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한국병탄 준비 "완료"

    이토, 영친왕 데리고 일본 견학여행

    한국통감에서 추밀원 의장으로 관직을 옮긴 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의 잔무를 정리하고 사무를 후임자에게 인계하기 위하여 1909년 7월 1일 한국으로 향했다. 그의 마지막 한국행이었다.

    7월 5일 서울에 도착한 그는 이미 통감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법권 및 감옥사무 일본으로 위탁’(각서 조인, 7월 14일)과 ‘군부폐지’(칙령, 7월 31)를 정리함으로서 한국의 국가적 강제장치를 완전히 해체했다. 이는 후임 통감의 부담을 덜어주고, 동시에 병탄을 위한 길을 깨끗이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7월 19일 귀국한 이토는 8월 1일부터 ‘일본 교육’을 받고 있는 영친왕을 대동하고 3주간에 걸친 일본의 동북지방과 북해도 견학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목적은 황태자로 하여금 “우방(友邦)의 정의(情誼)”를 느끼고, “형제와 같은 일한관계”를 보다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만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만주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국 병탄' 천황의 재가를 받다

    ‘대방침(大方針)’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병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면서부터 병탄을 위한 정부 당국의 준비는 급물살을 탔다. 일본정부는 7월 6일 구라치 데츠기치(倉知鐵吉)의 안을 기초로 한 ‘대한대방침(對韓大方針)’과 ‘시설대강(施設大綱)’을 각의에서 결정하고, 같은 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을 일본에 귀속시킨다는 한국 ‘병탄’이 국가 정책으로 확정됐다. 그동안 미루어졌던 정한론이 36년 만에 국가정책으로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대방침’은 두 개의 원칙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합병을 단행할 것. 한국을 합병하여 이를 제국 판도의 일부로 삼는 것은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제국이 내외 형세에 비추어 적당한 시기에 단연코 합병을 실행해 반도를 명실 공히 우리나라의 통치 하에 두고, 또 한국과 여러 외국과의 조약 관계를 소멸시키는 것은 제국백년의 장계(長計)가 된다”는 것이다.

    ‘대방침’의 또 다른 원칙은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는 병합의 방침에 기초하여 충분한 보호의 실권을 거두고, 힘써 실력의 부식을 도모할 것. 전항과 같이 병합의 대방침이 이미 확정되었으나, 그 적당한 시기가 도래하기까지는 병합 방침에 기초하여 우리의 제반 경영을 진척함으로써 반도에서 우리의 실력을 확립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내용이다(<日本外交文書>).

    "한국인이 합방 요구하는 분위기 성숙시킨다"

    일본 정부가 한국 병탄을 정책으로 확인하고 있는 이 ‘대방침’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적당한 시기’다. 고무라 쥬타로가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대방침’의 핵심은 “병합을 단행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고무라는 ‘적당한 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깊이 고려하고 있었다.

    하나는 “열국의 사혹(思惑)”이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시모노세키 조약, 포츠머스 조약, 미국의 승인, 1905년의 ‘보호조약’, 영국의 승인, 정미7조약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은 “종국의 운명(병합)에 귀착하리라는 것을 열국이 양해하고 있지만, 유유히 병합을 단행할 경우 외교의 운영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강대국의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가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그동안 한국의 독립을 강조해 온 일본이 병탄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다. 고무라는 일본이 “한국정부의 독립 부익(扶翼), 독립 유지를 여러 차례 선명(宣明)”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설령 이러한 선명들은 각 시대에 벌어진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서, 시세의 변천은 정책의 변천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앞장서서 병합을 결행하는 것은 바림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합방’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성숙될 때가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한국인들이 앞장서서 ‘합방’을 요구하도록 작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병합'은 연방이 아닌 한국의 완전한 폐멸(廢滅) 귀속"

    ‘대방침’이 안고 있는 두 번째 중요한 점은 ‘병합’의 의미다. 일본의 한국 ‘병합’은 “한국을 제국 판도의 일부로 만들”고, “반도를 명실 공히 우리의 통치하에 둔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최초로 밝힌 한국과 일본의 ‘병합’은 연방제도나 위임통치의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완전한 소멸과 한국의 일본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대방침’의 기초안을 작성하면서 ‘병합’이라는 단어를 조어(造語)한 구라치 데츠기치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이 완전히 폐멸(廢滅)하여 제국영토의 일부로 귀속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면서 동시에 그 어조가 지나치게 과격하지 않은 문자”가 곧 ‘병합’이라는 것이다. 합방론자들이 주장했던 대등한 국가연합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 ‘대방침’과 함께 각의는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의 정책목표라 할 수 있는 다섯 조항의 ‘시설대강’을 결정했다. 그것들은 (1) 질서유지를 위한 군대의 주둔, 헌병과 경찰관 증파, (2) 한국에 관한 외국교섭사무 장악, (3) 한국 철도를 제국 철도원의 관할로 이관하고, 남만주철도와 긴밀한 연락망 구축, (4) 일본인의 한국 이주와 한일경제의 긴밀화, (5) 재한 일본인 관리의 권리 확장 등이다.

    일본의회도 배제, 천황의 초헌법적 대권 행사로

    실행방안
    ‘대방침’과 ‘시설대강’이 확정되자, 고무라는 구체적 실행방안을 준비했다. 병탄 단행은 국내외 정세의 향방에 따라 결정될 문제이지만, ‘적당한 시기’가 도래하면, 언제든지 지체 없이 병탄을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 방침과 조치를 미리 강구할 할 필요가 있었다.

    고무라 외상은 구라치 정무국장에게 극비리에 이를 준비토록 하였다. 구라치는 고무라 외상의 구상을 기초로 “병합의 방법과 순서 등의 세목(細目)을 작성”하였고, 이를 외상이 수정하여 ‘의견서’의 형태로 7월 하순 가츠라에게 제출했다.

    이 ‘의견서’는 한국병합의 선포, 한국 황실의 처분, 한반도의 통치, 대외관계라는 4개의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小村外交史>). 이에 따르면 병합실행의 시기는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적당한 시기’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병합을 단행”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한국병합의 선포는 “조칙(詔勅)”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한국 지배 통치는 일본 헌법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천황대권의 행동”에 속한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여 한국에 대한 통치권은 일본 헌법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초헌법적인 천황 대권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식민지 한국의 ‘통치권’ 문제로 뒷날 정치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논쟁을 사전에 봉쇄하고, 의회나 국무대신이 관여할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고종-황태자등 황족전체를 동경으로 이주시키기로
     
    한국 황실에 대해서는 병합과 동시에 “한국 황실로 하여금 명실 공히 일체 정권에 관계치 못하게 하여 한국인이 다른 뜻을 품지 못하도록 근본을 제거”하고, 이를 위해 한국 황제를 완전히 “폐위”할 것을 확실히 했다. 그리고 명칭도 ‘황제’가 아니라 “대공(大公)전하”라 부르고, 고종, 황태자, 의친왕을 포함한 황족 전체를 “도쿄에 이거(移居)”시킨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치는 중앙관청, 지방관청, 재판소로 나누고 있으나 구체적 내용은 생략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통치기구에 대한 연구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한국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조약은 “병합과 동시에 소멸”하고, “법권 및 세권은 모두 일본에 귀속”한다는 것을 조칙으로 선포할 것을 제시했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내지잡거와 토지소유권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고무라 외상-가츠라 수상-대륙낭인 "의견 일치"

    가츠라는 고무라의 이 ‘의견서’를 각의에 부쳐 “각료 일동으로부터 찬동”을 받고, “병합방침의 대강”을 작성했다. 이 ‘대강’에는 ‘의견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병합의 방법’을 명시하고 있다. ‘대강’의 전문은 “병합 단행의 시기에 이르면 제국정부와 한국정부 사이에 하나의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뜻에 따르는 형식에 의해 병합을 실행하는 것이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 하겠지만, 만일 이 방법에 의해 병합을 실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우리의 일방적인 행위에 의해 제국정부에서 한국에 대해 병합을 선언”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뜻에 따르는 형식,’ 즉 한국인의 ‘요구’에 의해서 체결되는 임의적 형식의 조약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한국 ‘병합’은 일본이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위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고무라 외상이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고, 또한 우치다 료헤이를 위시하여 일찍부터 한국에 들어가서 활동한 대륙낭인들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 우치다 료헤이와 송병준. 
    ▲ 우치다 료헤이와 송병준. 

    우치다, 일진회 막후조종… '합방제안' 세가지 방법 강구

    일진회의 역할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한 조기 병탄론자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임과 가츠라 내각의 적극적이고도 신속한 병탄정책을 환영했다. 정부가 ‘대방침’을 확정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일진회의 활동을 보다 강화하고, 병탄 프로세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우치다는 일진회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일진회의 고문으로 추대할 것을 이용구와 송병준에게 종용했다. 스기야마는 당시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야마가타-가츠라-데라우치 파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기병탄을 위해서 도쿄의 권력층과의 교량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진회는 우치다의 제안대로 1909년 8월 대표총회를 열고 스기야마를 고문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그에게 통지했다. 그러나 가츠라 수상과 협의한 스기야마는 일진회라는 단체의 고문이 아니라, 개인 이용구와 송병준의 ‘지도 고문’으로서의 직책을 받아들였다. 가츠라 수상은 스기야마가 전면 나서서 일진회를 지휘하기보다, 배후에서 송병준과 이용구를 조정하여 일진회를 관리하는 길이 ‘한국인의 요청’에 의한 병합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정부가 추진하는 병합 프로젝트가 보다 신속하고 원활하게 진행되게 하기 위하여   우치다는 다케다 한시, 이용구, 송병준과 협의하여 일진회가 택할 수 세 가지 행동 대안을 마련했다. 첫째는 일진회 내각을 구성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합방’을 제의케 하고 이를 내각회의에서 결정하여 상주하는 방법, 둘째, 한국 황제로 하여금 일본 천황에게 직접 통치권을 위임케 하는 방법, 셋째, 제1안과 제2안으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 일진회 회원을 규합하여 내각에 압력을 넣어 ‘합방’을 강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완용 내각 붕괴시키고 일진회 내각 구성

    이러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우치다와 이용구는 일진회, 대한협회, 서북학회의 3파가 연대하는 3파 제휴를 시도했다.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배일(排日)을 지향하고 있어 일진회와는 그 입장을 달리하고 있으나, 이완용 내각을 반대한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므로 세 파의 정략적 제휴가 가능하다고 우치다와 이용구는 판단하고 있었다. 세파가 제휴하여 이완용 내각을 붕괴시키고, 일진회를 중심으로 하는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합방 청원’을 제기한다는 것의 그들의 구상이었다. 구상대로 실현된다면, 일본의 한국 병탄은 한국인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난 움직임이 된다. 앞서 소개한 ‘대강’에 나타나는 “한국의 뜻에 따르는 형식에 의해 병합을 실행”한다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병탄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됐다.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만이 필요했다. 이 ‘적당한 시기’의 단초를 통감에서 물러난 이토 히로부미가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