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만든 李承晩과 드골의 문장력

    -두 번 나라를 구한 두 사람의 지도력은 말과 글이었다.
    이승만의 英語실력에 미국 외교관이 감탄하였다.

    '李承晩은 프랑스의 이익만 생각한 드골보다 西歐의 공산화를 저지하고자 한 아데나워에 더 가깝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더 충실하였고 더 많은 나라들에 더 좋은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은 드골보다 더 위대하였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들은 그런 이승만을 김일성보다 더 미워하고 있다.' 

  •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고차원의 시각에서 세계정세를 이해한 사람  

    계급史觀(사관)으로 써진 좌편향 역사 교과서는 李承晩(이승만)을 主敵(주적)으로 삼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비방을 쏟아내지만 서점에 가면 이승만 연구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과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이 펴낸 '이승만 영문 일기'는 이승만의 고급 영어 실력과 여행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孫世一(손세일) 선생이 70代의 10년을 바쳐서 쓴 라이프워크 '이승만과 김구'(全7권, 조선뉴스프레스)는 양과 질에서 학술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정치傳記(전기)이다. 이 책에서 著者(저자)는 李承晩(이승만)을 <일생 동안 말과 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으로 정리하였다. 말과 글은 知性(지성)의 표현이다. 초대 駐韓(주한)미국 대사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하면서 한국전에 관여하였던 무초는 퇴임후 육성 증언에서 이승만의 약점을 지적하면서도 외교관으로선 최고의 찬사를 덧붙였다.

    '李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한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고 이것이 그의 정치적 강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감정적으로 되면 그는 독립투사 시절의 본능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에 집착했습니다. 의심이 많았습니다.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 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글과 말 무엇이든지 유창했습니다. 자신이 '제퍼슨식 민주주의자'임을 자랑했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국인 부인(注: 프란체스카 여사)이 그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갖추고,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미국 사람들까지 놀라게 만드는 고급 영어로써 신생 국가의 생존과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이런 이승만의 큰 그릇을 알아준 사람들은 닉슨 같은 대전략가, 클라크 같은 유명한 장군, 그리고 시아누크 같은 권모술수의 大家(대가)이다.

    시아누크, '이승만은 우리와는 급이 다른 지도자'

    국가인권위원장 시절에 안경환 서울대 교수는,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2012년에 사망)을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시아누크 왕은 89세로 별세할 때까지 격동하는 인도지나 역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이다. 크메르 루즈 집권 이후 10여 년간 북경과 평양을 오가면서 망명생활도 하였다. 특히 김일성과 친밀하였다.

    그런 그가 한국인 학자 앞에서 李承晩(이승만)을 극찬하더라고 한다. 그가 전해준 시아누크의 평은 이러하였다.

    '李承晩(이승만)은 戰後(전후) 신생국가의 지도자 중 급이 다른 이였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무장투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는데, 이승만은 외교를 통하여, 즉 세계정세의 흐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세웠습니다. 수가 많고 수준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에 아시아를 대표하는 반공 지도자였습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하여 이뤄졌지만 그 전에 李承晩 대통령이 월남파병을 위한 공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이 득세하자 인도네시아 정부에 파병을 제의한 적도 있습니다(수카르노 대통령 시절인 듯).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승만 덕분입니다.'

    안 교수는 김일성과 친하였던 시아누크의 이승만 칭찬에 놀랐다고 한다. 귀국하여 자료를 찾아보고는, 이승만이 월남 파병을 위한 탐색을 한 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시아누크 왕은 냉전 시절에 서양과 공산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약소국인 캄보디아의 國益(국익)을 지키기 위하여 현란한 외교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사람이 이승만을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高手(고수)의 지도자였다'고 평한 셈이다. 시아누크의 말대로 국제 외교적 감각을 중심으로 놓은 독립과 건국이야말로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는 최고의 정치이다(한국에선 무장독립투쟁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승만의 高段手(고단수) 외교술을 알아본 이로는 미국의 대전략가 닉슨이 있다. 부통령 시절 李 대통령을 만났던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할 때는 늘 우리가 뭘 할지 모른다는 불예측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현명한 노인의 충고를 오래 기억하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한 유엔군 사령관은 마크 W. 클라크 대장이었다. 그는 轉役(전역)한 뒤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라는 회고록을 썼다. 클라크 장군은 자신이 상대하였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하여 생생한 체험기를 남겼다. 유엔군,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고집스럽게 國益(국익)을 추구하는 老투사의 모습을, 존경심을 깔고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휴전을 반대하는 李 대통령 때문에 수많은 곤욕을 치렀지만 記述(기술)은 결코 적대적이지 않다. 李 대통령의 애국심과 교양, 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사람처럼 썼다.

    <한국전을 통하여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개석, 네루와 버금 가는 位相(위상)을 확보하였다. 그는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非공산국가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뿐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人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이승만은 극동 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한국의 동맹국인,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평판과 자존심으로 해서 그는 다른 아시아 정부를 상대할 때도 頂上級(정상급)보다 낮은 직급자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70代에 역사를 바꾼 다섯 지도자


    손세일 선생의 '이승만과 김구'는 기독교적 신앙을 공유한 두 독립 반공 지도자가 평생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건국 직전에 갈라지는 과정을 大河(대하)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끌고 나간 뒤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과 김구는 이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창건한 대표적인 두 정치지도자이다. 그런 뜻에서 한 나라에 國父(국부)가 한 사람뿐이며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승만이라면서 자신이 국부로 불리기를 단호히 거부한 김구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대한민국의 두 국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김구와 비교하는 시각과 함께 20세기의 다른 지도자와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국가로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고(구매력 기준)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뿐이다.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의 성공은 이승만이란 '기적적 존재'에 대한 정확한 평가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승만은 20세기의 지도자들 중 조국을 두 번 구한 세 명 중 한 분이다. 다른 두 사람은 프랑스의 드골과 터키의 케말 파샤(아타 투르크)이다. 이승만은 70代에 집권, 세계사를 바꾼 다섯 지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1. 윈스턴 처칠: 1874년 출생,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66세에 戰時(전시) 총리가 되어 영국을 승리로 이끈 뒤 71세에 물러났다가 77세에 복귀, 81세까지 在任(재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자유민주주의자로서 소련을 견제하였고, '철의 장막'이란 말을 만들었다. 1965년에 91세로 사망하였다. 2차 대전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 李承晩: 1875년에 출생, 해외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70세에 귀국,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을 물리치고 건국을 주도하였다. 73세에 대통령이 된 후 12년간 재임하였다. 이 기간 반공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였고, 韓國戰(한국전)을 지도, 자유진영과 조국을 지켜냈다. 建國(건국)과 護國(호국)의 지도자로서 두 번 나라를 살린 사람이다. 1965년 90세에 하와이에서 사망.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 등 여러 권의 책이 있다.

    3. 콘라드 아데나워: 1876년 출생으로 젊은 시절 쾰른 시장을 지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상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나치 독일의 탄압을 받았다. 독일 패전 후 政界(정계)에 복귀, 기독교 민주당을 만들고, 73세이던 1949년부터 87세이던 1963년까지 서독 총리를 지냈다. 1967년에 91세로 사망하였다. 그는 나치의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전이 발발하자 서독을 재무장시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 西유럽의 일원으로서 소련과 대결하도록 하였다. 서독과 서구를 이간질시키려 한 스탈린의 중립화 통일 제의를 거부하였다. 개혁적 천주교 신앙에 뿌리를 둔 그의 반공적 자유민주 노선은 콜 총리 시절에 통일로 결실되었으며 지금도 독일 정치의 主流이다.


    4. 샤를 드골: 1890년에 출생, 1차 대전 때 베르당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 군의 이론가로 유명하였다. 기갑전술에 대한 책을 썼는데 독일군이 참고하였다. 국방차관일 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 자유 프랑스 군을 창설, 패전국을 戰勝國(전승국)으로 바꾸는 逆轉(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잠시 은퇴하였다가 1958년 알제리 독립 문제로 나라가 內戰(내전) 직전으로 몰리자 국민에 의하여 다시 불려나와 개헌을 한 뒤 대통령이 되었다. 69세에서 79세까지 대통령으로 재직, 프랑스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과학 기술 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독자적인 핵전략을 추구하였으며 美蘇와 거리를 두면서 독림적 노선을 걸었다. 철저한 反共공화주의자로서 두 번 나라를 구하였다.

    5. 로널드 레이건: 1911년에 태어난 레이건은 70세에 대통령이 되어 78세에 물러날 때까지 對蘇(대소) 강경정책으로 공산진영의 붕괴를 유도하였다. 기독교적 반공자유 투사로서 '죄를 미워하라.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라'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93세이던 2004년에 사망하였다.

    처칠, 이승만, 아데나워는 한 살씩 차이가 난다. 세 사람은 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이 팽창정책을 쓸 때 이를 저지, 자유진영을 지켜낸 3大 인물이다. 70대에 정치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면서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이 다섯 명의 공통점이 있다.

    1. 기독교에 바탕을 둔 신념의 반공자유 투사였다.

    2. 건강이 출중하였다.

    3. 드골을 뺀 네 명은 90 이상 장수하였다.

    4. 패배를 딛고 頂上(정상)에 도달하였다.

    5. 처칠, 드골, 이승만은 大문장가였다.

     
    敵으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

    손세일 선생의 大作에는 이승만이, 친구이자 홍보 자문자였던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 했다는 말이 소개되어 있다. 외국에 대하여 너무 강경한 말을 하지 말라는 충고에 李 대통령은 '나도 알아요. 그러나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이승만의 선동은 그러나 외교적 설득, 압박이며, 공산당의 선동에 대한 반격이기도 하였다. 인류역사상 가장 정교한 선동술을 발전시킨 '증오의 과학' 공산주의의 선동을 이승만의 선동이 無力化(무력화)시켰기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하였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올리버가 쓴 책 '李承晩'(SYNGMAN RHEE-The Man Behind The Myth. 번역 徐廷洛, 단석연구원)의 마지막 장은 인물평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걸출하였던 위대한 인물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일 것이다. 위대한 정치가가 반드시 강대국에서만 배출되는 것은 아니다. 약소민족중에서도 얼마든지 큰 인물이 나올 수 있다. 이승만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조직력과 지도력, 그리고 예언자의 비전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올리버는 李承晩의 한 宿命(숙명)은 비난을 받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만큼 誤解(오해)와 비방을 많이 받은 지도자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가끔씩 골칫덩어리로 무시되었다.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지만 그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거듭 비난 받았지만 그의 정책과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거듭 증명되었다. 그의 주장은 옆으로 밀려버리기가 일쑤였지만 그가 예견한 사건의 논리는 곧 바로 그를 세계적 문제의 한 가운데로 돌려놓곤 하였다.>

    올리버는 이승만을 이렇게 규정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자, 아시아 민주주의 확산의 촉매자, 미국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인이 수호해온 '도덕적 가치 기준'을 극동지역에서 지켜낸 사람.>

    올리버는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승만은 그의 친구들보다는 그를 비판해온 이들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라고 썼다. 이승만은 초인적 힘을 지녔다고 평가되기도, 모순덩어리라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올리버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모순투성이였다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하다가 때로는 '미국을 좌지우지 한다'느니 '미국을 끌어들였다'고 욕하였다. 이승만처럼 國內外(국내외)로, 公私間(공사간)에 욕을 많이 먹은 이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두 미국 대통령, 두 영국 수상, 두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호주 인도 캐나다의 장관급 인사들로부터 우방국 元首(원수)에게 보내는 편지로서는 너무나 날카로운 비판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열렬한 지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는 격렬한 비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헌신적이고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이승만을 욕하는 이들도 그가 초인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특히 國政(국정)의 세부사항까지 파악하고 챙기는 데 놀랄 따름이었다.

     겸손한 권력자

    올리버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의 수준을 이렇게 비꼬았다.

    <신문과 잡지들은 그를 논할 때 '미 군정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았다'면서 한편으론 '남한에서 美 군정이 실패한 이유는 그의 비협조와 反美(반미)주의 때문이다'고 했다. 그를 '반동분자'라고 욕하다가 갑자기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地主(지주)와 자본가를 결속시킨다고 욕하다가 갑자기 일반 대중을 선동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방했다. 그가 테러집단의 독재자처럼 반대파를 용인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이들은 이승만이 국회, 언론,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정치인과 사업가들의 줄기찬 반발에 직면하였던 점은 어떻게 이해할까. 그는 충성분자들만 관직에 임명하였다고 비판 받았지만 사실은 각료들과 계속 마찰을 빚었다.>

    올리버 박사는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비방에 대하여 그를 잘 아는 유명 인사들이 변호를 해주었으므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했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진면목은 자신의 신념이 세계의 여론이나 최강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인물>이란 점이라고 했다. 그는 인기에 영합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것조차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옳은 방향이라고 마음을 정하면 자신과도 타협하지 않고 비판 여론은 아예 무시하였다.

    <그는 역사의 길이라고 믿으면 주저없이 나섰고, 뒤 늦게 좇아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한 정치적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인물이다.>

    올리버는 이승만이 위대한 업적과 달리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겸손하고 소박한 어른이었다고 평하였다.

    <술, 담배는 하지 않았지만 수도승처럼 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좋은 음식과 독서, 그리고 담소를 즐겼고, 애완견을 사랑하였고 낚시 정원가꾸기, 그리고 서예도 즐겼다.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고 국민과 역사가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이승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주의 종'이었다. 부인과 함께 하는 아침 식탁에서 성경 한 두 장을 낭독하는 것이 日課(일과)였다고 한다. 기도는 그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고 신앙을 재확인하는 자극제였다.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리 거센 비판을 받아도 기도로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들면 최후의 승리를 믿었다.

    올리버는 이 책 마지막 문단에서 이승만의 역사적 역할을 요약하였다.

    <그는 22세에 총리가 된 영국의 윌리엄 피트처럼 단 번에 명성을 얻지 않았고, 히틀러처럼 대중선동으로 권력을 잡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루즈벨트나 처칠처럼 정치적 계단을 끈기 있게 밟아 頂上(정상)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는 동서양의 최고 교육을 자신의 것으로 鎔解(용해)하였다. 그는 위대한 理想(이상)의 추구에 헌신하였고, 때가 이르자 한국인들의 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위기의 시간과 장소에서 全세계 자유민들의 요구에 부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天下名文

    미국 외교관은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외교관 무초가 격찬한 이승만의 영어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1950년 7월19일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수도 대구에서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때는 대전이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기습을 받은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미군도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던 절망적 시기에 그는 벌써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李 대통령이 직접 英文(영문)으로 쓴 것이다. 고매한 영혼이 담긴 품격 있는 名文일 뿐 아니라 전쟁의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문서이다. 全文을 번역하였다.

    <친애하는 대통령께: 절망적인 위기를 맞은 한국에 신속하고 지속적인 원조를 제공해주시는 각하에게, 본인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와 모든 국민들은 깊은 감사의 뜻을 무슨 말로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大義(대의), 즉 자유의 大義를 위한, 국제연합을 통한 자유 우방의 많은 지원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각하의 용감한 영도력이 이 난처한 위기를 당하여 발휘되지 않았던들 그러한 지지도, 원조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의 戰死傷者(전사상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고 받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故國(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곳에 와서 자유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비극적 사실입니다. 우리 군대는 우리의 국토 안에서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까 우리 군의 사상자 보고를 받는 것이 아무리 참혹하다고 해도 貴國(귀국)의 희생자보다는 그나마 낫습니다.

    이곳 한국 땅에서 죽고 다친 미국 병사들의 모든 부모, 妻子(처자), 형제 자매들에게 부족하나마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弱者(약자)를 지켜주려고 이 땅에 와서 잔인한 침략자들을 상대로 해방과 자유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생명을 내걸고 싸우고 피흘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위대한 貴國(귀국)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각하도 아시다시피 한국인들은 그 누구도 참여하지 않은, '38도선에 관한 1945년의 군사 결정'의 결과로 자신들의 의사에 反하여 분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분단은 북한에서 소련의 지령과 통제 아래 한국인의 전통이나 정서와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이 북한 지역에서 군사, 경찰, 재정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장악한 공산 분자들은 소련의 지령 하에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대다수 국제연합 회원 국가들에 대하여도 처참한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소련의 후원을 받은 북한 정권이 6월25일 새벽, 한국군을 일제히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38선을 자유 대한과 노예 북한 사이의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렸습니다.

    원상(status quo ante)회복을 시도함으로써 敵이 戰列(전열)을 가다듬어 또 다시 공격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가슴 속에 심어서 키워온 제국주의적 침략의 惡性(악성) 암세포들을 이번 기회에 영원히 도려내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외부 세력이 훈련시키고 조종하는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은 그들의 조국에 충성합니다. 이 전쟁은 南과 北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半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입니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이제 한반도를 통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강력한 우방들이 치르는 막대한 희생을 딛고 통일도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언어도단입니다.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셨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이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을 각하께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나 승인없이 한국에 관하여 장차 他國(타국)이나 국가 그룹에서 결정하는 어떠한 협정이나 양해 사항도 이를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최근에 발표하신 성명서를 통하여 이것이 또한, 미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믿습니다. 본인은 매일 기도합니다. 韓美軍(한미군)의 승리를 위하여, 날씨가 맑아져 미 공군 전투기가 敵을 발견하고 파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최대한 빨리 도착하여 공세로 전환, 강고한 敵軍(적군)의 진영을 돌파, 승리의 北進(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본인은 우리의 大義(대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당성(right)과 강력함(might)이 우리 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 영원히 계속될 親愛(친애)의 마음을 담아서 편지를 보냅니다. 이승만.>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

    이 편지는 한 시대의 문제를 요약한 역사 자료이다. 감동적이고, 예언적이며, 또한 문학적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쓴 글이란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1.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이란 단어는 당시 사전에도 없는 것이었다. 공산당과 나치는 똑 같은 악당이란 뜻이다. '1984'의 著者(저자) 조지 오웰은 스페인 內戰(내전)에 참여한 경험에서 공산주의와 파쇼(나치)는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같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2차대전 때 공산주의자들이 파쇼와 싸운다고 해서 그들을 좋게 봐주려는 서구 지식인들의 僞善(위선)을 폭로하였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도 오웰처럼 공산주의의 본질을 깊게 들여다 본 사람이다. 李 대통령은 외교문서에는 어울리지 않는 俗語(속어)로써 공산당을 파쇼집단과 같은 악당으로 경멸하고 있다.

    2. 李承晩은 한국이 공산침략을 저지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한 시점에서 남침을 통일의 기회로 逆轉(역전)시켜야 한다고 확신하고 미국 대통령을 압박한다. 原狀(원상. status quo ante)이란 외교적 용어를 적절히 구사하여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게 바보짓임을 강조한다.

    3. 李 대통령은 38선 분단이 美蘇(미소)에 의하여 결정된 사실을 想起(상기)시키면서 앞으로는 한국인의 동의 없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못박았다. 편지의 序頭(서두)를 감성적으로 시작한 李 대통령은 단호한 自主(자주)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4. 李 대통령이 이 편지에서 다짐하였던 원칙에 대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상당히 부담스럽게 생각하였겠지만 그 뒤 현실화된다.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군의 전쟁 목표를 원상회복이 아닌 한반도 통일로 변경하고 北進(북진)을 명령하는 것이다.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다시 전쟁 목표를 원상회복으로 격하시키지만 李 대통령은 통일 목표를 고수, 韓美(한미)간에 갈등이 생긴다. 한국의 동의 없는 한국에 대한 외부의 결정을 거부하겠다는 李 대통령의 다짐은 휴전협상에 대한 반발과 반공포로 석방 조치로 나타났다. 미국은 李 대통령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한미상호방위 조약을 맺음으로써 韓美(한미)동맹을 구축한다.

    5. 한국전의 본질을, <외세의 조종을 받는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 한국인의 대결>로 규정한 것은, 김일성 일당을 민족반역자로 몰아붙여 고립시키려는 전략의 표현이다.


    게티스버그 연설을 연상시키는 대예언

    1904년 李承晩(이승만)이 獄中(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의 한 귀절은 이렇다.

    <부디 깊이 생각하고, 고집부리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힘껏 일하고 공부하여 성공할 수 있도록 자유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스스로 活力(활력)이 생기고, 관습이 빠르게 변하여 나라 전체에도 活力(활력)이 생겨서 몇십 년 후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根本(근본)이다.>

    그 44년 뒤인 1948년 8월15일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선포 기념 연설을 하는데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연상시킨다.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마는 義(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惡(악)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民權(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政體(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民權(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정부에서 가장 專力(전력)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국제通商(통상)과 공업을 발전시킬 것입니다. 농장과 공장의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에게 없는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손세일 선생의 책에서 읽고 감탄한 나는 이를 한국 현대사의 최고 연설로 꼽는다. 민주주의의 본질과 국가의 진로를 천명한 이 연설의 위대성은 그 예언력이다. 李 대통령이 가리킨 그 방향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드골과 비슷한 처지에서

    이승만은 평생을 도전하고 생존투쟁을 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도전의 대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탈린이 조종하는 국제공산주의 세력뿐 아니라 미국도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1950년 9월15일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진이 시작되고 통일이 임박해 보이던 10월12일 유엔한국임시위원회는 비밀회의를 열어 유엔군이 점령한 북한 해방지역의 임시 민간행정권을 한국정부에 주지 않고 유엔군 총사령관의 관할 하에 둔다는 호주의 제안을 가결했다. 이를 임병직 외무장관이 李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日記(일기)에 따르면 <대통령은 공산당의 잔인무도한 통치 하에서 혼이 난 북한동포들이 이제는 유엔군 軍政(군정) 하에서 우방의 철부지들이 휘두를 총대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이승만은 미국 기자에게 “내가 또 다시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미치광이’ 소리는 독립운동 때 듣던 말이었다. 대통령은 그러나 이번에 들을 ‘미치광이’ 소리는 소위 ‘우방(友邦)’의 정치지도자들로부터 듣게 될 것이라면서 “통일이 되기만 하면 그 같은 욕은 얼마나 감수하기 좋은 욕이냐”면서 웃었다.>(일기)

    나는 '이승만과 김구'와 동시에 샤를 드골의 회고록을 읽었다. 비슷한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처한 상황이 같았다. 상처 받은 조국과 민족의 영혼을 되살리려는 지도자는 안팎으로 처절하게 싸우고 버티어야 자존심을 지키고 국익을 확보할 수 있다. 상대와 사이 좋게 지내려다가는 국가가 손해를 본다. 이승만이 한국전쟁중 미국이나 유엔, 특히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듯이, 2차대전 중 영국에서 곁방살이를 하면서 자유프랑스군을 이끌던 드골도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마셜, 아이젠하워로부터 비난과 경멸을 많이 받았다. 드골의 회고록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처칠의 2차대전 회고록에 못지 않는 名文(명문)이다.

    드골은 이 회고록에서 처칠이 1945년 7월 선거에서 패배, 수상직을 물러나는 것을 지켜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처칠은 나를 친절하게 대하지는 않았고, 레반트(중동의 시리아 부근) 지역에 대해서는 적대적 행태를 보였지만, 이 위대한 정치인은 프랑스가 자유 세계에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늘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의 노력은 처음부터 無爲(무위)로 끝났을 것이다. 그는 나를 기꺼이 도와줌으로써 프랑스의 목표 달성을 위하여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그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의 임무는 엄청났지만 적어도 그는 국가의 일상적 절차에 의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모든 권한과 법적 권위를 제공 받았다. 일치 단결한 국민들 앞에서 아직도 온전한 거대한 제국과 강력한 군대의 뒷받침을 받았다. 반면 나의 처지는 정반대였다. 나는 공식적인 정부 권력(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를 지칭)으로부터는 범죄자로 선고 받았고, 군대는 산산조작이 났으며, 국가이익의 흔적만 남아 있는 가운데서 敵의 수중에 들어가 조직이 찢어진 나라의 운명을 홀로 책임져야 했다. 처칠과 드골이 처한 조건은 달랐지만 서로 싸워가면서도 불타는 역사의 바다에서 같은 별을 기준으로 삼아 5년 이상 나란히 항해하였다. 우리는 같이 항구를 視野(시야)에 두게 되었지만 영국은 폭풍이 불 때 불러냈던 선장더러 배를 떠나라고 했다. 나도 내가 프랑스 호의 키를 잡았던 식으로 나 스스로의 방식으로 그것을 내려놓을 날을 내다 보았다.>

    드골과 케네디의 核 토론

    처칠, 드골, 이승만은 대문장가였다. 복잡한 상황을 요약하여 파악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외교를 펴는 데 있어서 지도자의 문장력은 그야말로 國力(국력)이다. 드골의 知的(지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자료를 소개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밑에서 특별 보과관 겸 史官(사관) 역할을 하였던 아서 M. 슐레진저 2세는 '1000일: 백악관의 케네디'(A Thousand Days: John F. Kennedy in the White House)라는 책을 썼다. 傳記(전기) 부분 퓰리처 상을 받았다.

    1961년 6월 초 파리를 방문한 케네디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의 頂上(정상)회담 기록중 核전략을 다룬 부분이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핵무장한 북한의 위협에 노출된 핵 없는 한국에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드골은 '핵무기가 없는 나라는 진실로 독립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이다.

    드골: '지금과 같은 NATO는 수명이 다하였다. 이 조직의 핵심적 존재 목적은 미국의 핵무기로 유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제 미국만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던 시대는 지났다. 미국은 더구나 다른 곳에서도 할 일들이 많다. 미국이 통합적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이다. 최근 프랑스 장군들이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프랑스를 자기들이 지킨다는 자주국방 의지의 不在(부재)가 한 원인이다. 이는 정부에 대한 충성심의 결여로 나타난다. 자주국방 의지의 결여는 동맹을 약화시킨다. 애국적 동기가 있어야만 長期戰(장기전)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를 지켜주기 위하여) 먼저 핵무기를 쓸 것이라고 믿을 수 없게 되었기에 유럽의 안전은 유럽 국가들에 의하여 확보되어야 한다. 미국의 도움 없이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라 미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케네디: '미국에 있어서는 유럽의 방어가 미국의 방어와 마찬가지이다. 미군이 유럽에 주둔하는 이유는, 유럽에 대한 소련의 공격은 자동적으로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모스크바에게 想起(상기)시키기 위함이다. 핵무기는 먼저 사용하는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므로 러시아가 재래식 무기로 공격하였다고 해서 우리가 핵무기 사용을 유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유럽 국가들이 별도로 국방체제를 갖춘다면 새로운 문제를 만들 것이다. 즉 핵무기가 없는 국가들은 불만이 생길 것이고 중립화로 몰릴지 모른다.'

    드골: '만약 러시아가, 미국은 다른 나라의 방어를 위하여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귀하의 말이 맞다. 그러나 러시아가 그렇게 믿을지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미국인들조차도 그 약속을 믿을지 의문이다.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에 원자폭탄을 맡겨놓을 수는 없다[注: 다른 나라의 사태에 의하여 自國(자국)의 핵폭탄 사용 與否(여부)가 좌우되도록 할 수는 없다는 뜻]. 이게 프랑스가 미국에 핵무기를 지원해달라든지 핵개발을 도와달라고 하지 않은 이유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미국은 자기 영토가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을 때만 핵무기를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연하지 않는가? 국가는 그렇게 행동하는 법이다. 러시아와 프랑스도 그럴 것이다. 귀하가 미국인은 유럽과 미국을 같은 존재로 본다고 말하니까 나는 그 말을 믿겠지만 다른 사람도 그럴까? 내가 만약 귀하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이 무기를 써야 할지 자신이 없을 것이다. 벌써 미국은 기준을 높이지 않았나, 즉 핵무기 사용을 고려해야 하는 시각을 늦추지 않았나?

    케네디: 기준을 엄격히 한 것은 局地的(국저적) 충돌이 핵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약속을 약화시킨 것이 아니라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NATO에 대한 공격은 그 기준을 넘어서는 것임이 명백하다. 장군(드골)은 미국이 2차대전까지는 고립주의적이었지만 달라졌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을 침략하였을 때 취한 미국의 대응을 보면 우리 동맹국들은 안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끼리의 신뢰를 강화할 때 모스크바에 대하여 우리가 베를린 위기에 즈음하여 단호하게 대응할 것임을 믿게 만들 수 있다.

    그날 저녁 드골은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호화로운 만찬을 베풀었다. 만찬 중 케네디는 드골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하였다. 처칠과 루스벨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드골은 이런 요지의 비교를 하였다.

    '처칠은 투사였다. 가식 없는 매너를 가졌으며, 어느 날은 매우 재미 있고, 다른 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그의 정책은 임박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단기적인 것이었다. 모든 영국인들이 다 그렇지만 그도 장사꾼이었다. 예컨대 러시아를 상대할 때 東歐(동구)에서 양보를 함으로써 다른 곳에서 행동의 자유를 얻으려는 식이었다. 루스벨트는 항상 매력적이고 항상 귀족적이었다. 그는 장기적 정책을 추구하였지만 소련에 대한 정책처럼 실수가 잦았다.'

    이 대화를 기록한 슐레진저 2세는 이렇게 평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확고부동의 국가주의자와 이성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실용주의자 사이의 솔직하고 탐색적인 만남이었고 둘 다 만족하였다. 드골은 케네디가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고 충분히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케네디는 오랫동안 드골에 흠뻑 빠졌는데, 특히 이 위대하고 침울한 지도자가 역사적 사건을 상대하면서 그 결과를 고매하고 세심한 문장으로 기록한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 만남은 드골의 끈질김과 명료한 생각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다.>
     

    런던 방송연설

    영국 저술가 폴 존슨은 '영웅들'이란 책에서 처칠과 드골을 대치시켰다. 그는 처칠을 극찬하고 드골은 대체로 비판적으로 서술하였다. 드골의 힘은 '知性(지성)'인데, 그는 사람보다 사상을 더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고, 프랑스 사람보다 프랑스라는 국가를 더 위에 놓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고마움을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도 했다. 드골은 독서광이었다. 그는 '누가 나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묻지 말라. 사자는 그가 소화한 羊(양)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나는 평생 독서를 하였다'고 했다. 드골은 유명한 방송 연설을 통하여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1940년 6월, 세계최강으로 평가 받던 프랑스 육군은 독일군의 전격전 전술에 걸려 6주 만에 무너진다. 프랑스 정부가 1차 대전의 영웅 패탕 원수를 지도자로 불러내 독일에 항복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국방차관 드골 장군은 영국으로 탈출, 망명정부를 만든다. 처칠은 그가 BBC 방송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6월18일 드골의 방송 연설은, 프랑스가 다시 일어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뒤 戰勝國(전승국)으로 逆轉(역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간결한 연설은 名文이기도 하다. 영어로 번역된 全文을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였다.


    *프랑스 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1940년 6월18일)

    <오랜 동안 프랑스 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는 敵對(적대)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敵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敵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의 탱크와 비행기와 전술이 우리 군대를 퇴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독일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 만들어낸 기습의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구제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大義(대의)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기억하십시오, 프랑스는 홀로 서 있는 게 아닙니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뒤에는 광활한 제국이 있고, 우리는 制海權(제해권)을 장악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大英(대영)제국과 같은 大義(대의)로 손 잡을 것입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엄청난 산업 자원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不運(불운)한 우리나라에 한정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결과는 프랑스 戰役(전역)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 전쟁입니다. 실수가 많았고, 늑장도 부렸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 세계가 장차 우리의 敵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덮친 기계화 부대의 거대한 重量(중량)에 의하여 붕괴되었지만, 더 강력한 기계화 부대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미래를 내다 봅니다.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나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영국 영토에 있거나 있게 될 모든 프랑스 장교들과 남자들, 무기를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영국 영토에 와 있거나 장차 오게 될 군수공장의 기술자와 숙련공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와 연락 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 운동의 불꽃은 죽지 않아야 하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巨人들에 대한 인물평

    드골의 회고록엔 스탈린, 처칠, 트루먼, 히틀러에 대한 절묘한 인물평이 실려 있다.


    *히틀러: <이 사나이는 無에서 출발, 독일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는데, 그 순간이 바로 독일이 깨어나 새로운 戀人(연인)을 찾고 있을 때였다. 추락한 황제, 패배한 장군들, 그리고 멍청한 정치인들에게 싫증이 난 독일은 無名(무명)의 이 거리의 사나이에게 몸을 맡겼는데, 그는 모험적으로 보이고, 지배를 약속하였으며, 그의 狂的(광적)인 목소리는 독일의 숨은 본능을 흔들었던 것이다.>

    *스탈린: <15시간에 이르는 회담을 통하여 나는 그의 야심차고 수수께끼 같은 정책의 대강을 분별할 수 있었다. 대장군으로 위장한 공산주의자, 기만 전술을 즐기는 독재자, 귀여운 미소를 띠는 정복자로서 그는 속임수의 천재였다. 그의 열정은 너무나 강렬하여 가끔 그의 甲胄(갑주) 사이로 스며나오곤 했는데 그게 이상한 매력이기도 하였다.(중략). (회담 뒤) 스탈린은 작은 목소리로 나를 칭찬하였다.

    '근사한 게임이었습니다. 잘했어요! 나는 당신처럼 나와 생각이 달라도 뭘 얻기를 원하는지를 아는 사람과 거래하는 게 좋아요.'

    몇 시간 전에는 그렇게 격렬하게 굴던 사람이 淸澄(청징)한 꼭대기에서 마치 다른 사람, 다른 전쟁, 다른 역사를 觀照(관조)하듯이 동떨어진 태도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것은 죽음이지요.'

    그는 히틀러를 측은히 여겼다.

    '불쌍한 녀석도 여기서는 벗어나지 못할 거야.'

    '파리로 오시겠습니까'라는 나의 말에 그는 '나는 늙은이라서 곧 죽을 거요'라고 했다.>

    *트루먼: 그는 1945년 8월 22, 23, 25일에 걸쳐 일곱 시간 동안 만났던 트루먼에 대하여 호평을 하였다.

    <트루먼은 소박한 태도로 해서 극히 긍정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은, 화려한 전임자가 같은 사무실에서 오랫동안 개발하였던 거창한 이상주의와 전혀 달랐다. 신임 대통령은 세계의 화합이란 계획은 포기하였고 자유세계와 소비에트 진영의 경쟁이 모든 국제적 관심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혁명적 봉기를 피함으로써 아직도 공산화되지 않은 국가를 지켜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정치인은 주인 노릇을 하려고 머슴 행세를 한다.'

    드골은 프랑스 국민과 정치를 비꼬는 말들을 많이 남겼다. 이승만은 농담으로도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 '위기만이 프랑스를 단결시킬 수 있다. 265 가지나 되는 치즈를 가진 나라를 갑자기 단합시킬 순 없다.'

    * '내가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개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 '나는 정치란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놓기엔 너무나 심각한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정치인 클레망소는 '전쟁이란 장군들에게만 맡겨 놓기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다'고 했었다.)

    * '애국심은 同族(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인 마음이고, 민족주의란 異民族(이민족)을 미워하는 마음이 먼저인 마음이다.'

    * '정치인은 주인이 되기 위하여 머슴 행세를 한다.'

    * '나는 누구한테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속하는 사람이다.'

    * '정치인들은 자신이 말한 것도 믿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으면 놀란다.'

    * '정치에선 조국이나 유권자들을 배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럴 경우) 유권자들을 배신할 것이다.'

     

    이승만은 드골보다 더 위대하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서독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를 무척 존경하였다. 그가 서독을 대서양 공동체와 묶어놓은 점과 쇠하지 않은 인간적 活力(활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1961년에 아데나워가 워싱턴을 방문하였을 때 케네디는 자신이 아데나워의 나이에 대통령이 된다면 그해는 2002년일 것이라고 계산하면서 즐거워하였다. 케네디는 자신의 死後(사후) '1000일간: 백악관의 케네디'라는 名著(명저)를 남기게 되는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2세에게 '아네나워는 드골보다 더 위대하다'고 평하였다.

    '아데나워의 목표는 그의 조국을 초월하는데 드골은 그의 조국을 미화하는 데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승만의 정치철학이 드골보다는 아데나워의 기독교적 신념에 더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드골에 못지 않는 애국심을 가졌으면서도 아데나워처럼 국경을 넘는 보편적 자유의지를 지녔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대인물이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하면서도 민주주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쟁중에도 선거를 하였고, 국회 문을 닫지 않았으며, 언론 검열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전쟁중인 나라가 민주주의를 할 수 있고 동시에 경제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자신이 민주주의를 가르친 학생들의 시위에 스스로 물러났다.

    그가 트루먼과 함께 치른 한국전쟁은 국경을 넘어 汎세계적 영향을 끼쳤다. 대만이 살아났고, 일본이 부흥하였으며 서독이 재무장하고, 미국은 국방비를 네 배로 늘리면서 본격적인 對蘇(대소) 군비경쟁을 시작하였고, NATO가 군사동맹기구로 강화되었다. 동서 냉전에서 서방세계가 이기게 되는 틀이 여기서 생겼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프랑스의 이익만 생각한 드골보다 아데나워에 더 가깝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에 더 충실하였고 더 많은 나라들에 더 좋은 영향을 끼쳤다. 드골이 없었더라도 연합군은 독일에 이겼을 것이지만, 이승만이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赤化되고 서방세계는 지금도 공산진영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이승만은 드골보다 더 위대하였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들은 그런 이승만을 김일성보다 더 미워하고 있다. 下人에겐 영웅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영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下人이 下人이기 때문이다.
    [조갑제닷컴= 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