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선우정 도쿄특파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얼마 전 한 일본인 교수가 이메일을 보냈다. 정치와는 큰 관계가 없는 경제학자다. 자신이 몸담은 단체가 오는 8월 도쿄에서 중국과 포럼을 연다는 것이다. 이 포럼에는 중국에서 주로 미국을 연구하는 엘리트들이 참석하는데, 일본의 참석 예정자들 중에 아베 신조 관방장관, 시오자키 야스히사 외무성 부대신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아베 관방장관은 우리에게 ‘일본 매파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알려진 차기 총리 1순위, 시오자키 부대신은 아베 장관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의원 모임인 ‘NAIS 그룹’을 형성한 인물이다. 중국과 그다지 친할 법하지 않은 실력자들이 중국과의 민간외교 무대에 얼굴을 내민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메일에 “걱정이 된다”고 썼다. 중국 참석자들이 아베 그룹을 싫어할까 걱정된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물밑에서 일본과 중국이 민간, 정부 할 것 없이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를 겨냥해 화해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은 갈등만 키우고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이 교수가 걱정한 것은 ‘한국의 고립’이었다.

    메일을 받은 얼마 후 일본 언론인, 한국 교수와 함께 술자리를 가졌다. 이번엔 한국 교수가 비슷한 걱정을 했다. 그가 예로 든 것은 중국이 재방문을 요청한 일본의 ‘3000명 방중단(訪中團)’ 이야기였다. ‘3000명 방중단’이란 1984년 중화전국청년협회(전청련)가 중·일 친선을 위해 베이징 등지로 초청한 일본 청년 3000명을 말한다. 당시 전청련 주석은 후진타오 현 중국 주석이었다. 물론 전청련 재방문 요청은 후진타오 주석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이 교수는 지금 중국 정부의 관심은 고이즈미가 아니라 이미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며칠 후 일본 외무성 관료와 저녁을 함께 했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 시점을 물었다. “10월부터”라고 답했다. 역시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한국의 고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하자, “중국은 기본적인 생각이 틀리지만 한국은 같지 않나.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방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배려라는 생각에 오히려 내 쪽에서 “너무 낙관적”이라고 말했다. 이유가 있다.

    도쿄에서 만나는 지일(知日)·지한(知韓) 인사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이른바 ‘반일(反日) 카드’다.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미(反美) 카드’가 위력을 발휘했듯이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국에 ‘반일 무드’가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일본 정계와 끈을 잇고 있는 인사들은 “일본 정치인에게 ‘내년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대응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한 번 분출된 민족 감정은 상대방의 대응과 상관없이 굴러간다는 것을 2002년의 경험을 통해 그들도 알고 있다.

    우리 집권층은 ‘일본과 중국은 영원한 적(敵)’이란 믿음을 품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한국이 일본과 멀어지는 만큼 중국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금 중국과 일본은 우리가 멀어지는 속도만큼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민들의 반일 무드를 강제로 억누르고, 일본은 우익 선동가의 반대에도 중국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당장 손을 잡아도 어색하지 않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반일 무드’로 또 한철을 보낸 뒤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 곁에는 북한만 남아 있을 것이란 비아냥은 이런 현실에 기초한다.