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고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어 신선한 뉴프런티어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때 케네디는 John F. Kennedy의 앞 글자만을 따서 JFK로 불렸습니다. 저는 그 때 JFK란 말이 아주 멋있게 보여서 제 이름을 영어로 Jo Kwang Dong이라고 쓰고 JKD라고 적어 보았습니다. 제가 "조"라는 성씨의 영어 표기를 "Cho"로 하지 않고 "Jo"로 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분이 신문에 글을 썼는데 성이 "초"씨여서 "Cho"로 쓰면 "초"씨와 "조"씨를 구별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고, 또 하나는 JFK를 흉내 내기 위해 CKD보다는 JKD가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치한 모방심리가 저 같은 고등학생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JFK를 모방할 당시 5.16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종필씨가 J.P란 이름을 쓰기 시작하고 어느 일간지에 J.P 칼럼이란 것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뒤 얼마 안 있어 김대중씨가 DJ란 이름을 쓰고, 김영삼씨가 YS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JP나 DJ, YS란 이름을 본인들이 쓰기 시작한 것인지, 주위 사람이나 언론이 쓰기 시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본인들의 의식과 선호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고, 본인의 발상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즐겼을 것입니다.
    김종필씨나 김대중씨가 "종" 이나 '중"을 영어로 "C"라고 하지 않고 "J"라고 쓴 것은 모르기는 몰라도 케네디의 JFK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저는 JKD란 제 영어 이니셜 이름이 정체성이 없는 치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모방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 같은 대학생 보다 훨씬 경륜이 많았을 이들 정치인들이 JP, DJ, YS를 즐겼고 그 이름은 수십 년 동안 한국 정치에서 뿌리 내렸습니다.
    외국 글자로 정치인 이름을 표시하는 이런 현상은 JP, DJ, YS에서 그치지 않고 그 후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이 저마다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정주영씨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신문 기자들에게 자기 이름을 CY라 불러달라고 주문을 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안쓰러운 실소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후 한국 정치마당에는 TJ(박태준), KH(박근혜), IJ(이인제), DY(정동영), MH(노무현), MJ(정몽준) 등 국적을 잃은 영어 대문자들이 명멸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인의 이름에서 끝나지 않고 TK사단, PK사람들 같은 지역성과 파당성으로 까지 변했습니다. 경북 대구를 TK로 부르고 경남 부산을 PK로 지칭했습니다.
    이런 낮 뜨거운 언어를 누가 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뚜렷한 의식이 없는 일부 언론인들이 만들어 낸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큼지막한 활자로 TK, PK를 연일 썼었습니다.
    이들 구시대적이고 사대적인 영어 이니셜이 사라져가는 줄 알았는데 최근에 다시 언론에 MB라는 약자가 등장했습니다.
    "이명박" 이라는 좋은 이름과 "이대통령"이란 선망의 존칭을 그대로 두고 왜 MB라고 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DJ, YS, JP 반열에 올려놓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하루 바삐 없어져야 할 천박한 영어 글자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격, 대통령의 격을 깎아 내리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정치인들의 존칭이나 명칭을 생략하고 이름만 쓰는 것이 결례가 되고 거북스러워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예의 차리면서 편리하게 하려다가 언어의 정신을 왜곡시키고, 좋은 한국어를 외국어로 오염시키고, 나라의 정체성까지 실추시킬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이름을 영어 대문자로 쓰는 것을 언어 오염과 국가 정체성까지로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는 의식을 지배하고 의식을 만들어 갑니다. 아름다운 자기 모국어를 두고 본 고장인 미국에서도 쓰지 않는 이상한 사대주의를 흉내 내는 것은 보기 민망스런 자기 상실입니다.
    영어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FDR(프랭클린 D 루즈벨트), JFK(존 F 케네디), LBJ(린든 B 존슨) 처럼 영어 약자를 쓴 경우가 있었지만 아주 예외적이었고 이미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현상입니다.


    사대주의적인 영어 이니셜 현상에 이어 한국 정치권에는 "사랑"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대표적이고 "이사모"를 구글에서 찾았더니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인지 "이신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부터 "이완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이르기까지 무척 많았습니다.

    뜻밖에도 "이명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회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약칭하는 "이사모"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인지 한 참 뒤로 밀렸고, "손사모"(손학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사모"(정동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또한 전 같지 않았습니다.


    애당초 누구를 사랑한다는 무슨 무슨 "사모"가 등장한 것 또한 한국 정치가 품격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귀한 글자를 정치판에 끌고 들어 온 발상도 어딘가 어쭙잖고 격에 맞질 않았습니다.
    정치인 성씨를 따서 "사모" "사모" "사모"가 우후죽순으로 나타는 것은 몸에 맞지도 않는 괴상한 옷을 앞 다투어 억지로 입으려는 코미디로 보였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정치인을 사랑한다는 말로 포장하는 자체가 어색하고, 남들이 사랑 모임을 한다니 너도 나도 사랑 타령하면서 사모를 만드는 것이 유행병 집단병 같았습니다.
    너도 노랑물, 나도 노랑물 했던 한 때의 노랑머리 유행병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정치인이 권력 수명을 다하거나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사라지고, 인기가 떨어지면 사랑도 시들해 지고, "사모"들은 가을비에 밟히는 처량한 낙엽처럼 초라하게 됩니다.
    유행에 미쳤던 사람이 철지난 유행을 바라보면서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깨닫지 못하면 그 유행병은 계속 될 것입니다. 유행을 무시할 순 없지만 유행에 미치면 격이 떨어집니다.


    정치인에 대한 사랑 타령 "사모" 유행에 이어, "친박", "친이"란 묘한 파벌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시작의 발단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친박연대"이라는 희한한 당 이름에서 발동이 걸렸습니다.
    아무리 이름 붙일 명칭이 없어도 특정인의 성씨를 따서 "친박연대당"이라고 명명한 사람들의 얼굴은 긍지도 명분도 없는 권력의 추종자들입니다.
    여기에는 정치인이 갖춰야할 최소한의 염치나 자존심도 남아 있질 않습니다.
    선거당시 박근혜씨의 이름을 팔아야 당선이 될 수 있다는 현실 때문에 당 이름을 "친박연대"라고 했다면 더욱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비굴하고 천박한 정치의식으로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국사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존심과 철학을 다 팽개치고 "친박연대"로 출마한 것도 다 먹고 살기 위한 것이고, 금배지를 달고 싶은 고육지책에서 나온 묘안이라고 우긴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정치가 자기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고, 금배지 값이 아무리 헐값이라도 국민들 대표하는 선량의 상징입니다.
    국회의원은 봉건시대 영주를 따르는 가신들의 집단이 아니라, 한국이 세계적 국가로 발돋움하는 선진시대의 국민 대표들입니다. 특정인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이름이 나올 수 있는 정치는 품격을 논하기조차 면구스럽습니다.
    얼마 전에 친박연대당이 이름을 미래 희망 연대로 바꾼 것은 뒤 늦었지만 그래도 교정을 했으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친박연대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면 친박연대당에 충성할 것이지 금배지를 달아준 당을 두고 다시 한나라당으로 간 변신은 또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영주권을 따기 위해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가짜 결혼을 하는 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영주권을 따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법을 어겼으나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도 하지만, 금배지를 달기위해 가짜 결혼을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수긍할 수 없는 윤리와 양식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더욱 딱한 것은 이런 현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는 한국의 정치 풍토와 한국인들의 정치의식입니다.
    여기에 무슨 정치 도덕이 있고 품위가 있습니까.
    정치는 철학이고 이념입니다. 정당은 철학과 이념을 뒷받침하는 기반이고 정치 생명의 모태입니다.
    정당을 신발 신듯이 바꿔 신는 정치인에게 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집단 이주를 한 국회의원들만 한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준 한나라당도 딱합니다.
    한국정치가 아무리 시장터에서 오가는 흥정처럼 추락했다고 해도 이런 거래는 정당의 격을 실추시키는 상거래입니다.
    한국적 정치 기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친박연대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다시 집단 입당해서 "친박계"라는 간판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친박연대" 깃발을 "친박계"라고 고쳐 들고 한나라당에 들어와 일사불란하게 박근혜 보스에게 충성하는 모습은 인솔자의 안내를 받으며 깃발을 들고 외국 공항에 내리는 집단 관광객을 연상시킵니다.
    일단 정당에 들어 왔으면 한솥밥을 먹을 일이지 허구한 날 패거리를 짓는 것은 자신들을 위해서나, 충성하려는 보스를 위해서나, 한나라당을 위해서나,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나 덕이 되질 않습니다.


    "친박"이란 간판이 올랐다고 해서 "친이"란 표지판까지 붙이는 것 또한 한나라당을 붕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직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친이계"란 명칭을 쓰는 것은 "친박계"란 깃발을 든 사람들과 똑 같은 의식구조입니다.
    멀리는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갈가리 찢겼던 한국 정치가 민주당 신파 구파로 분열되고, 다시 무슨 계 무슨 계로 갈라지는 이 고질적인 파벌과 붕당의 정치 전통을 아직도 붙들고 있습니다. 사색당쟁의 파당정치에는 늘 피를 부르는 사화가 있었고, 나라가 혼란했고, 모반과 반역이 있었습니다.
    신파 구파싸움은 박근혜씨 아버지 박정희 장군에게 정권까지 빼앗기게 했습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을 놓고 죽이고 죽였던 파당정치의 악유산은 아직도 세종시를 놓고 계속 전승되고 있습니다.
    파당정치와 붕당정치가 무서운 것은 이성이 마비되고 들쥐들처럼 보스의 깃발만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들쥐적 맹종을 한다면 광우병 시위 같은 들뒤적 집단 광기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들쥐들에게는 판단력도 의견도 격도 없습니다.

    사대주의적 외국어 약자 이름을 쓰는 정치의 격이나, 유행처럼 따라가는 "사모"의 정치격이나, 들쥐처럼 따라가는 "친 아무개"의 정치격은, 버리고 새로워져야할 한국 정치의 품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