러자 제3세력권의 리더를 노리는 인도가 19일 절충안을 내놓았다. 

요지는 ① 포로송환을 위해 폴란드 체코 스위스 스웨덴 등 중립4개국 포로송환위원회 설치.

②포로에 대하여 송환 강요 금지. ③ 포로 전원을 비무장지대로 옮겨 송환위원회에 인도할 것.
④ 4개국위원회는 송환협정 해석을 위한 제정위원을 지명. ⑤ 귀국을 희망하지 않는 포로들은
휴전 성립후 90일 후에 송환위에서 정치회담으로 이관할 것 등이다.
 미국은 자유송환을 강화하기 위해 ⑤항의 ‘정치회담’ 부분은 “만일 정치회담이 60일 이내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포로는 송환위로부터 유엔자체로 이관된다”고 인도에 요구 수정했다.

이 인도의 절충안은 12월1일 유엔총회에서 54대5로 압도적 지지로 가결되어 중공과 북한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53년 1월 주은래와 박헌영은 전면 거부하였다.


▶ 아이크 당선에 

미국 대통령이 바뀌었다.
 트루먼 민주당 정권에 이어 공화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1890~1969)가
제3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2년 11월 5일 경무대에서 미국의 대선투표 방송을 듣던 이승만 대통령은
30년 묵은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아 축하 메시지를 타닥타닥 찍어 내려갔다.

“한국정부와 본인을 비롯한 한국인민은 귀하가 대통령 선거에셔 획득한 위대한 승리를 축하합니다. 귀하의 당선은 한국인민 뿐만 아니라 공산침략에 대한 한국전쟁의 교착상태에 대해서 이에 염증과 우려를 느끼는 모든 지역의 자유인민에 대하여 커다란 용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세계지배를 위한 공산-민주 양진영간의 대규모 전쟁에 있어서 세계는 미국의 지도적 역할을 바라는 바이며, 귀하의 용기와 정치적 역량을 인식하는 미국인민은 그들의 신망을 귀하에게 위촉하고 귀하를 그 지도적 지위에 선출한 것입니다.

우리는 귀하를 충심으로 환영하고 또한 귀하가 한국에서 정당한 해결을 발견할 것을 믿고 있으므로 우리는 귀하가 언제라도 가능한 시간에 한국을 방문할 것을 초청하는 바입니다. 귀하의 위대한 성공과 미국에 평화와 번영이 있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승만은 아이크의 당선이 반가웠다. 하늘이 한국의 희망을 아주 버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아이크는 미국의 직업정치인이 아니고 맥아더와 여러모로 닮은 맥아더의 10년차
직계후배 장군 출신, 맥아더가 1차대전과 일본 격파의 영웅이라면 아이크는 2차대전 히틀러 격파의 영웅, 맥아더가 태평양과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이라면 아이크는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웅이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걸었던 통일의 꿈이 새로운 기회를 맞은 듯 싶었다.

더구나 아이크는 선거직전 10월24일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공화당 정부의 첫 과제는
”한국전쟁의 명예로운 조기 종결(an early and honorable end)“임을 제시하고
그 조기해결을 위해 ”당선되면 즉시 방한할 것“을 약속하여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에게
큰 표를 얻어 당선된 것. 과연 야전군사령관 출신의 전쟁 전문가는 다르다.
전선을 직접 시찰하고 ‘명예로운 해결책’을 내겠다는 현장주의, 한국인들은 마냥 설레이고 흥분에 떨었다. 한국이 지금까지 울부짖었던 ‘명예로운 해결책’이 다름 아닌 ‘남북통일 전쟁종결‘인데
실패한 맥아더 대신 아이크가 성공시켜 줄 가능성은 그가 대통령이므로 더욱 높아 보이지 않는가.




 ★ 이승만, 화려한 환영행사 준비...클라크 깜짝 놀라 만류

21일 클라크 사령관이 도쿄에서 날아와 아이크 방한 날짜를 알려주었다.
“각하만 아시고 공표하지 말아주십시오. 아이크 당선자의 특별요청입니다.”라고 당부했는데도
 이승만은 진헌식 내무장관을 불러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지시하였다.
 24일부터 주요도시마다 환영대회가 열리기 시작하여 휴전반대 시위로 변하고.
거리마다 요란한 플래카드와 각종 현수막에 태극기와 성조기 게양, 특히 서울에선 꽃전차들이
환영구호를 달고 거리를 누볐다.
이승만은 가능하면 국회연설도 시키고 싶어 미국대사관에 타진했다.

예상 못한 법석에 깜짝 놀란 클라크는 본국에 보고하고, 아이크의 신변 보호를 위해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말아달라고 이승만대통령에게 요청했다.
전국에 간첩들이 우글거리고 몇 십 마일 북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매일 벌어지는 판인지라 클라크는 이승만에게 “아이크 저격범들이 남파되었다”는 거짓정보를 내밀며 방한 날짜와 장소는 극비에 붙이기로 거듭 다짐받았다.
‘환영! 아이젠하워 元帥’ 신문들은 1면 전면을 아이크 환영기사로 대서특필하였고
“한국은 반공의 보루, 적극 북진작전만이 승리의 첩경‘등 한국인의 희망사항들을 가득 실어

아이크에게 전달하려 몸부림치는 모습이었다. 아이크 방한에 맞춰 워싱턴에 날아간 변영태 외무는 ”만주 폭격이 긴요“하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었다.


★ 이승만, 아이크 방한 앞두고 두 차례 편지 보내 할말 다해

이승만은 27일 대통령 당선자 아이크에게 긴 편지부터 썼다. 

“6.25전쟁은 군사적 승리에 의해서만 종결될 수 있다는 것, 일본을 다시 강력한 국가로 만들려는 미국의 정책은 나중에 후회할 잘못이라는 것”등 자신의 ‘두가지 투철한 신념(two deepest convictions)’을 특별히 강조한 이승만은 그래도 성에 안찼던지 사흘 후 30일에 또 편지를 보냈다. “만약 미국이 압록강까지 진격하기로 결정한다면 한국은 압록강 국경선을 엄수할 것”이며
국경선 너머로 단 한 발자국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동시에 ”미국이 이미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체결한 조약들과 유사한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이 미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과거의 군국주의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일본 때문에 막대한 고통을 당한 아시아 국가들과 피해보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일본이 자유민주주의로 완전한 개종conversion)을 하겠다는 의지를 증명해보여야 한다고
되풀이하였다. 요컨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당장 공산주의 방어뿐만 아니라 일본의 팽창주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장치라는 주장이다.

"지극히 간단한 전쟁 해결법은? 북진통일후 정전협정 끝!"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크의 서울도착 전날 내외기자단을 불러모아 다시 한번 아이크에게 보내는 요구사항을 되풀이 공표하였다. 문답요지는 다음과 같다.

문: 유엔에서 논의 중인 한국전쟁 휴전안에 대한 대책은?

“이것은 극히 단순한 문제인 것을 공산당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연히 어렵게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이 우리에게 무기가 없음을 알고 탱크와 대포로 내려왔을 때에 우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지 않았더라면 중국본토와 마찬가지로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소련의 노예가 되기 싫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용감분투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은 세계 각국이 우리를 칭찬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북으로 밀고 올라가라하면 이기든 지든 올라갈 것이며 또 우리가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유엔에서는 이렇게 되면 세계 대전이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하여 주저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어렵게 참고 있는 것 아닌가.

북한에는 그동안 3백만 동포가 남하하여 7백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3백만명이 살고있다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으며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러니 우리가 북진하여 이들을 구해내야 하겠다.

문: 곧 내한할 아이젠하워 원수에게 제의할 기본적 사항은 무어인가?

“그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자신이 실지로 보고서 어떠한 해결방법을 발견할 것인데 특히 군사적으로 판단할 것이다. 내가 알기에 현상태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며 무슨 작정을 하든지 1년반이나 끌고 온 판문점 휴전회담을 더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분이 물어보는 것이 있다면 사실대로 대답하여 우리 사정을 잘 알도록 할 것이다. 즉 남북통일에는 오로지 북진으로만 이루워져야 할 것이며 북진해도 3차대전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그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소련이 참전할 의사가 있다면 지난번 9.28 후에 우리가 북진했을 때 나왔을 것인데 소련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북진해도 압록강 이북은 할반작도 넘어서지 않을 것이므로 3차대전이 일어날 리가 없다. 

문: 유엔군이 철퇴한다면 국방력을 여하히 확립할 것인가.

“그동안 미국내 친일분자들이 일본을 무장시켜야 공산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고 선전해왔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한국군 2백만 무장을 시키면 공산주의에 능히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밴 플리트 장군도 이에 찬성하고 있어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일로 앞으로 우리 국군장교 3명이 유엔군 총사령부 참모로서 파견되었다. 이 일에는 언론계나 산업계가 협력하여 경제적으로 필요한 물자를 많이 생산하여야 한다.


아이크의 ‘무시’ 태도에 이승만 격노...경무대 불러 90분간 ‘환대’
아이크 일행을 태운 4발기 2대가 수원 공군기지에 12월2일 저녁8시 도착하였다. 

‘당선되면 한국전선에 가보겠다’는 대선공약을 지키기 위해 당선 한 달 내로 방한한 것이다.

공식 환영객은 없었다. 사전에 연락한 사람은 이승만 한사람뿐이고 이승만도 약속을 지켰다. 

수행원 브래들리 합참의장, 새 국방장관 내정자 윌슨과 함께 군용세단에 올라탄 아이크는 캄캄한 전쟁폐허 서울거리로 쏜살같이 달려와서 동숭동 전 서울대본부와 문리대 캠퍼스에 자리한 미8군사령부로 들어섰다. 클라크와 밴플리트의 환영과 보고를 받은 아이크는 간단한 저녁식사후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엔 당시 미3사단 작전국차장으로 복무하는 외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과 포옹하였다.

이승만은 아이크가 전선시찰에서 돌아온 오후 4시 25분 8군사령부를 방문, 환영인사를 나누었으며 아이크는 ‘시간관계로 환영행사에 참석 못한다’고 설명했다. 당면문제에 관한 대화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5일 아이크는 신설동 당시 경마장 임시비행장을 L-19경비행기로 출발하여 영연방 사단, 8055 야전병원, 미 2-3 사단, 프랑스군 대대, 그리고 한국군 1사단과 수도사단을 차례로 시찰하였다. 점심때 아이크는 12년전 자신이 대대장이던 미3사단 1대대 사병들과 식사를 나눈 뒤 한국군 수도사단을 찾아가 기다리던 이승만 대통령의 영접을 받았다.

송요찬 사단장의 브리핑에 이어 스탈린 고지 공격훈련을 이승만과 함께 참관하였다.
여기에서 이승만은 하얀 비단에 수놓은 큰 태극기를 선물로 주고나서 “귀하의 한국군 증강계획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 아이크가 선거 유세중에 이미 “한국군을 증강시켜 한국전쟁은 한국군이 맡도록 해야한다”고 여러차례 주장했던 것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방한 마지막날, 아이크가 겸무대로 이승만에게 이한인사를 하러 가느냐 안가느냐가 관심사였다. 한표욱 대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이크가 그대로 출국하려하자 이대통령이 미국측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므로 김포로 달리던 아이크가 차를 돌려 경무대로 갔다고 전한다.
아이크를 밀착 수행한 클라크 사령관은 자기가 경무대로 미리 찾아가 아이크의 겸우대 방문 사실을 알려주니까 화가 잔뜩 났던 이승만이 금방 표정을 풀며 좋아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또 한사람 이승만의 오랜 정치외교 보좌관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당시 상황을
자기 저서(‘이승만의 대미투쟁’)에 길게 설명해놓고 있다.

“아이크가 당선되자 이승만은 미국의 휴전정책 변경을 설득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로 생각했다. 아이크에게 주려고 준비한 ‘정책방침서’(position paper)는 공산군을 지금 북한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세계자유평화를 가장 빠르고 효과있게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신념을 설득력 있고 정성스럽게 작성한 브리핑 서류였다....(중략)....서울에 온 아이크는 서둘러 이승만과 만났으나 아무런 논의 없이 금방 헤어졌다. 그는 낮에는 미군부대들을 사열하고
밤에는 브리지와 포커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 오후2시 김포공항 출발 예정의 아이크는 다시 대통령을 만날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메시시를 경무대에 보내왔다. 이승만은 경악했다. 그리고 격노했다. 그는 국무회의를 소집해놓고 아이크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만약 장군이 오지 않는다면 부득이 그 사실을 언론에 공개할 수밖에 없노라”는 격한 메시지를 아이크에게 보냈다.

오후2시30분 아이크의 차가 경무대 현관에 들어와 멈추었다.
이승만과 인사를 나눈 아이크는 국무회의실로 들어와서 입을 꽉 다문채 90분동안 이승만과 각료들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 간단한 인사만 하고 떠나버렸다. 그는 의중에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뱉지 않았다...(후략)“

어느 경우이든 ‘대통령 당선자로서 미국국민에게 약속한 ’한국방문 공약‘을 지키려고 한국전쟁 현장을 찾아왔던 아이크는 그것이 어디까지나 ’조속한 휴전‘을 모색하는 전선방문이므로 휴전 반대자인 이승만을 의도적으로라도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나리오에 집중했다고 봐야겠다.

아이크를 보자 경무대 현관까지 나온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반갑게 껴안았다고 한다.

어쩌면 이승만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새 미국대통령과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심동체’같이
포옹한 장면을 상징적으로 세계에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크를 안으로 안내한 이승만은 “내 각료들을 소개하고 싶다”며 방안 가득찬 장관들을 인사
시켰다. 홍일점 박현숙 무임소 장관은 아이크 가슴에 꽃을 달아주었고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이승만의 유창한 영어 설명과 각료들의 응원발언이 계속되었다.

클라크는 이렇게 써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새지도자 아이크가 취임하기도 전에 자신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멋지게 기록에 남기려 연출했음이 틀림없다. 아이크가 방을 빠져나갔지만 화려한 잔치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3군의장대와 밴드, 불빛이 휘황한 정원과 경무대 행사는 마치 할리우드의 영화개봉 전야제 같았다.”


아이크, “승리를 위해 한국에 적극적인 원조” 약속
한편 5일 오전 10시 8군사령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이크는 이번 여행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발표하였다.(조선일보 12월8일자)

1) 이승만 대통령은 어느모로 보나 과연 위대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았다.

2) 한국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한국에 더욱 적극적인 원조를 하겠다.

3) 자유진영의 결속이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전전에서 싸우고 있는 유엔군의 전투모습을 보고
확실히 인식하였다. 4) 유엔군이 고난을 무릅쓰고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우리의 공동목표를 위한 것이다. 

전선시찰에 앞서 150여명 내외기자들에게 13분간 연설한 아이크는 질문은 일체 받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이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全文>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각하.

본인은 한국을 방문하고 특히 각하와 친히 만날 기회를 가진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각하도 아시다시피 본인이 한국에 오게 된 목적은 전체적인 정세에 관한 정보를 현지에서
수집하고 일선 군사령관들과 만나며 또한 공산침략자에 대한 이 투쟁에서 힘을 나누고 있는
여러나라 군대들과 만나 이야기하려 한 것입니다.

한국의 군대 및 국민이 제공하고 있는 위대한 공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을 본인은
특히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본인이 시찰한 한국군으로부터 본인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군인들이며 실로 용감한 병사들입니다. 그들의 국가적인 긍지, 철저한 충성심,
그리고 공동의 적에게 싸움을 계속하려는 결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 2년반동안 귀국이 바친 커다란 희생은 전세계에 널리 주지되어있습니다.

자유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도록 귀국민을 결속시킨 각하의 공훈을 역사는 마땅히
크게 평가하리라고 믿는 바입니다. 각하는 이 위업을 심히 곤란한 정세하에서 성취하였으며

실로 최고도의 지도자 아니고서는 견디지 못할 환경을 극복하신 것이었습니다.

각하의 서한을 받았는데 본인은 그 내용을 상세히 검토 고려하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본인은 각하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최대의 경의를 올리는 동시에 귀국이 평화와 안전이란 공동목적을 추구하는 자유제국과 긴밀히 협동하여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입니다. 

개인적으로 각하께서 한국 국기를 본인에게 증정하여주신 것 특히 감사하며, 본인의 처에게 보내주신 각하의 부인의 선물을 본인이 충심으로 감사한다는 것을 전해주십시오. 이처럼 우리를 생각해주신 것에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각하와 용감한 귀국민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12월5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아이크의 편지를 이승만은 왜 언론에 공개하였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새로 등장한 미국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과 궁금증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북한 수복 통일' 목표에 승복시켜야 할 새로운 '결투 상대' 아이크가 뱉은
짧은 한마디 "승리를 위해 한국을 적극원조 하겠다"는 약속을 국민과 세계와 공유하고자 함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동상이몽의 '상견례'는 끝났다.
역전노장 아이크를 무슨 수로 설득해야 하나. 한미 두 지도자는 서로가 벅차기만 하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아이크는 태평양 상공에서 미국민을 향한 성명을 발표한다.

"대선 공약대로 트루먼 정부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조속히 명예로운 휴전을 매듭짓겠다."

아이크는 뒷날 회고록에 이때의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이승만은 과연 노련한 정치가 답게 다루기 어려운 인물임이 분명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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