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대중이 뭐가 뭔지를 잘 모른다. 겉에 드러난 현상보다 그 뒤의 진짜 의도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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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을 사유물로 끌어가지 말라

‘촛불혁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선 주관적 취향의 표현이다. 

필자는 ‘촛불시위’ ‘촛불집회’라고 부르려 한다. ‘혁명’이라고 해서 높이 부르는 것도 아니고 ‘시위’나 ‘집회’라고 해서 낮추 부르는 것도 아니다.

촛불시위는 초기일수록 다양하고 복합적 요소들이 합류한 현상이었지, 어느 한 요소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의 공통점은 물론 있었다. 국정농단이란 현상으로 상처받은 국민적 자존심이 폭발한 점이 그것이다. 이 폭발에 참여한 시위자 중에는 ’보수‘라 할 만한 시민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시위는 그런 다양성, 복합성으로부터 동질성 쪽으로 이행했다.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주관(主管) 단체들과 조직군중의 입김이 시위를 주도하는 양상이 짙어졌다. 이에 영합한 미디어들이 시위현장을 선동적으로 실황중계 해주고, 집회참가자 수를 제멋대로 부풀려 주었다.
이 작위적 쓰나미 과정에서 시위가 보편적 성격에서 점차 특정한 성격으로 옮아갔다.

오늘의 시점에선 특정세력이 ‘촛불’을 마치 자기들만의 것인 양 끌어가 버렸다. 이 점은 촛불 청구서' 운운 하며 "우리가 촛불혁명 주동자이니 우리 요구대로 하라"고 강박하는 그룹들이 있는 것만 봐도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일이다. 후기로 갈수록 '촛불'은 이른바 '진보' 쪽의 당파성 짙은 행사로 바뀌었다는 방증이다. 

앞으로 개헌을 하면 ‘촛불혁명’을 헌법전문에 못 박을 기세다. 그 ‘혁명’과 ‘운동’과 ‘항쟁’ 시리즈에서 배제시킨 흐름은 일괄 ‘적폐’로 규정될 모양이다. 이러다간 ‘모든 다양한 흐름들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대한민국’에서 ‘특정한 흐름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대한민국‘으로 국체(國體)가 변경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를 뗀, 그 어떤 비(非)자유주의적-전체주의적 민주주의라도 의도되고 있는 것일까? 말은 그럴 듯하다.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숙의(熟議)민주주의...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를 절단시키면 그것은 어떤 허울 좋은 이름을 갖다 붙인다 해도
결국은 중우(衆愚)정치의 소용돌이를 뒤에서 교묘히 조종하는 특정 기획자들의 전체주의로 접어드는 길목이 될 수 있다.

이와 병행해서 최근엔 문재인 정부의 표면적인 입장보다 훨씬 더 센 분파들이 거리에 진출하고 있다. 혁명은 가면 갈수록 더 급진-과격한 쪽으로 핵분열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급기야는 로베스피엘 일당의 자코뱅 당이 진출해 공포정치를 했다. 루이 왕과 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보내고 심지어는 같은 자코뱅 당 리더인 마라와 당통도 처형했다. 혁명이 또 다른 억압권력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우리의 촛불 이후에도 동맹국 국가원수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국방문 일정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반미시위를 하겠다는 극단분파가 출현했다. 핵-미사일을 손에 든 김정은의 '남조선 혁명‘을 규탄해야 하나, 그것을 막기 위한 한-미 동맹의 한 축(軸)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규탄해야 하나? 각자가 이 질문에 답해 자신의 입장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동맹국 미국 아닌 김정은을 규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앞으로 목숨 건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 자신과 그 자손을 살리고 싶다면 말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똑똑히 봐야 한다. 많은 대중이 뭐가 뭔지를 잘 모른다. 겉에 드러난 현상보다 그 뒤의 진짜 의도를 읽어야 한다. 심상치 않다. 어영부영 하다간 어어 하는 사이 종(鐘) 치게 생겼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2017/10/29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