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봄이 찾아오니 슬슬 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처럼 우리도 기지개를 펴야 할 것 같다.
    친구 중 일부는 귀향이니 귀촌이니 해서 붙박이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나는 양서류처럼 서울에 한발, 시골에 한발을 담그고 있다. 

    재천 할머니. 올해 79세 심종망팔(心縱望八).
    우리 농원 아랫집에 혼자 사신다.
    우리가 농막에 내려 갈 때마다 만나 뵙는 동네 터줏대감 할머니이다.

    터주 대감은 영감님만은 아니다.
    할머니는 혼자 사시니 불편한 걸음걸이에도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시며 각 집의 대 소사를 간섭하며 조언하고 이집 저집의 속사정을 전달하고는 정보를 나눈다.

    재천 할머니는 일찍이 혼자되어 딸 하나만 데리고 살다가 출가하여 외손자 셋을 보았다.
    그런데 운명은 비슷하게 태어나는지 딸도 혼자되어 도시로 벌이를 나가는 바람에 외손자 셋을 자기가 맡아 길렀다. 그런 외손자들도 이제는 모두 서울, 대전으로 떠나가 고향집을 지키며 인생의 신산을 되새기며 살기를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는 과거에 대한 추회 함 없이 여름밤 박꽃같이 혼자 살다보니 다람쥐처럼 동네 유람이 바빠졌고 여정의 한 기착지로 우리 집까지 방문 해 주신다. 여간 고맙지가 않다.

    할머니는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스승이다.
    농사일이라면 나에게는 가장 큰 스승이다.
    할머니가 짓는 농사터라야 작은 불럭 집 뒤 터 2평이나 될까.
    그러나 농사일에 모르는 것이 없다.
    학교라곤 근처에도 가 본 일이 없다. 당신 말로는 전화 걸 중도 모르며 오는 전화만 받는다 한다.

    "올 봄 농사는 뭘 심을 거유? 상추 시금치 아욱 열무 뭐든 일찍 씨 뿌려 놓으세유. 싹이 나오면 여간 재미있지 않아유."
    "지난번 칠성이네가 가져다 준 쇠똥 거름 있지유. 쇠똥거름을 미리 끼얹고 땅을 한번 뒤집은 후 씨 뿌리면 잘 자랄턴데유. 하우스를 짓느라 땅을 골라서 바닥은 생 땅 일턴데, 거름을 많이 해야 돼유. 그래도 첫해는 소출이 적을 것이여."

    현장에 도통한 농학 박사다.
    어느 누가 무지 랭이 농사꾼에게 그렇게 자상하게 가르쳐 줄까. 한창 바쁜 요즘의 영농시기에.

    그뿐이랴. 올 한해 장기 영농계획(?)의 일환으로 잡초 제거 걱정까지 해 준다.
    "그러데 거시기, 그 며느리 밑씻개란 풀이 아래 밭에 극성스럽게 올라 오던 디. 지금 제초제로 싹 죽여 없애야 할 것 같아" 도시인들 농촌 와서 퇴비 농사지어 무공해 채소 먹는 재미로 농사짓는 거라고 늘 강조하던 할머니가 왜 갑자기 제초제 얘기를 꺼낼까.
    "금년에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잡풀이 많이 올라오데유."

    "아니 미나리 밑씨개유? 그게 뭐래유?" 무식쟁이 사이비 농군인 나의 당연한 질문이다.
    "미나리가 아니고 며느리 밑씻개라고, 옛날 미운 며느리에게 화장지 대신 밑씻개로 쓰게 했던 풀인데유. 풀 잎 줄기에 가시가 달려서 손이고 발목이고 할퀴는 풀 있어유. 올해도 겁나게 올라오던 디. 아무래도 제초제 써야겠어. 지금 써야 돼. 조금 더 자라면 약효도 없어"

    컴퓨터를 클릭 해 보았다.
    며느리 밑씻개. 이름이 희한하다. 비슷한 이름으로 며느리 배꼽, 며느리밥풀이 있었다.

    며느리 밑씻개란 옛날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미워서 화장지로 쓰던 짚 풀이나 호박 잎 대신 가시 돋친 이 풀을 쓰게 했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들에서 풀을 매다 며느리가 배가 아프다면서 한 귀퉁이에서 용변을 마치자 심술이 난 시어머니가 이 풀을 뜯어 주면서 닦으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옛날 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들의 설음을 옮긴 것이 아닐까 한다.

    작년에는 우리가 고구마를 심어보려 조치원 시장에 나가 씨 고구마를 찾았다.
    고구마도 감자처럼 싹을 낸 토막을 심는 줄로 알고 씨 고구마를 찾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채소 묘를 파는 가게 주인은 이해를 못 한 듯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구마를 심으시려구유?" " 고구마는 순 을 심는건데유. 씨 고구마가 아니예유" 라면서 고구마 잎사귀 순을 한 묶음 던져 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고구마 순을 사 들고 와서 재천 할머니에게 시장서 당한 망신을 전하니 할머니 파안 대소 웃음을 참지 못하시며 한 가지 조언까지 아끼지 않는다.
    "고구마는 순 줄기를 뉘어서 심어야 데유. 둑을 쌓아 놓아야 고구마 알이 잘 들어서유. 맨땅에 꼿꼿이 심으면 알도 안들어서고 구경도 못해유"

    곰삭은 세월 속에 노년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할머니.
    얼마나 더 사시려는지 몰라도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기를 빈다.
    스승으로, 좋은 이웃으로.
    봄꽃 매화 꽃망울들이 물을 먹고 봉곳이 솟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