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외할아버지

    지난주 토요일, 아이들  방학이 되어 나는 외손자 둘을 데리고 시골농막으로 향했다.
    사위는 목사라서 새벽 기도회부터 교회에 묻혀 살다 보면 돌아오는 시간이 귀가 시간이다.
    밤 10시도 좋고 11시도 좋다. 새벽 미명을 뚫고 집을 나서야 하는 교역자의 생활을 하고 있으니 서로 만나 보기는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1년에 한두 번. 사위 얼굴 보려면 그 집에서 잠자기 전에는 힘들다. 사위로서야 처가 식구 자주 안 보는 것이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딸 가진 아버지로서는 안쓰럽기 그지없다.

    때문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외손자 둘을 더불어 달고 다니려 노력하고 있다.
    특히 시골 농원 갈 때는 함께 농심도 접할 수 있도록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나도 행복하고 아이들도 좋아라 하니 1석 2 조는 이때도 해당된다.

    외손자들과 농원으로 가는 길

    외손자 둘과 딸 그리고 어부인을 모시고 농원으로 가는 길, 생각해 보면 오히려 사위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내가 딸도 보고 귀여운 손자들도 만날 수 있으니 이것도 은혜인 것을. 은혜 아닌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농원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예외 없이 제 세상 만난 듯 소리를 지르며 아우성이다. 이내 앞마당으로 줄달음을 친다.

    “와 신난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른다. 아이들에겐 천국이 따로 없다.
    “할아버지, 나 땅 팔래요. 버러지 안 나와요?”
    농원이 좋아 찾아 가는 것은 초늙은이 우리인데 아이들이 더 시골을 좋아한다.
    도시의 공해와 소음 속에서 아이들도 이미 초원의 진미를 깨닫기 시작했는지.

    “할아버지, 이 풀은 나쁜 풀인가요. 이 꽃은 착한 가요.”
    아이들이 풀을 매면서 물어본다. 풀을 맨다고 하지만 6살 8살짜리가 무슨 풀을 맬 것인가.
    호미 하나씩을 들고 그저 허 다리로 위로 아래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팔 운동이 고작이다.
    그래도 할아버지 따라 풀을 맨다고 시늉을 떠는 모습은 기특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잡초를 골라가며 파 젖히면서 이름을 대주면 아이들은 알아들을 리 없고 그저 “나쁜 풀이야. 좋은 풀이야” 묻는다. 아이들이야 이것 아니면 저것,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의 분리 개념밖에 없다.
    좋은 것 나쁜 것 선과 악의 준엄한 판가름뿐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으니 무슨 하드워크 작업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대로 넘어지는 아이들 손잡아 주다가 끝나는 아름다운 작은 학예회의 장군 싸움이 된다.

    외갓집에 가면 언제나 왕자

    어린이를 돌보면서 나의 어린시절 여름 방학 시 내려갔던 외갓집을 떠 올려본다.
    중소도시에서 살던 나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방학만 되면 지금의 내 농원 옆 마을인 시골 외갓집을 찾아갔다. 왜 그랬을까.
    친가 댁 할아버지는 큰아버지 둘째아버지 고모들 그리고 작은집 해서 엄격한 유교의 가부장적 규율이 지배하고 있어 큰 정을 못 느꼈지만, 외가댁은 다행히 나의 어머니가 맛 딸 이어서 그래도 남성위주의  전통가정에서 외손자라도 맨 위 손자인 나를 가장 귀엽게 대해 주었다.
    방학 때 혼자 기차타고 외갓집에 가면 이모들이 우르르, 외숙모가 두 손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외조모의 반가워하는 두 손 벌림은 나를 가장 행복한 왕자의 자리에 앉히는 환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외손자를 가리지 않고 그렇게 반가워했는지. 왜 우리 친 할아버지는 나를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는지.

    그래도 없는 돈에 아버지 졸라 몇 푼 받아가지고 기차에서 내려 장터에서 간 고등어 한손 사들고 외갓집 문전에 들어서면 온 식구가 “어이구, 너 왔구나. “ 뭐 타고 온겨” 반갑게 맞는 함성 아닌 환영의 함성은 나를 영웅이 된 착각에 젖게 한다.

    여름철이면 앞마당에 멍석 펼쳐놓고 쑥으로 모깃불 지피면서 콩국수로 환영 파티가 열리면 그야말로 엘리제궁에서 열리는 가든파티 이상이다. 외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셋, 내 나이 또래 그 밑의 두 외삼촌, 거기다 외할아버지 어머니 즉 외증조할머니 등 온 식구가 모여 보리밥 풋고추 된장 찌개에다 때로는 시원한 콩국수로 잔치를 벌인다. 그래도 새 손님이 왔다는 핑계로.

    나의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것들

    외조부는 식사 시간외는 별로 말이 없으셨던 분이다.
    내가 가도 “오냐 잘 왔냐” 하시곤 그만이다. 그러나 저녁상은 꼭 당신 상 옆에 나를 앉히시곤 했다.
    유교 전통인지 몰라도 아침이든 저녁이든 식사 때면 밥상이 둘 들어오는데 한상은 외조부와 나 그리고 외삼촌 등 남자들을 위한 상, 그리고 다른 상은 외조모와 이모들이 함께 먹는 둘레 상이 들어온다. 그나마 잊지 못하는 것은 혼자된 큰 외숙모, 그 집의 며느리인 외숙모는 둘레 상에도 밥그릇을 올려놓지 못하고 방바닥에 꾸부려 밥숟갈을 올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 외갓집 뿐 만은 아니리라. 외조부는 식사가 들어오면 당신 보리밥 꼭대기에 겨울 산 정상의 눈처럼 선명하게 얹힌 흰 쌀밥을 한 숟가락 떠서 내 밥그릇에 얹어 주신다.
    나는 그때 그 의미를 잘 몰랐다.

    겨울 저녁이면 일찍이 저녁 식사를 마치신 외조부는 사랑방으로 꼭 나를 데리고 납셨다.
    외가댁 사랑방은 본채에서 들어 갈 수도 있고 큰 마루와 방문이 길가에 향해 있어서 오다가다 아무나 들를 수 있는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외할아버지는 매일 나를 데리고 사랑방으로 건너 가셨다. 저녁 후 7-8 시쯤 되면 동네 어른 젊은이 할 것 없이 어슬렁어슬렁 우리 사랑채로 모인다.

    익히 내가 누구 집 손자인 것을 아는 동네 어른들 “원제 왔냐. 공부 잘 하고 있능겨?” 예외 없이 안부를 묻는다. 곁에서 외할아버지가 덧붙여 하문 하신다. ”요새 공부 하는 게 뭐여. 어른들 한테 말씀 드려봐“ 그럴 때면 얼마나 곤혹스럽고 당황했는지.

    나는 손자들에게 무엇으로 남을까

    지금 내가 할아버지가 되어 돌이켜 보니 외할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가르침을 주신 것 같다.
    평소 말 없으신 할아버지는 내면적으로 나를 볼 때 마다 무엇인가 불어 넣으려 애 쓰셨다는 것을 내가 외손자를 두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람, 어른 대하는 법을 가르치시려 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나의 외손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호미로 땅 파는 법(?) 아니면 시골의 정경, 그 외 무엇일까. 요즘은 모두 따로 따로 나가 살고 모두 바쁘다 보니 만나기도 어렵고 시간이 없으니 무엇을 가르칠까.
    나는 외할아버지로서 우리 손자들에게 무슨 도움을 줄 것인가.
    아이스크림 사주기, 민속촌 데리고 가기, 동네 놀이터 데려가기, 뒷산 산책 함께 가기 등 쉬운대로 고작 그런 노력을  해 보지만 훗날 아이들에게 얼마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