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에서 저급한 행동으로 정치의 격을 떨어뜨리고 국격을 실추시키는 가운데 각종 시위자들이 거리에서 과격한 데모로 나라의 얼굴을 먹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무지하게 농성을 하는 것처럼 거리의 시위자들은 난폭하게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대회를 하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정치 미개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거의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의 집단행동과 농민들의 시위에서부터 촛불시위에 이르는 다양한 시위에서 공통적인 것은 시위 의식에 증오와 폭력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시위의 본질을 일탈해서 시위를 탈법, 초법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진국 시각으로 보면 길바닥에 들어 눕는 것도 불법 시위인데 그 정도는 오히려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으로 보이는 것이 한국의 시위문화입니다.
    얼굴에 복면을 쓰고 손에 각목이나 쇠파이프와 죽창을 든 모습은 폭도를 방불케 합니다.
    이들 폭도적인 시위자들은 죽창을 휘두르고, 경찰차를 부수고, 경찰 옷을 벗기고, 집단 폭행을 하고, 염산까지 던지는 폭동의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광우병 촛불 시위를 할 때 일부 여성들이 아이를 스트롤러(유모차)에 싣고 경찰의 물대포 앞에 서기도 했습니다. 이런 여성들은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아이를 도구로 삼는 모성을 상실한 여성들입니다. 이런 어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가 건전한 민주시민이 되기 어렵습니다.

    이들 폭력적이고 광적인 시위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들이 동원하는 모든 수단이 정당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주장을 표현하는 방법이 법을 어기면 그것은 잘못된 시위입니다.
    군사독재시대에는 독재 정부의 강압 정책으로 민주주의 숨통을 막았고, 의사 표현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격 시위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정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제도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한 뒤에는 이런 시위는 정당성과 명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법 탈법 시위로 인해 그들이 과격시위까지 할 수 있게 해준 민주화 운동을 희석시키고 왜곡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민주 사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시위는 법의 테두리에서 해야 합니다.

    한국의 폭력 시위는 한국 국회의원들의 난장판 추태와 쌍벽을 이루는 어글리 코리안 문화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국회의원들의 난장판 농성과 저질 시위는 한국 사회에 숨 쉬고 있는 폭력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을 여행했던 외국인이 찍은 신기한 한국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길거리에서 싸움하는 장면입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대낮에 길 한 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멱살을 잡고 주먹질 싸움을 하고, 그것을 구경하는 시민들 표정을 재미있어하고, 싸움이 계속되는데도 경찰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궁금해 합니다.
    밤이 되어서 술을 마신 취객들이 고성방가를 하면서 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한국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이해하면서도, 술 취한 사람이 파출소에서 행패를 부리고, 기물을 파괴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파출소에서 기물을 때려 부수고 몽둥이를 든 취객이 경찰을 쫓아가자 경찰이 도망가는 것은 21세기 선진 조국의 모습을 먹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시민의 품위와 국격이 있겠습니까?

    대낮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고, 충혈된 눈으로 경찰 옷을 벗기고, 경찰을 구타하는 시위자들과, 파출소를 파괴하는 술꾼들의 행태와, 국회의사당에서 도끼와 망치를 든 국회의원들의 추태에는 일맥상통하는 한국의 폭력문화의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문화는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자주 목격하고 학교에서 경험하는 한국의 현상입니다.
    아이들끼리 패를 지어 세력 다툼을 하는 패싸움을 하고, 힘없는 아이나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는 아이를 소외시켜서 때리기까지 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 한국의 학교입니다.
    이런 풍토에서 폭력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한국의 다혈질 문화와 감정 문화와 섞여져서 길거리와 국회의사당에서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늘 강자였습니다.
    과거 어두운 시대에는 권력자와 재력가가 폭력자가 되어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까지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느 재벌의 회장이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권력, 금력과 깡패들의 야만성이 폭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민주화 시대가 되자 그 반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떼를 지은 다수의 시위군중도 하나의 권력집단이 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신들이 미워했던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휘두르고, 광분한 시위자들은 사주를 구타하고 드럼통에 넣어 굴리기도 했습니다.
    과거에는 권력에 굽실거리면서 뇌물을 주기도 했던 시민들이 민주주의 이름으로 용감해지고, 파출소를 부수고, 경찰을 때리면서 억눌린 감정 배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한국의 품성이 순화되고 품격이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절단시키는 첫 걸음은 공권력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공권력이 기세등등하게 권력을 등에 업고 행패를 부렸으나 민주화가 되자 시민들이 자유라는 깃발을 흔들면서 탈선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책임과 절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파출소에 붙잡혀간 술 취한 사람이 경찰서 기물을 파괴하고 경찰을 구타하려는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 찾기 힘들 것입니다.
    경찰이 취객에게 쫓겨 가는 비디오 화면을 보면서 웃을 수 없는 것은 거기에 심각한 폭력문화의 상징과 공권력의 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충혈 된 눈으로 경찰 옷을 벗기고, 경찰을 구타하는 시위자들과, 미친 사람처럼 파출소를 파괴하는 술꾼들의 행태와, 국회의사당에서 도끼와 망치를 든 국회의원들의 추태에는 한국의 폭력문화와  공권력의 무력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꼽는 미국에서 공권력은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이유로도 경찰의 권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찰에게 행패를 부리면 수갑을 차야하고, 경찰에게 잘못 대들면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습니다.
    2년 전 미국 로스앤젤리스 지역에서 25세 된 조성만씨가 경찰에 쇠파이프를 휘두르다가 10여발의 총격을 받고 숨진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조성만씨는 다리를 정상으로 쓰지 못해 휠체어에 앉은 상태에서 경찰에게 자동차를 수리하는 공구를 휘둘렀다고 해서 무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경찰의 과잉 방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나 경찰은 조성만씨가 쇠파이프를 손에서 놓으라는 경찰의 명령에 불복종했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총격을 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37세 된 한인 여성 수지 김씨가 1살 된 아기를 뒷좌석에 태우고 경찰의 정지 명령을 어기고 30여 분간 질주하다가 경찰 총에 맞아 숨져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1970년에 일어났던 켄트대학 사건은 미국의 시위 문화를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하이오주 방위군이 월남전 반대시위를 하던 켄트대학 학생들이 고함을 치면서 돌을 던지자 발포를 해서 4명의 대학생이 숨지고 9명이 크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방위군의 과잉 진압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켰지만 방위군은 학생들이 평화적 시위를 벗어났기 때문에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에도 격렬 시위가 있습니다. 반전 운동가들이나, 낙태 반대자들, 사회주의 운동가들, 동물애호가들 가운데 극단적인 사람들이 시위를 과격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위가 아무리 격해져도 절대로 몽둥이나 쇠파이프를 들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습니다. 공권력을 향해 물리적 공격을 가하면 발포를 할 수 있는 것이 미국의 시위문화이고 공권력의 권위입니다.

    공권력의 과잉과 탈선이라는 지탄을 받으면서도 미국의 공권력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위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공권력이 정당하게 유지되어야 자유를 지킬 수 있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부작용과 과잉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시정되어야할 사항이지 그로인해 공권력을 위축시키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권력이 시위 군중에게 휘둘리고 권위를 잃으면 사회 질서의 근간이 무너지고, 질서가 흔들리면 민주주의가 도전받는다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 거리에서 데모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국회의원이 시위를 해도 경찰 저지선을 넘으면 체포합니다.
    시위에 나선 지도자들은 순순히 수갑을 차고 체포된 후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석방됩니다.

    시위의 본질은 자기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생각되거나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시위를 통해 시민들을 설득하고 호소해서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시위를 하는 것이지, 시위 자체가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의 과격한 시위꾼들은 시위를 통해 목적을 관철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위를 물리적, 폭력적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위가 폭력적이 되면 이미 그 시위는 정당성을 상실합니다.
    시위가 폭력적이 되면 시위를 통해 설득해야할 시민들의 지지와 동조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시위 효과를 스스로 저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위가 폭력적이 되면 시위자들이 외치는 민주주의 정신이 흔들리고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법치주의가 무너집니다. 결국은 자신들이 주장과 신념을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거리의 시위는 쉽게 눈에 띄고 주목을 받기 때문에 나라의 품격과 이미지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시위대가 법을 어기고, 과격하고, 폭력적이면 나라의 이미지가 그런 모습으로 세계에 각인됩니다.
    지금처럼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여행자 한 사람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세계인의 눈으로 들어가고, 그것이 곧바로 나라의 품격을 만드는데 영향을 줍니다.
    악을 쓰고 주먹을 휘두르는 무례한 사람에게서 인격과 품위를 느낄 수 없는 것처럼, 광분한 시위 모습에서 격조와 품위를 느낄 수 없습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권력을 얻으려다 인성이 망가지고 인격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쟁취하려는 저급한 시위 태도는 나라의 품성과 국격을 실추시킵니다. 시위문화를 합법적이고, 평화적이고, 격조 있게 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것이고 민주주의 격을 격상시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