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의 이 나라를 상상하다

  •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개똥철학’··· “대수롭지 아니한 생각을 철학인 듯 내세우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

    이 글도 그 ‘철학’에 기초한 넋두리쯤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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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에서 ‘장미 대선(大選)’이 끝난 후부터 달콤하고 쌉쌀하면서도 아련한 어린 시절의 짝사랑을 연상케 하는 최대의 화두(話頭)가 바로 ‘적폐청산’(積弊淸算)이란다. 물론 인구(人口)에 널리회자(膾炙)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이 나라의 역정을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명쾌하게 정의(定義)하신 그 ‘변호인’의 역대급 명언이 가장 큰 배경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기회주의‘(機會主義)가 켜켜로 쌓여 이른바 ‘적폐’(積弊)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反)기회주의야말로 ‘적폐청산’의 요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 레닌(Lenin)이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에서 일탈한 여러 정파의 견해를 비판하는데 ‘기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유(類)의 심오한 사실(史實)들은 항문이 짧은 필자는 잘 모른다.

    그저 인터넷 사전에 나오는 뜻을 그대로 옮기면, “일관된 입장을 지니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경향”이라고 되어 있다.

    더불어서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한다.

    그 속에는 ‘올곧다’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들었다.

    ‘기회주의’를 논하면서, 사전에 명시된 ‘일관된 입장’이란 대체로 이 땅과 이 나라와 이 사회에 과거로부터 계속돼 온 운명이나 숙명, 또는 섭리와 순리와 전통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너무 나간 걸까. ‘개똥철학’이니 그쯤이라고 해 두자.

    따라서 ‘기회주의’란 그때그때의 정세, 즉 시류에 따라 숙명과 운명을 거부·극복했다던가, 섭리와 순리와 전통을 거스르는 일들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 이 나라에서 가장 원초적인 ‘적폐’는 이 나라 건국 아니겠는가. 대륙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지정학적 ‘숙명’을 거부하고, 동서 냉전(冷戰)의 시류에 편승하여 해양세력과 손을 잡았다. 나중에는 그 세력의 대표선수인 양키나라와 군사동맹까지 맺게 된다.

    건국을 주도한 노인네는 자신이 양반의 후손이라는 근본을 잊은 채 대륙의 공·맹자님을 비롯한 성현(聖賢)들과 숱한 군주들이 주창·실천한 봉건의 질서를 개무시하고, 그 양반네들이 천박하게 여기던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 거사(擧事)야말로 ‘기회주의’의 진수(眞髓)라고 할 만하다.

    이에 반해, 북녘에서는 일관되게 수 천 년 계속된 봉건의 질서를 더욱 공고히 했다. 대륙의 모범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말이다.

    아마 이 나라 ‘건국의 날’이 잘못 됐다고 아우성하는 이유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이지 싶다.

    그 이후에 이 나라에서는 잠시 ‘정의’가 반짝했다. 그 ‘정의’의 본질이야 올곧은 부패와 무능이었다. 그리고는 이에 반발로 또 다시 ‘기회주의가 득세’한다.

    당시 이 나라 ‘양반의 후예’들이나 이른바 ‘지식인’들 눈에는 ‘무식(無識)·무도(無道)’하게 비친 ‘근본 없는 군바리’가 나서서 그 무슨 혁명이란 걸 저질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개똥철학의 관점에서는 ‘일관된 입장’을 뒤집어엎으면 그게 바로 ‘기회주의’고 ‘적폐’가 된다. 혁명은 그 완결판이다.

    그러하니 ‘건국 혁명’이 그렇고 ‘오 쩜 일육 혁명’도 ‘적폐’일 뿐이다. 그러면 ‘촛불 혁명’도? 무슨 소리? 그야 기본이 틀린다. ‘적폐’가 될 수 없다. 왜냐고? “그건 내가, 우리가 했으니까!”

    ‘적폐’를 규정하는 모든 기준이 이 평범한 진리(?)에 입각한다는 건 이미 이 나라 국민들이 다 알고 있다.

  • 그런데 그 ‘근본 없는 군바리’가 5천년을 쭉 이어온 가난을 떨치겠다고 나섰다. 이로써 ‘기회주의’의 연속극이 십 수 년 간 펼쳐진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과 신분이 아직도 뚜렷한 이 땅에서 난데없이 공돌이와 장사꾼이 행세할 수 있게끔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라니 어이가 상실됐다. 

    더군다나 반만년을 이어 내려온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갑자기 새벽종을 울려 대서 온 동네가 시끄럽게 됐다. 나지막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다정스레 모여 있건만 그 마을에 ‘새’자를 붙였다? 이거야 말로 발칙한 ‘기회주의’다.

    거기다가 원시미(原始美)가 가득한 ‘금수강산’ 곳곳에 아스콘과 시멘트를 처바르면서, 한줌도 안 되는 부자들이 자가용을 타고 유람 다니기 편하라고 ‘고속도로’라는 걸 만들었다. 이것 역시 청산되어야 할 ‘적폐’가 아닌가. 갈아엎어야 마땅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또 그 이후 어찌어찌 하여 드디어 “기회주의가 패배하고 ‘정의’가 득세한 역사”가 나타났다. 그 10년 동안 ‘적폐’는 전혀 없었고, ‘완벽한 정의’만이 이 나라에 넘쳐났다고들 한다. 오늘에 와서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열정이 “적폐청산”의 메아리를 만들었다.

  • 10년이 지나자 시류에 편승한 기회주의, 즉 ‘적폐’는 다시 이어진다. 이번에는 ‘노가다 십장’이 나서서 그 출신에 걸 맞는 ‘적폐’를 쌓았다. ‘중도실용’(重盜失勇)이라는 멋진 구호와 함께...

    몇 십 년 동안 이 나라를 상징해 온 서울 한 복판 판잣집의 전통과 구릿한 하수구 냄새가 서려있는 개천을 뒤엎어 버렸다. 그것도 이른바 ‘대권’(大權)을 노리고... 이야말로 기회주의의 정상급이다.

    그리고는 그것 덕에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면서, 저절로 잘 흐르는 강물에도 손을 댔다. 장마나 태풍의 철에 비가 많이 내려서 강물이 넘치는 건 자연의 ‘섭리’ 아닌가. 이 ‘섭리’를 막아야겠다고 나섰다. 강가와 강물 중간에다가 둑을 쌓질 않나, 물길을 마구 파헤치질 않나.

    그 개천을 전통과 냄새로 복원하는 일과 여러 강들의 둑을 허물고 물길에다가 다시 모래를 붓는 일이 ‘적폐청산’의 성(聖)스런 과제가 되어버렸다. 늦기 전에 해야 한다. 내년 봄 그 무슨 ‘가뭄’ 타령이 나오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11월 ‘물이라 불린 사나이’께서 “대한민국 어디에도 어떤 형태로든 핵무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한 ‘대도무문’(大盜無門)께서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며 양키군대가 북녘의 핵 시설을 타격하겠다는 걸
    분연히 막았다.

    그 이후에 ‘완벽한 정의’를 실현하신 ‘슨상님’과 ‘변호인’께서는 북녘의 핵무기 개발·완비를 일관되게 옹호·지원·변호해 주셨다. 물론 ‘노가다 십장’께서도 천안함의 아픔을 겪고, 연평도에 대포알이 떨어지는 와중에 북녘의 세습독재자를 만나보려고 애를 무진 썼다. 그런데...

  • ‘기회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일관되게 북녘 바라기만을 하셨던 대북(對北) ‘정의파’들에 이은, ‘근본 없는 군바리’의 따님께서는 마침내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북녘은 계속 남녘의 뺨을 갈기고 남녘은 더 때리라고 계속 다른 뺨을 내미는 것을 상호 이해·수용해 온’ 남북관계의 일관된 ‘원칙’과 ‘전통’과 ‘순리’를 어기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라는 시류에 영합하고 만 것이다.

    북녘에서 그까짓 핵 실험 몇 차례 했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개성공단 폐쇄’라는 돌아오기 힘든 ‘적폐’에 다다르고 말았다.

    작금의 ‘적폐청산’은 이렇듯 ‘기회주의’로 점철된 이 나라 역사의 결과물들을 바로 잡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들 한다. 결코 ‘정치보복’이 아니라는 소리가 높다고. 이런 가운데에서도...

    이 나라에서 기회주의와는 무관하게 숙명·운명과 전통으로 꾸준히 이어 내려온, 그리고 현재도 이 나라를 버티는 큰 저력(底力)이 되고 있는 올곧은 ‘정의’가 있다. ‘적폐’의 여지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외적(外敵)이 이 나라를 넘봐도, 때로는 실제로 침략을 하고 있음에도 기회주의를 배제한다. 백성 또는 국민들의 삶이 팍팍하고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극에 달해도 초연하다. 오로지 ‘일관된 입장’만을 고수 할 뿐, 달라진 게 없다. 기회주의가 발 디딜 틈이 없다.

    이 땅에서 ‘정치’ 하신다는 양반네들은 자신의 입신과 인기와 권력만을 위해 수미일관(首尾一貫) 물고 뜯으며 치열하게 다퉈왔다.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백성과 국민을 위하여”를 짖어대면서...

    드디어 ‘적폐청산’의 그 거대한 막이 올랐고, 본 무대가 펼쳐질 모냥이다. 앞으로 ‘기회주의’가 일소되어, 일관되고 시퍼렇게 물든 올곧은 ‘정의’만이 덩그렇게 남을 이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자. 상상·예측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다.

    “대한민국 만세(漫世)! 말세(末世)!! 만말세(漫末世)!!!”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